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간에도 인륜을 저버리고, 부부간에는 법도가 없어지고, 형제간에도 훔쳐도망치고 정리(情理)가 끊어졌다. 읍성(邑城)이나 역보(驛堡)에는 술집이 그 반을 차지하고 궁벽한 마을에도 열 집이면 서너 집은 술집으로서, 사시사철을 끊이지 않고 술과 떡과 엿을 판다. 이로 말미암아 남자들은 농사를 짓지 아니하고 여자들은 길삼을 하지 않는다”
이 이야기는 200여년전 한 재야 실학자가 당시사회의 모습을 비판적으로 묘사한 글이다. 그는 나아가 당시의 윤리의식의 타락에 대해 지적하였다.
“양보라는 것은 예의염치의 근본으로서 양보하는 도가 망하면 예의염치의 네가지 도가 끊어짐은 필연적인 일이다. 근년 이래로 불행하게도 양보하는 기풍이 전혀 없어ㅣ고 백성들의 뜻이 음란하고 분수에 넘쳐 그 병이 폐부와 심장에 깊이든 것과 같다”
마치 오늘날 우리사회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는 것 같지 아니한가? 특히 극단적인 이기심과 집단이기주의, 과소비의 풍조를 그대로 지적하고 있는 것 같아 섬뜩하기 조차하다.
당시 영정조시대의 사회는 사회저변에서 새로운-흔히 자본주의의 맹아로 표현되듯이-변동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었던 시기였다. 이러한 변화는 역사적으로 사회발전을 수반하는 변동이기도 하였지만 기존의 체제나 이념, 농촌이나 도시사회의 기존 구조를 크게 변화시키고 있었다. 당연히 윤리적으로도 혼란이 오고 그러한 변화를 수용할 상부구조(윤리의식 내지 제도)가 정립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많은 모순과 폐해가 나타나고 있었다. 전라도에 살고 있었던 재야의 실학자 존재 위백규(1727~1798)는 이 시기에 나타나고 있었던 사회현상과 윤리의 타락을 이렇게 묘사하였던 것이다.
위백규의 이 지적은 당시 사회적변의 새로운 흐름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수용하거나 환영하는 입장은 아니었지만 거기에서 초래되는 폐해와 단시 사회의 일면을 예리하게 밝혀주고 있다. 동시에 그는 이러한 모순에 대해‘언제나 법이 오래되면 폐단이 생기게 마련이다, 따라서 그 폐단을 고치지 않으면 나라가 망한다’라고 하면서 제도개혁을 통하여 새로운 변화를 수용하고 폐해를 제거하자는 방책을 제시하였다. 요즈음 표현으로 하면 일종의 법개혁주의라고 할 수 있을 것도 같다.
위백규는 전라남도 장흔군 출신의 인물이지만 이란의 서문을 통해 밝힌 것처럼 조선시대에에는 전라남도와 북도가 하나의 행정구역으로 되었던 만큼 널리 호남지역의 실학파로 인정될 수 있는 인물은 포함하여 다루어도 관계없을 듯하다. 그는 이른바 호남파 실학자 안에서 제도개혁에 힘을 기울인 경세치용학파계열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1. 남도의 숨은 선비
위백규는 영조 3년(1727) 전라남도 장흥부 계촌동(현 장흥군 관산면 방촌)에서 진사 문덕(文德)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장흥이었고, 자를 자화(子華),호는 계항(桂巷) 또는 존재(存齋)라고 하였다. 위백규 스스로 자신의 저락한 출신배경을 삼벽(三僻,人僻,姓僻)이라고 한 것처럼 장흥 위씨는 고려시대에는 벌족 중의 하나였지만 조선건국초기 역모사건에 연루되어 중앙정계에서 탈락한 이래 한반도의 남단인 장흥에 내려와 대대로 살아왔다. 그 후‘사백년이래3품 현관이 한사람도 없을’ 정도의 한미한집안으로 몰락하였다. 그리하여 장흥부의 방촌을 중심으로 살았던 위씨일문은 관계에 진출하지 못한 채 농사를 지어 생계를 유지하는한편 독서하는 식자로서‘재지사족(在地士族)’내지‘농촌지식인’으로서의 삶을 살았던 것 같다. 정치・경제적인 어려움도 불구하고 존재의 할아버지 세보(世普)는 시, 그림, 글씨에 모두 뛰어나 ‘시서화삼절(詩書畵三絶)’이라 하였고, 작은 할아버지 춘담공(春潭公)은 학문이 깊어 존재의 초기 학문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러한 집안의 학문적 분위기와 지도아래 위백규는 남다른 총명과 노력으로 10세에 천문・지리・율력(律曆)・복무(卜巫)・도불(道佛)・산수(算數)・의학에 관한 서적을 열람하였고, 14세 이후에는 백공기예(白工技藝) 등 실용적인 학문에도 정진하였다 한다. 20세를 넘어서는 향촌에서 학생들을 모아 가르치는 등 향촌교화에 힘쓴 결과 24세 때에는 당시 장흥부사에 의해 천목(薦目)으로 천거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청년기를 맞이한 존재에 있어서 궁벽한 향리에서의 생황에 만족할 수는 없었다. 그는 25세때 멀리 충청도로 병계(屛溪) 윤봉구(尹鳳九;1681~1767)를 찾아가 뵙고 그의 문하에 들어갔다. 존재의 학문이 학문이 본격적으로 폭과 깊이를 더한 것은 이때부터였다. 즉, 그는 지금까지 가학(家學)수준에 머물렀던 자신의 학문을 되돌아보면서 훌쩍 뛰어 넘을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병계도 멀리 호남의 벽촌에서 찾아온 존재를 몹시 아꼈던 것 같다. 위백규의 호인‘존재(存齋)’도 그가 지어준 것이다. 당시 기호유림의 대학자 가운데 한사람이었던 병계의 문하에서 지도를 받고 대화를 나눈 15여년 간은 존재의 일생에 있어서 어느 때 보다도 학문에 전념할 수 있었던 소중한 시기였다. 그의 대부분의 저술들이 이때초고로 준비되었거나 완성되었다.
