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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1 | 연재 [사람과사람]
이 땅과 어머니의 잠든 신화 깨우기大東夷의 저자 박문기씨를 찾아서
이병천 소설가(2004-01-29 11:14:44)

농부사학자, 그리고 더해서 제야 역사소설가라고 지칭해야 비로소 모습이 그려지는 박문기씨를 만나러가는 길 내내 나는 우울하고 적막하였다. 김용택과 안도현이라는 당대 제일의 시객들을 이끌고 나는 그 전날 밤 우리집에 갔던 것인데 술 한잔은커녕 아침해장 한그릇 얻어먹지 못했던 것이다. 찬겨울의 새벽길을 나서는 우리들의 풍경은 여인숙에 코트를 저당잡히고 총총히 떠나온 가엾은 서생 영락없기도 했으리라. 그들의 속이야 다시 시내로 나와 목욕과 시래기국으로 내가 풀어주엇다고 하지만 비례(非禮)와 송구스러움으로 난도질 당한 내 오장육부는 뉘 있어 슬어지기라도 했단 말인가.
전날 저녁 전북민족문학인협의회 회원들이 함께 했던 술판은 한없이 호기롭고 진지했었다. 그래서 그 저녁과 새벽의 나는 마치 구제받을 수 없는 조울증환자의 말기처럼 조와 울의 극치를 맛보며 오갔던 것이다. 이래저래 나는 또 정치판에서 소외를 당할 때마다 남해쪽 자기 아버지를 찾아가 일러바친다는 유약하고 지조없는 어느 정치인처럼 내 어머니의 신화를 떠올렸다. 내가 술을 마시고 들어온 새벽녘이면 어머니는 그러셨던 것이다. 『야이, 오살노무 자식아! 술이 그렇게 웬수냐 아니면 늬에미가 그렇게 웬수냐?』그 지독한 욕설과 함께 내미시는 꿀물을 받아마시다보면 나는 퍽이나 눈물겹기도 했었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어머니는 내 낯색이 비로소 사람꼴로 돌아설 때까지 눈물 그렁거리며 남의 품앗이 일조차 나가지 않으셨던 것이다.
그러나 내 우울함은 단순히 그런 이유만이 아니었다. 내가 우리 어머니에 그치는 단세포적인 신화를 반추하며 피곤한 걸음을 재촉해서 만나러 가는 사람이 과연 누구이던가. 어머니 신화의 뿌리를 캐고 파헤쳐서는 급기야 민족원형의 신화에까지 가닿은 사람, 그래서 우리 민족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그것도 단군임금의 건국에서 기자조선 탄생전까지의 역사를 밝혀 열다섯권의 대하소설을 쓰고 있는 사람, 우리가 신화로 스스로 물들여 놓고는 또 불신하기도 하는 상고사에 대해 확고한 자료와 신념을 지니고 있는 사람, 바로 그였기 때문이다.
뜰이 넓은 마당에는 크게 두채의 집이 있었다. 아랫채의 양옥에는 그를 정점으로한 가족이 기거하는 곳이었고 십여미터 안쪽의 한옥은 그의 모친 최영단여사가 거주하는 곳이었다. 나는 언젠가 그 모친의 생애에 대해서 소설을 쓰기로 반승락은 해둔 터이지만 여기서 최영단여사에 관해 얘기하는 것은 여간 조심스럽지 않다. 그러나, 지난 오륙십년대 환자가 찾아와 눈을 마주치기만 해도 병을 낫게 했으며 그래서 한갓진 시골 마을에 인산인해를 이루는 내방객들을 위해 기차의 간이역이 생기고 버스터미널이 만들어지게도 했던 장본인을 기억하는가. 그분이 바로 박문기씨의 모친 최영단여사라는 점만 밝혀두기로 하자.
찾아간 일행이 최여사에게 큰절을 드리고 바깥으로 나섰을 때에서야 영락없는 농부차림의 그가 나타났다. 그가 스스로의 호를 지었듯 농초, 귀머거리 나무꾼의 모습에 다름 아니었다. 새벽에 활을 쏘러 나갔었다는 얘기로부터 우리는 대하처럼 흐르게될 거대한 이야기의 봇물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때마침 좋은 소재이기도 했다. 활과 우리 민족의 관계에 대해서는 그가 이미 『대동이(大東夷)』, 이전 『맥이(貊耳)』에서 자세하게 밝힌 바 있었다. 중국인들은 우리를 일러 동쪽의 오랑캐라는 뜻으로 동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 뜻이 어떻게 왜곡됐든 그것은 활을 잘 만들고 쏜다는 뜻에 다름 아니었다. 그에 비해서 서방 사람들은 창을 잘썼기 때문에 서융(西戎)이라고 했으면 남만(南蠻) 북적(北狄)의 오랑캐들은 아예 벌레나 짐승쯤으로 여겼음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는 것이다. 동이의 이(夷)자만 해도 대(大)자와 활 궁(弓)의 합자임을 알 수 있지 않은가. 이 이(夷)에 대한 바른 해석이 바로 그의 역사인식의 처음이기도 하고 방대한 저술의 첫머리이기도 하다.
