지역문제에 관한 유력한 사회학 자증의 한 사람인 허석렬 선생은 언젠가 지역문제에 관한 그의 글에서 지역을 바라보는 몇가지 주장 가운데 ‘지역의 물화(物化)’를 피해야 한다는 대단한 함축적인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다시말해서 지역의 문제를 바라보면서 ‘지역의 물화’를 피해야한다는 말의 의미는 지역이 가난한 것이 아니라 그 지역이 가난한 것이 아니라 그 지역에 살고 있는 민중이 가난한 것이 라는 무척이나 의미심장한 시사였다. 지역문제에 관한 이러한 그의탁견은 지역의 여러 문제를 놓고 고민하는 우리들에게서 지역에 대한 우리의 관심이 무엇으로부터 출발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많은 도움을 주는 대목이었다. 90년 한해의 「문화저널」을 샌각해보면서 필자는 바로 이러한 문제인식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보고자 한다.
무엇인가를 평가해 본다는 일은 언제나 그렇듯이 평가하는者 스스로의 자격과 관련지어 참으로 심란하고, 자신없고, 그래서 그토록 무책임할 수 없는 그런 작업인듯 하다. 역시 90년 한해의 「문화저널」을 평가해 본다는 일도 썩 기분내키는 일이라거나 그저 쉽게 할 수 있는 작업은 아니었다. 더욱이 그 안에서 실제로 일하는 사람의 고층을 저만치 떨어져 있는 바깥에서 자극히 편안한 자세로 관전하는 있는 우리 들오서는 참으로 속편한 이야기만 하게 될 것 같은 그런 미안함도 우리에게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화저널」이 얼마전 창간 3주년을 맞이하고 새로운 비약과 발전의 전망을 겸손한 바로 그때 받았던 ‘느낌’ 다시말해 「문화저널」은 이제 몇몇 개인들만의것이 아니라 지역문화의 굳건한 한부분으로서 지역전체가 같이 감당해야할 또다른 몫이라는 그런 느낌은 이제는 무엇인가 말해주어야 한다는 생각으로까지 발전되었다.
「문화저널」에 대한 우리의 가장 집요한 관심은 「문화저널」이 지향하는 문화적 관심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가에 대한 것이다. “문화에 대한 따뜻한 인식과 사랑”을 바탕으로 전통문화의 계승. 발전과 함께 구체적 삶에 근거한 건강한 문화의 보급을 통해 우리의 체위에 맞는 지역문화의 풍토를 조성해 보겠다고 하는「문화저널」의 가상한 뜻은 그동한 얼마나 치열했으며, 그‘구체적 삶’에 얼마나 가까이 갔는가, 그 동안 「문화저널」에 쏟아졌던 찬사와 비판중에 「문화저널」이 가장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과거 지향적’이다 라는 비판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문화저널」은 ‘오늘의 삶’ 속에 무엇을 가지고 얼마나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우리의 관심은 모아지고 있다. 그리고 어쩌면 이러한 문제들이 앞으로 「문화저널」의 미래를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과제들이 아닐까 생각해 보는 것이다.
우선 90년 한해 동안「문화저널」이 해왔던 몇가지 긁직한 사업들을 살펴보자. 「문화저널」은 올 한해 11권의 「문화저널」을 내놓은, 두 번의 문화 행사를 치렀으며, 여섯 번의 백제기행을 치우어 냈다. 「문화저널」의 이세가지 주요한 사업들은 각기 나름대로의 고유한 성격과 내용들을 가지면서 「문화저널」의 모양새를 규정해 왔던 것이다. 그간「문화저널」이 기획하고 이끌어 왔던 이 세가지 사업은 저질, 퇴폐의 대중문화가 범람하는 오늘의 현실속에서 우리의 전통문화를 계승, 발전시키고 건강한 문화를 보급하는데 대단히 성과있는 사업들이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체위레 맞는 지역문화의 풍토를 조성해 보겠다고 하는 「문화저널」의 목적과 그간의 사업을, 이 글의 서두에서 언급하였던 ‘지역의 문화’를 피해야 한다는 인식과 관련해서 볼 때 「문화저널」은 지역 민중들의 문화에 얼마나 기여해 왔는가를 우리는 살펴보아야 한다. 다시말해 「문화저널」의 그간기획들이 가난한 지역문화를 살찌우고 건강한 문화를 접할 수 있는 기회와 공간을 제공했지만, 지역민중들의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문화적 요구들에 대해서는 얼마나 고민해 왔으며 어떤 기획들을 시도해 왔는지를 이제는 보다 깊이 있게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문화의 지역적 편중을 이해하는 방식에 있어서 단순하게 서울 중심의 보다 수준 높은 문화와 여러 문화적 혜택들을 지역으로 그 위치만 이동시키는 것이 문화의 지역적 편중을 극복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지역문제의 문화적 측면을 이해할 때 그것은 단순한 공간적 의미가 아니라 그 지역에 살고 있는 민중에 대한 가장 직접적인 이해와 요구에 대한 고려가 있어야 한다. 다시말해「문화저널」이 기획하는 행사와 사업들이 어느 지역에서 이루어지는 가의 문제가 아니라, 그 지역에 관계없이 어떤 사람들이 참여하는가에 대해서 「문화저널」은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문화저널」이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부담으로부터 벗어나 ‘어떻게’할 것인가 그리고 ‘누구를’ 대상으로 할것인가에 대해서 고민해라 할 때라는 것이다.
「문화저널」이 치루어냈던 올해의 두 문화행사를 살펴보면 이러한 문제들은 바로 부각된다. ‘노래를 찾는 사람들’의 공연과 ‘김영동의 삼포가는 길’의 두 공연은 좀처럼 지역에서 접할 수 없는 우리시대 참 문화의 전형들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과 기쁨을 안겨다 주었지만, 그 두 문화행사는 오늘의 시대에 가장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삶 자체가 싸움인 그런 사람들을 위한 공연은 분명 아니었다. 또한 90년도 「문화저널」이 펴낸 11권의 기획은「문화저널」만이 해낼수 있는 ‘과거로의 긴 여핸’을 끈덕지게 해내고 있지만. 그 애착과 성의의 반만이라도 오늘의 민중들의 삶을 천착해가는 기획들로 메워진다면 ‘과거로의 긴 여행’은 더욱 더 그 빛을 낼 수 있을것이라는 점에 우리의 안타까움은 있다.
이제 17회를 맞이하는 「문화저널」의 백제기행이 오늘날의 민중들을 찾아서 군산의 TDI를 만나고, 우루과이 라운드로 생존의 문제에 직면하고 있는 농민의 삶을 만나갈 때 「문화저널」은 더욱 그 깊이를 더해 갈 수 있을 것이며, 「문화저널」이 기획하고 지역의 노래패와 풀물패가 연출하는 「문화저널」의 문화행사가 추수가 끝난 텅빈 벌판과 이리 후레아패션의 강당에 간이무대를 설치하고 삶의 피로에 지친 농민과 노동자를 위로할 때 「문화저널」은 지역문화의 맏형으로서 지역문화의 중심에 우뚝 설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자랑스런 「문화저널」이 주최되고, 서투르고 세련되지 않았으나 문화와 민중에 대한 애정과 사랑으로 뭉쳐진 지역의 모든 문화패가 각자의 모든 재주를 농민앞에 선보이며, 삶에 찌들고 지쳐버린 농민들이 공연의 그날을 설레이며 기다릴 그런 문화행사의 프랑카드가, 춥고 을씨년스러운 우리의 촌구석 어느 벌판에 휘날리는 그 모습은 상상만으로도 즐거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