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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1 | 연재 [교사일기]
글쓰기, 무엇이 문제인가
박성구 이일여고 교사(2004-01-29 11:16:55)

1. 없어진 한글날을 위하여

몇 년 전부터 한글날을 공휴일에서 제외하느니, 학교 등 관계되는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만 공휴일로 한다느니, 그 조짐이 심상찮더니 1991년에 드디어 한글날이 공유일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쉬는 날이 하루 없어진 것도 솔직히 말해서 서운하지만, 그런 값싼 감정적 차원을 떠나서도 보통 약오르는 ‘사건’이 아니다. 어떤 선진국도 자기나라의 글자의 탄생을 기념하는 나라가 없다는 ‘높은 양반’의 말씀을 들으면 우리도 이제 선진국으로 들어가는가 보다 하고 자칫 위로할 뻔도 하지만 그러한 ‘정치적 거짓’에 속을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니 약이 오르다 못해 갑자기 허탈함을 감출 수 없는 사건이기도 하다. 한글날을 없앤 실제 중요한 이유는 쉬는 날이 너무 많아 노동 생산성의 저하를 초래하기 때문이라는 것도 아니요, 그 진짜 이유는 한글날만 돌아오면 새삼스럽게 생각하게 되는 ‘그님’의 자주정신과 애민정신, 그리고 실용정신이 이 반도의 ‘어떤 사람들’에게는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서운함과 약오름, 허탈함을 떠나서 안타까운 생각마저 든다.
이리하여 생각한 것이 좀더 색다른 백일장이었다.

2. 백일장은 ‘글쓰기 잔치’이어야 한다.
학교마다 한 해에 한 번씩은 소위 백일장이라는 것을 실시한다. 주제나 제재에 해당하는 제목을 학생들에게 주고, 학생들이 그것에 대하여 글을 쓰는 동안에 선생님들은 오랜만에 편안한 휴식을 취하거나 친목회를 하거나 하면서 한나절을 보내는 것이 이미 굳어져 버린 인습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이것은 보통의 직무유기가 아니다. 아이들에게 글거리를 주었으면 선생님들도 아이들의 글의 내용을 짐작해 보면서 함께 글을 쓰는 것이 바람직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나의 이 의견을 이상적이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이상이 아니다. 사제동행이라는 말을 떠올릴 것도 없이 선생님도 글을 떠나서는 하루도 살 수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백일장은 ‘글쓰기 잔치’이어야 한다.

3. 잔치는 흥청거려야 잔치답다.
그동안의 글쓰기는 통제가 심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주제나 제재를 주어도 교과서적인 틀을 벗어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것에 대한 글의 내용을 미리 설정해 놓은 자로 잰다는 점에서 통제적인 글쓰기라고 할 수 밖에 없다. 이것은 마치 조선시대에 관리가 되기 위하여 과거시험을 보는 것과 같아서 아이들의 정서나 사고를 자유롭게 하는데 이바지하지 못한다.
우리가 없어진 한글날을 위하여 선택한 글쓰기의 형태는 아무런 언어도 주지 아니하고 ‘의미있는, 그러나 그 의미가 결코 확정되었다고 볼 수 없는’ 그림을 제시하여 각자의 체험을 바탕으로 연상되는 바를 형상화해보되, 두 사람 이상이 함께 써도 좋다는 것이었다. 물론 이러한 형식을 택한 것은 아이들에게 최대한의 자유연상을 가능하게 하여, 글의 내용이 ‘가치있는 체험’이 되도록 하자는 뜻에서였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아이들은 우선 그림을 매우 흥미있고 주의깊게 보았고, 그림에서 각자가 연상한 바를 잔디밭에서 서로 이야기하는 장면부터가 참으로 아름다웠다. 일단 생각도 없이 반 의무적으로 시험문제의 정답을 쓰듯이 글을 쓰는 태도는 찾아볼수가 없었다. 이것이 성공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4. 주제나 제재는 다양하고 절실한 것이어야 한다
우리가 이날 제시한 그림(사진)은 14컷 이었는데, 그것을 설명하면 대체로 다음과 같다.
1) 원광대학교 체육관에서 탁구선수들을 응원하던 우리 아이들 스스로의 모습
2) 대나무 숲에 둘러싸인 고가의 장독대
3) 우리 전통가옥의 격자문
4) 퉁퉁 분 엄마의 젖을 먹는 아이
5) 주택복권을 움켜쥔 사나이와 그 옆에서 머리를 긁는 사나이
6) 북누리 여성들이 공원에서 흥겹게 춤을 추는 장면
7) 사생대회에서 그림을 그리는 소녀와 그 꼬마 남동생
8) 돌상에서 무엇을 집을까 망설이는 아이
9) 화장품 미스쾌남의 광고(여성의 엉덩이와 각선미가 두드러짐)
10) 고 성래운 교수의 강연 장면(울부짖는 듯함)
11) 고층 아파트와 게딱지 같은 많은 집들의 부조화
12) 1990 지구의 날 행사 장면(생존, 평화라는 글자가 보임)
13) 마치 외제 이름 같은 우리 상품 이름들
14) 잠자리채를 들고 뛰어가는 아이와 환상적인 공간
물론 이러한 그림을 선택하는 데 일정한 기준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림 9)로부터 13)까지는 아이들의 현실인식의 정도를 측정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지만 그 외에는 아이들의 일상적 정서를 자연스럽게 표현하도록 유도하는 것이었다.

