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향전의 무대로 유명한 남원지방은 선사시대부터 역사시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문화 유적들이 산재되어 있어 많은 사람들로부터 주목을 받는 지역중의 하나이다. 이들 유적은 다른 지방보다 수적인 면에서 월등하게 많은 양을 차지하고 있으며, 전지역에 걸쳐 고르게 분포된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번에 소개하는 세전리 선사시대 집자리 유적도 그 유적들 중에 하나이다. 이 유적은 남원시에서 서남쪽으로 6km쯤 떨어진 곳, 행정구역상으로 남원군 송동면 세전리에 위치하고 있다. 유적이 자리하고 있는 지역일대는 지리산에서 뻗어내린 능선들이 완만하게 흘러내려 형성된 구릉지대로 둘러싸인 넓은 들판을 이루며, 들판의 좌우로 흐르는 섬진강의 상류인 요천과 수지천이 합류되는 천혜의 요지이다.
전남․북의 도계를 형성하는 섬진강변에 자리한 세전리 유적은 1984년 11월20일경 남원 만복사지에 대한 6차 발굴조사를 실시하던 중에 처음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당시에 전북대 국문과 김준영 교수가 세전리에서 다량의 토기편과 기와편등이 출토되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들려주었다. 김준영 교수가 전하는 제보의 내용은 그 해 11월 중순경에 세전리에 거주하는 김상곤씨로부터 농지 정리공사가 한창 진행 중에 있는 공사현장에서 다량의 토기 편과 기와편이 출토되고 있다는 제보를 전해 들었다고 하였다.
이러한 제보에 접한 전북대 만복사지 발굴조사단에서는 곧장 공사현장을 답사하여 공사현장의 곳곳에서 무문토기편과 김해식토기편, 그리고 대형 옹관편등 귀중한 유물을 수습하였다. 또한 포크레인 작업중에 잘려나간 토층벽에서 집자리 벽선으로 추정되는 흔적도 확인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처음에 기와편으로 제보된 유물은 기와편이 아니라 매우 큰 옹형토기편으로 확인되었고 이들 유물의 산포 범위에 의하여, 그 지역이 대단위 집자리 유적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이와 같은 현장답사 결과, 매우 중요한 유적이 있는 이 지역 일대가 농지 정리 사업으로 완전히 파괴될 지경에 처하여 있음을 당시 전북대 송준호 박물관장에게 알리고 발굴 조사의 필요성을 건의하게 되었다. 당시 전북대 박물관에서는 만복사지를 발굴하고 난 다음으로 새로운 발굴조사를 실시 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었으나 발굴조사에 소요되는 경비를 마련할 방법이 전혀 없는 상태였다. 이 같은 사정을 전해들은 당시 전북대 조영빈 총장님이 흔쾌히 발굴비지원을 약속해 주는 덕택으로 발굴조사를 실시할 수 있었다.
발굴조사는 1985년부터 1986년까지 전북대 박물관 주관으로 3차에 걸쳐 실시되었는데, 총 2,000여평에 달하는 유물산포지에 의한 발굴 예정지구 가운데 약 300평 정도가 조사되어, 그 결과 16기의 집자리가 확인되었다.
먼전 세전리 유적에 대한 발굴조사의 개괄적인 설명에 앞서 발굴조사가 이루어지게 된 동기에 대하여 간단히 소개하고자 한다. 유적에 대한 발굴조사가 어떤 동기와 어떠한 계기를 통해 시작되는지, 궁금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은게 현실인 것 같다. 즉 어떻게 알고 발굴을 하게 되었는가? 발굴하는 사람은 땅밑을 무시하는 능력이라도 있는가 하는 궁금증을 풀어주는 속 시원한 해답은 싱거울 정도로 간단하며, 세전리 유적의 발굴 계기를 소개하는 것만으로도 좋은 본보기가 될 것으로 생각한다.
우리나라의 원삼국시대 문화를 연구하는데 대단히 중요한 유적의 하나로 평가 받고 있는 세전리 유적을 탄생시킨 장본인은 어느 누구보다도 결정적인 제보를 해주신 김상곤씨 한 개인이라고 단정지어도 과장된 표현은 아닐 것이다. 선사문화의 연구나 발굴과 무관한 그분은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한 분으로 세전지구 경지정리 사업에 처음부터 참여하면서 우연히 땅 속에서 토기가 출토되는 사실을 이상하게 여기고 전북대학교에서 국문학을 연구하고 계시던 김준영 교수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바로 이 같은 제보가 세전리 유적을 발굴하게 된 동기이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공사중에 이상스런 유물이 출토돼도 별것 아닌 것으로 판단하거나, 때로는 공사지연을 이유로 지나쳐 버리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와 같이 땅속에서 출토된 유물의 정확한 의미를 알지도 모산 상태에서 유물이 없어지고 유적이 파괴된다면, 우리 선조들의 역사를 대변하고 있는 유적에 대한 발굴조사는 상당부분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세전리 유적의 경우도 그분의 제보가 없었다면, 막강한 중장비에 짓밟혀 순식간에 아무런 자취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을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그분의 제보가 왜 가치가 있고 중요한 단서가 되던가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이렇듯 발굴조사의 계기는 발굴단의 계획적인 준비작업의 결과에 의한것도 있으나, 오히려 누군가의 제보에 의해 실시되는 예가 의외로 많다. 조사의 손길이 마치기도 전에 파괴되어지는 유적에 대한 보존대책은 고고학에 종사하는 전문가들의 힘에만 기대하기에는 분명히 한계가 있으며, 지역공동체 성원 모두의 능동적인 지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관심을 토대로 한 제보를 통해서 보다 활성화 될 수 있다.