그에 의하면 활은 맨처음 우리 민족의 한 자랑스러운 효자의 장례 풍속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옛적 부모의 시신을 짐승으로부터 지키기 위한 도구로 활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민족은 자고로 장사지낸다는 뜻으로 조(弔)를 썼으니 이는 활에 화살을 먹인 형국이라고 한다. 대신 중국인들은 이때 조(吊)를 써왔거니와 수건으로 입을 틀어막은, 불효자의 언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근래에 들어 중국인이 죽은 것도 아닌데 조(吊)를 쓰는 사람들이 있다. 다시 복습을 하기로 하자. 조(弔)는 한국인의 죽을 조, 조(吊)는 중국인의 죽을 조로 엄밀하게 그것은 우리에게는 「적」자가 된다. 그러나 어디 그뿐이랴. 이(夷)자만 해도 우리는 오랫동안 그것을 「오랑캐 이」라고 읽어왔다. 그의 가르침대로 한다면 이제라도 우리는 그걸 「큰활 사용하는 민족 이」라고 읽어야 한다. 그런데 글자 하나의 뜻을 잘못 새기는 일은 물론 그 자체의 문제로 끝나지는 않는다. 예를 들자면 우리는 여태껏 「미국」을 어떻게 써왔던가. 백년전부터 우리가 미국(美國)이라고 쓰고 있을 때 일본인들은 미국(米國)이라고 쓰지 않았던가. 요즘 미국쌀 수입개방 압력을 받으며, 캘리포니아산 쌀을 착잡한 마음으로 바라보면서 일본인들의 선견지명과 언어 사용의 적확성을 부러워하게 된다.
『맥이(貊夷)』라는 책은 지난 87년 그가 맨처음 저술한 것으로 우리 민족의 시원과 잘못된 역사에 대한 단편적인 주장을 담은 것이다. 은(慇)나라의 문명을 흥성케 한 주역이 바로 우리 동이족이었다는 얘기며 복희씨며 신농씨, 뿐만 아니라 은나라의 순임금이나 공자(孔子)와 같은 이들도 우리 동이족이라는 주장이다. 이와 함께 융성했던 우리 민족이 왜 도대체 오늘과 같은 꼴로 전락하고 말았는지, 왜 우리는 웅대한 역사를 잃고 말았는지에 대해서도 얘기를 하고 있다. 얼핏 보면 누구나 황당무계하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읽다보면 옛 중국의 경전 등 문헌을 광법위하게 인용하고 있어서 그대로 믿는 것이 더 편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이다. 우리는 여기서 이 주장들을 다 옮길수는 없다. 그런 애석함을 통찰했음인지 원래 한문이 우리 민족의 글자였음을 힘들이지 않고 그는 그렇게 설명한다. 이를테면 『북(北)』이라고 써놓고 주인이라는 자들은 『빼이』라고 읽는다. 글자 하나가 별스럽게도 이중모음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게 바로 주인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물론 주장이 여기서 그치지는 않는다. 앞에서도 얘기한 것처럼 그의 책을 읽다보면 그 방대한 인용 때문에 오히려 믿는게 편할 정도이다. 아니, 믿고 안믿고의 문제가 아니라 그대로 진리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귀먹은 나뭇꾼에 지나지 않는다는 그가 어떻게 그 많은 주장과 인용들을 펼칠 수 있었을까. 얘기에 의하면 그는 왠만한 도서관 하나쯤은 가득 찰 만큼의 독서를 했다고 한다. 한창 공부할 즈음 그의 동생의 회고에 의하면 방의 불이 꺼지는 것을 단 한차례도 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는 것이다. 그 자신이 무릅에 꾸득살이 배기도록 책을 읽은 셈이다. 그런데 방의 불도 자주 일찍부터 꺼지게 하는가 하면 무릎에 꾸득살도 없는 사람들이 그의 주장을 황당무계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다가 그는 아무리 어렵고 긴 내용의 책이라도 두세번만 읽으면 그대로 외워서 복사해낼 수 있는 재주를 지녔다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책이란 물론 한문으로 씌어진 것들이다. 실제로 그는 내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한 일이 있는데 광개토대왕의 비문을 줄줄이 외우고 있어서 내가 그의 입을 호기심으로 지켜보았던 일도 있다. 그러나 내 생각에 의하면 천하의 명문장이나 바른 문장은 글의 이치를 깨치기만 했어도 외우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사실은 문장에 억지가 끼어 있어서 외우려고 하는 이들을 골탕 먹이는 것이다. 거기에 가락이 베어있는 노래라도 유행가라면 별스럽게 잘 외워지지 않는 이치를 궁리해본 적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수긍하리라.