5. 아이들은 결코 단순하지 않았다
아이들이 쓴 글의 내용은 대체로 두 부류로 나뉘었다. 하나는 어린시절에 대한 그리움과 어머니에 대한 사랑이었고, 다른 하나는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비판이었다.
물론, 아이들의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비판이 모두 논리적인 것은 아니었다. ‘가진 자’를 원망하고 자신의 가난한 현실을 푸념하는 내용은 넋두리처럼 느껴지기도 해서 비판으로서의 성격을 갖추는 데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현실에 대한 정확한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그 가치는 일정수준 인정되어야 한다.
다음과 같은 글을 보자.
우리는 요즘 우리나라 부유층 사람들의 사치풍조가 위험의 정도를 넘어서고 있다는 것을 안다. 요즘 TV에서는 흥청망청 돈을 물쓰듯 쓰는 사람들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런 사람들이 과연 변화될까? 조금이라도 찔리는 구석이 있어서 좋은 일 한번 했으면 좋겠다.
일전에 뉴스에서 어떤 여자는 무선전화기를 들고 다니며 어떤 이들은 길거리에서 진한 장면을 연출하고 어떤 대학생들은 르망, 스텔라는 보통이고 심지어 그랜저까지 타고 다니는 사람도 있다고 보도하였다.
정말 비교된다. 한쪽에선 먹고 살자고 죽으라고 고생하고 그날 그날 입에 풀칠 하는데 다른 한쪽에선 흥청망청, 국산은 질이 나빠, 외제가 제일이야 하며, 살다니.

이 글은 그림 11)을 보고 쓴글이다. 현실을 근거로 삼으면서 거침없이 나아가는 모습이 참으로 당당하다. 그리하여 ‘가진 자’에 대한 공격과 지신에 대한 푸념이 엿보이기도 하지만, 자신은 ‘그들’같이는 살지 않겠다는 결의가 보이기도 한다. 이 아이를 어찌 단순하다 하겠는가?

6. 글은 유령이 아니다
우리들은 곧잘 ‘글은 삶의 기록이다,’라는 말을 한다. 물론 이말은, 글은 모름지기 체험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보라. 전혀 체험에서 비롯되지 아니한, 순전히 관념 위에서 쓰여지는 글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리고, 반성하라. 그것을 오히려 뜻이 깊다고 하여 아이들에게 찬양을 아끼지 않은 사람들은 반드시 반성해야 한다.(나 자신도 마땅히 그리해야 할 사람중의 한 사람이다) 글은 켤코 목소리만 있고 실체가 없는 ‘유령’이 아니다. 우리 아이들은 ‘인간’을 사랑해야지 유령을 사랑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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