한편 23세이래 과거에 계속 응기 하였던 존재는 39세에 비로소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나 과거시험에 회의를 느끼고 대과(大科)응시를 포기하였다. 40세가 되던 해 존재는 고향으로 돌아와 향촌사회의 교화와 자제들의 교육에 힘썻다. 마침 이해 겨울 스슬 병계가 별세하게 되자 존재는 자신의 진로를 확실하게 결정하게 되었다. 그는 고향의 계향산속에 다산정사(茶山精舍)를 세우고 독서와 저술에 힘쓰는 한편 양정숙(養正塾)이라는 서원을 세워 학문을 배울 여건이 못되는 문중의 자제들과 노비들까지도 모아 교육하였다. 그는 낮에는 농사일을 하고 밤에는 책을 보며 가르치는 글자그대로의 주경야독(晝耕夜讀)을 실천하였으며, 문하생들에게도 그대로 실행하게 하였다. 그는 또한 ‘양정숙학규(養正塾學規)’와 ‘사약(社約)’을 만들어 당시 문란해진 향촌사회의 풍속을 바로잡고자 노력하였다. 존재는 비록 목민관으로서 뜻을 펼 수 있는 기회를 얻지 못하였지만 이러한 실천적인 노력을 통하여 당시의 사회모순을 바로잡아 보고자했던 것이다.
이러한 그의 정력적이고 실천적인 활동으로 인하여 그의 학숙은 향리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였으며, 마침내 중앙정부에도 알려졌다. 그 결과 70세 되던해에는 왕명에 의해 그의 문집이 내각에 들어갔으며, 기장현감, 태인현감, 옥과현감 등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이 때는 이미 늙은 후라 자신의 경제사상을 <만언봉사(萬言封事)>에 담아 임금에게 올리고 사직하였다. 정조는 다시장원서 별제(別提;정6품), 경기전령(慶基殿令;종5품)등의 직을 제수하였으나 존재는 노환으로 부임하지 못한 채 정조 22년(1798) 72세를 일기로 생을 마치었다.
2.내성적인 성격의 행동파 지식인
존재는 거의 평생을 반도의 최남단인 장흥의 반촌에서 지내었다. 그는 이러한 지역적인 편재성과 경제적 어려움에 더하여 관계에 진출하지 못하였고, 이렇다할 명사와의 교류도 없었다. 스승인 병계를 제외하고는 당시 영정조시대의 이름난 실학자들과도 거의 교유가 없었다. 전북 고창의 실학자인 이재황윤석돠 약간 교류했을 뿐이었다. 여기에는 위와 같은 조건 외에도 그의 내성적인 성격에 크게 기인하였던 것 같다. 병계의 문하에 들어간 후 과거에 응시하면서 여러 지방을 경유하였으나 자신의 내성적이고 냉소적인 성격으로 권세있는 관리나 대가의 집에 출입하지않았을 뿐만 아니라 학문적 교유마저 하지 못했다고 하였다. 스승 병계가 죽고난후 향리에 은거하면서 부터는 더욱 교류가 없었다. 이러한 내성적인 성격이 그의 학문과 사상에 있어서는 큰 제약요건으로 작용하기도 하였다. 한편 그는 항상 자신의 뜻을 이어받을 제자가 없음을한탄하였다고 한 점으로 보아 뛰어난 제자도 없었던 것닽다. 존재의 학문과 사상이 당대와 후대에 걸쳐 널리 알려지지 못하였던 원인이었던 것이다.
존재는 천성이 소박하고 순수하였으며 고결하였다. 그는 평생을 호남의 한 끝에서 숨은 선비로 살며 고고하게 생을 마쳤다. 그러나 때때로 자신의 불우한 처지를 한탄하여 수백편의 시와 수필을 글로 나기기도 하였다. 그는 자신의 뜻을 담론할 벗이 없음을 한탄하며 오직 매화를 벗삼아 시를 읊었다한다. 그 시들은 《연어(然語)》에 수록되어 있는데 여기서 그는 자신을 매화에 비유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의 시는 한가한 정서를 읊은 것이 아니라 현실에 대한 강한 비판의식을 담고 있었으며, 실욕적인 시풍(詩風)을 이루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그의 기행문이나 수필에 나타나 있는 문체 또한 아주 사실적이어서 연암 박지원에 앞서 우리나라 사실주의 문학의 선구를 이우었다고도 평해진다.
존재는 실천적인 인물이었다. 어려서부터 잡기를 멀리하였고 사소한 언행이라도 과실이 있으면 깊이 자책하고 반성하는 자세를 평생 유지하였으며, 스승 병계가 써준‘경의’ 2자를 항상 곁에 두고 생활신조로 삼았다고 한다. 그는 또한 당시의 사회적 병폐의 가장 근본적인이류로서 지식인이 자신의 역할을 방기하고 있는 점을 지적하였는데, 스스로 실천적인 지식인과 교육자로서의 수범을 보임으로써 자신의 문제제기에 대답을 하고자 노력하였다. 그가 과업(科業)을 포기하고 향리에서 교육과 계몽적인 활동을 시작하였을 때 주위에서는 냉소적이었으나 묵묵히 실천하여 나중에는 큰 호응을 받아내었다 한다. 내성적이고 과묵하면서도 실천적인 그의 면모를 엿볼 수 있는 일화라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