『맥이(貊耳)』에는 제목이 상징하듯 우리 민족의 수신이었던 맥(貊)의 형상을 타고났던 인정상관에 대한, 믿기에 곤란한 얘기도 소개돼 있다. 인정상관은 그의 모친 최영단 여사의 스승겸 양어머니였다. 이 책에는 또한 오늘날의 서양사람인 서융(西戎)이 원래는 견융족으로써 어쩌다가 개의 후손이 됐는지에 대해서도 흥미롭게 진술하고 있다. 이 얘기 역시 그 근거는 책을 읽어서 알도록 권하면서 다만 그 조상과 후손의 닮은 점만을 몇 개 맛뵈기로 소개하면 이렇다.
『서양인들은 인류의 조상을 유인원(類人猿)이라 하여 꼬리가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으니, 어느 정도는 이해할 만하다. 게다가 로마인들은 자신의 조상이 이리라고 얘기하거니와 이는 개의 와전이다. 대개 동양인의 눈은 흑백이 분명하여 눈동자가 검은데 그들의 눈은 파랗거나 노랗고, 우리들의 살갗은 모공에 보이지 않을 정도의 털이 있을 뿐인데 그들의 살갗에는 오색의 털이 길게 나있으며, 음식을 먹을 때 동양인은 웃입술이 발달하여 바르게 먹으나 그들은 아랫입술이 발달하여 핥아먹으며, 그들의 장부도 동양인과는 달라서 대변을 볼 때 소변이 나오지 않는다. 또 그들이 성품을 논할진데, 자기를 낳고 길러준 부모의 은공도 모르고 부모 역시 자식이 어느 정도 자라면 돌아보지 않으며 잔인하나 영리하며 상관이나 주인데 대한 복종심이 대단하다. 또 그들이 조상을 알아보는지 모르나 견공을 끔찍이도 사랑하며, 견공의 고기를 먹지 않고, 우리의 주식인 된장 냄새를 끔찍이도 싫어하고, 어떤 나라는 견공의 고기를 먹는 나라와는 국교까지도 단절한다고 하며, 견공에게 유산을 물려주는 자도 있다고 한다』
이렇듯 닮은 점만을 얘기하기로 해도 지면은 모자랄 것이다. 다만 개의 이빨 구조와 서양인들의 그것이 같다고 하니 놀랄 일이다. 실제로 그의 동생이 유학을 가서 사귀었던 서양여자 살로마라는 여성이 그의 집에 왔을 때 칡차를 시험삼아 대접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 잘 알다시피 개들은 무엇이나 인간이 먹는 음식을 다 먹으나 칡만큼은 먹지 않는다. 그런데 칡차 한 모금을 마신 이 서양여성을 아니나 다를까 그 자리에서 졸도를 했다고 한다. 얘기들이 아무래도 믿기 어렵거든 책을 보기 바란다. 우리의 조상들은 진리에 대한 믿음이 흔들릴 때마다 책을 펼쳐들곤 했었다.
우리의 얘기는 그 다음부터 그렇다면 도대체 서양이란 무엇인가로 옮겨졌다. 그는 우선 「개떡」에 대해서 언급하였다. 보통의 쌀로 만든 떡에 대비해서 밀가루로 만든 것을 우리는 일찍부터 개떡이라고 불러왔다. 밀이 서양인의 주식이고 보면 개떡이라는 정확한 표현도 달리 없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웃었다. 그러나 그의 빛나는 학식에 의한 이 땅과 역사에 대한 죄짓지 않는 삶의 확고한 주장은 거기서부터 불꽃을 튀기 시작하였다. 그는 음식의 정이 우리의 피를 만들고 그 피가 곧 우리의 몸은 말할 것도 없이 마음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옛적 가르침에 의하면 임신했을 경우 언제나 제철에 나는 음식을 먹어야 한다고 했다. 최근 들어 겨울에 수박을 먹고 딸기를 사다 먹이는 일이 있는데 그래서 요즘 들어 아이들이 이른바 〈철〉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항차 개떡이며 라면 빵등의 밀가루 음식이라니… 그게 아니라도 밀가루를 무엇인가로 가공해서 파는 회사들은 역적이라는 주장을 그는 서슴지 않고 했다. 우리의 땅에서 밀가루는 단 1퍼센트도 생산이 안되기 때문에 그들은 외국 농부들을 위할 뿐이라는 것이었다. 그런 그에게 농약은 망국(亡國) 이상의 의미를 지닌 거이기도 했다. 실제로 그는 〈농약이 생긴 이래로〉단 한차례도 농약을 사용하지 않고 구십마지기의 농사를 지어왔다고 한다. 그의 말에 의하면 불과 이십년전만 하더라도 우리나라에서는 전국 어디서나 흘러가는 물이라면 모두 그냥 마실 수 있었다고 한다. 그렇기에 우리 속담에 흘러가는 물도 떠서주면 공덕이 된다고 했는지도 모른다. 실제로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우리가 잠지를 내놓고 멱을 감고 잇는 저 아래에서는 길가던 아주머니들이 표주박을 만들어 그 물을 그냥 떠서 마시고는 했다. 어쨌거나 이렇듯 축복받은 땅은 세계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었다. 중국만 해도 그 넣은 천지에서 유일하게 제남의 물만을 그렇게 마실 수 있었으니 제남의 차(茶)가 유명해진 이유가 그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이런 신념이 있기에 그는 땅에 죄를 짓지 않고 사는 삶을 가장 지고지순한 삶이라는 생각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책 몇권을 쓰느니보다 당장 때려치우고 그 일에 나서고 싶다는 얘기도 하였다. 여기 이쯤에서 나는 그가 당분간은 공개하지 말라고 당부했던 비밀을 하나 발설하고 싶어서 몸이 근질거린다. 어느때 그가 병충해로 고민을 하고 있자 그의 모친이 논에 나가 풍물을 해보라고 귀띔을 해주었다고 한다. 그는 그대로 했다. 그런데 결과는 그도 놀랄 정도였다. 병충해가 말끔하게 방제됐는가 하면 수확도 늘어나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뒤로 씻나락을 담글 때부터 그 주위에서 농악을 치곤 한다는데 그럴 여유가 없으면 녹음된 테이프라도 틀어놓는다는 것이다. 과연, 옛적 우리네 조상들이 어떻게 농사를 지어왔던가. 우리는 흔히 모를 내면서 농악을 해왔던게 노동의 고단함을 잊기 위해서라고 마음 편히 생각해왔다. 그렇다면 왜 추수기에 접어들어서는 농악을 치지 않았을까. 아무 뜻없이 농악을 치는 듯이 보였지만 옛적 농민들은 농악을 치다보면 병충해가 방제되기도 하는 것임을 경험으로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확실히 농악이 사라지면서 농약이 등장하였다. 말장난으로 들릴지도 모르는 이 말은 중대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가 그 사실을 비밀로 해두자고 했던 것은 다름 아니었다. 그 원료를 외국에서 수입해다가 완제품을 만드는 농약회사들의 역적질, 우리의 땅과 물을 외국처럼 형편없게 만들면서 돈만 벌려고 하는 농약회사들의 거친 반발과 대응이 아직은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보라. 눈에 보이는 과학만을 숭상하는 이들을 위해 나는 과학적인 상식을 전하고자 한다. 연전 미국의 과학 연구기관이 콩이 혹시 몇몇 소리에 대하여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조사하여 발표한 적이 있었다. 그 결과에 의하면 콩은, 우리가 메주를 만들기도 하고 콩나물로 길러먹기도 하는 그 콩은, 오토바이가 부릉부릉하는 소리를 가장 즐겨한다는 것이었다. 콩이 아무래도 비트 제네레이션인 모양인데 두 번째는 또 엉뚱하게 아름다운 여자들이 추는 춤과 그 무용음악을 즐긴다는 것이었다.
이 땅에 죄를 짓지 않고 살도록 하기 위해 그는 그의 다섯 아이들을 모두 대학에 보내지 않겠다고 한다. 생각 같으면 국민학교 과정만 이수하도록 할려고도 했다고 한다. 이 나라 교육이 민족과 국토를 배반하기 때문이라는 설명이었다. 그 자신이 바로 그렇게 공부하고 독학으로 나머지를 채운 사람이었다. 국민학교에 입학할 무렵 그는 딸에게 엄명을 내렸다. 산수에서 만큼은 절대로 50점 이상을 받아오지 말라는 것이었다. 관계되는 이들이 섭섭해할지 모르겠으나 여자가 일찍부터 수리에 밝으면 덕이 없어진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런데 그의 딸이 3학년때 학교에서 산수왕을 받아온 적이 있어서 〈어찌나 뷔아가 나는지〉 난리를 피운 적이 있기도 하다고 했다. 우리는 또 눈물이 나도록 웃었다. 우리가 받은 교육에 대한 뼈아픈 반성 때문이었다. 궁극적으로 남을 속이고 남을 이기고 또 서양적 사고방식을 갖게 하는 민족적 원형의 삶을 배반케 하는 그 교육을 우리는 이미 다 마쳐버렸던 것이다.
겨울해는 비록 짧으나 우리들의 얘기도 어느새 저녁나절에 이르러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일어서기로 하고 그러기 전에 그의 모친 최영단 여사에게서 무엇인가 더욱 값진 얘기를 듣기로 하고 찾아갔다. 옛적의 명성을 아직도 기억하여 찾아왔던 손님들도 다행히 모두 돌아간 뒤였다. 나는 왜 그렇게 세상이 험악하고 희망이란 보이지 않는 것이냐고 따지듯이 물었다. 그분은 빙그레 웃으시며, 이제 고생을 할만큼 했으니까 좋은 때도 곧 오겠지요 라고 말하였다. 내 질문부터가 너무 막연해서 나는 구체적으로 물었어야 했다. 나는 질문을 달리 했다. 왜 손자들에게 공부를 많이 시키려고 하지 않는가 하는 점이었다. 그런데 나는 하필 그 중요한 부분에서 놀랍게도 그때까지 쓰라리던 내속이 말끔하게 개어있는 것을 의식하였다. 그 분과 눈이 마주쳤기 때문이었을까. 나는 궁리해 보았다. 아마도 그게 아니라 농약도 치지 않았으며 조미료도 치지 않았다는 싱건지국물에 점심밥을 말아먹고 색이 파란 배춧잎을 우적우적 밀어넣었던 탓이었을 것이다. 그분은 때마침 여자에게 있어 교육이 어떤 위험성을 낳을지를 말하고 있었다. 나는 여기서 그말을 옮기지 않고자 한다. 이 글의 앞부분을 읽어본 내 아내는 엉엉 소리내어 한참을 울었다.
아니다. 나는 아내를 원망하지 않는다. 그녀는 자기 아들을 얼마나 끔찍이도 사랑하는가. 그래서 나는 세상에 대해 잠시 생각해본다. 사람들은 우리 인류의 생활이며 역사가 마치 비행기가 이륙하는 상승곡선으로 그려볼는지도 모른다. 맨발로 활주로 같은 곳을 달려오다가 우마차를 타던 세월을 살고 자동차로 달리는가 했더니 비행기로 부웅 하늘을 날기도 하다가 종국에는 은하철도 999처럼 광대한 우주를 상승하는 따위의 모습으로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역사발전의 과정이 아니라 엄밀하게는 과학발달의 과정을 혼동한 것에 지나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내 생각에 인류는 지하계단을 따라 묵묵하게 내려가는 역사를 꾸리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올해 4325개 째의 계단에 내려섰다. 죄지은 자들처럼 무작정 역사를 끌고 내려가다가 힐끗 뒤돌아 보니 저 멀리 위로 동그랗게 밝게 빛나는 입구가 보인다. 7천개쯤의 계단에 이르른 우리네 후손들은 그 빛을 보면 그것이 태양이라고 우기는 놈들도 있을 것이다. 만개쯤의 계단에 이르러서는 그 빛이 작고 희미하기 때문에 달이라고 우기는 넋떨어진 후손들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해도, 달도, 그렇다고 별도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빠져나가야할 입구이며 시작인가 하면 분명한 현실이기도 하다. 그곳에 단군임검의 상고사가 펼쳐지고 있거니 불과 8조금법으로 다스려지던 태평시대, 공자가 탄식하면서 가서 살고 싶다고 했던 동이의 나라가 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도대체 그 입구를 달빛어린 신화로만 파악하는가. 5천개의 계단에 죄를 지으면서 채 내려서기 전에 농부 사학자 박문기 선생이 우리를 붙들고 들려주는 얘기들은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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