1985년 2월에 실시된 세전리 1차 발굴조사는 눈으로 덮인 발굴 현장에 돼지머리와 약간의 제물을 차려놓고 조촐한 개토제(고사)를 올리는 의식으로부터 시작하여 한달 보름 정도 계속되었다. 발굴 작업은 넓은 들판에 눈보라가 흩날리는 악천후와 경지 정리 공사로 몸 중심을 잡지 못할 정도로 푹푹 빠지는 수렁으로 변해버린 길도 아닌 길을 오고가야 하는 악조건 속에서 이루어 졌다. 특히 수렁으로 변한 길을 따라 현장을 오가다 보면 특별히 개인에게 지급된 장화가 땅에 늘어 붙어 발만 빠져나오는 경우도 있었다.
1차 조사때에는 아이러니칼하게도 발굴 현장 주변지역에서 새참시간을 이용하여 유물찾는 작업, 즉 유물 수색작업이 발굴 조사와 함께 대규모로 실시되었다. 이러한 촌극은 공사로 인해 이미 유구가 파괴되고 유물만 흩어져 있는 경우가 적지 않았고, 또한 경지정리 대상지역이 저지대인 관계로 지형을 높이기 위해 인근 야산에서 실어다 쌓아둔 흙더미 속에 유물이 있었기 때문에 빚어진 결과이다. 그 결과 불도저 공사로 처참하게 파괴된 집자리에서 부러진 청동검을 양손에 거머쥐고 월척을 낚은 낚시꾼처럼 기뻐하기도 했지만 그 기쁨도 잠시뿐, 곧 허전함이 온몸을 휘감게 된다. 사람이면 누구든지 자신이 소속되어 있는 가문의 족보와 자신을 대변하는 주민등록증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처럼 유물도 그와 유사한 속성을 지니고 있다. 어떤 유물이든 그 물건 자체 못지 않게 무슨 유구에서 어떠한 상태로 출토되었는 가가 매우 중요하다. 즉 유물은 어떤 유적 어떤 유구에서 어떤 상태로 출토되었는가 하는 것이 입증될 때 비로소 진정한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1차 조사에서 발굴예정지구로 고시된 200평 정도에 대한 2차 발굴 조산느 겨울 준비로 바쁜 같은 해 11월 중순 경부터 착수하였다. 초겨울에 발굴조사를 실시한다는 것은 무리가 따르는 일이며, 더구나 정교함을 요구하는 집자리 발굴조사는 더더욱 어려운 강행군이었다. 그리하여 2차 조사때에는 발굴 현장 전지역에 걸쳐 비닐하우스를 짓는 작업부터 시작하였다. 들판 한가운데 우뚝 솟은 비닐하우스는 선조들이 짓고 살았던 집을 복원한 것처럼 볼품은 없었으나 발굴단에게는 아늑한 공간을 제공해 주었다. 1차 조사때와 마찬가지로 2차 조사에서도 많은 유물이 출토되어 장기간 악천후와의 싸움에 지친 발굴단원의 피곤함을 씻어주기에 충분하였다 특히 8호 집자리 바닥면에서는 흙으로 구워 만든 목걸이 1set가 일괄로 출토되어, 그 집자리는 당시 멋의 첨단을 달렸던 미인의 집일 것이라는 추측을 자아내기고 하였다. 발굴 기간 중 폭설로 비닐하우스가 붕괴되는 사람에 여러 날 동안 보수작업을 해야 하는 대 참사가 발생하여 본래 계획보다 발굴기간이 초과하였다. 2차 조사는 폭설과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하여 조사를 계획대로 마무리짓지 못하고 끝나게 되었다.
86년 이른봄에 실시된 3차 조사는 2차 조사에서 마무리짓지 않은 집자리에 대한 정리조사의 성격을 띠고 약 한 달정도 실시되었다.
세전지구 농지 정리 사업이 종결되고 1년이 지난, 즉 3차 조사가 시작될 무렵 세전리에는 일대 혁신적인 변화의 양상이 일어나고 있었다. 즉 마을 앞 들판에 대규모로 비닐하우스 단지가 조성되고, 현재 『세전리 딸기』라는 상표를 붙여 전국에 출하되고 있는 딸기들이 이때부터 재배되기 시작하였다. 그 덕분에 발굴현장으로 가는 길목에도 딸기밭 단지가 조성되어 발굴단원 모두에게는 즉석에서 싱싱한 딸기를 원없이 먹을 수 있는 특전이 주어지기도 하였다. 이러한 마을 사람들의 훈훈한 인심은, 그 마을 역사를 거슬러 올라 원삼국시대 세전리 유적의 주민들로부터 연유된 것이라는 아부성 추측이 만발하기도 하였다.
발굴조사가 종결되자 관련기관에서는 그 유적을 역사적 교육현장으로 보존하는 방안이 여러차례에 걸쳐 논의되었으나, 여건이 허락되지 않아 바로 논으로 개간되었다. 그 결과 현재 발굴에서 조사된 집자리의 흔적, 다시 말해서 유적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어 안타까운 심정이다. 그렇지만 그 유적에서 출토된 다양한 유물과 조사중에 찍어둔 사진들, 그리고 올해 안에 3권으로 발간 예정인『세전리』발굴조사 보고서가 앞으로 언제 어디서든 그 유적을 빛내 줄것으로 기대한다.
세전리 유적 발굴조사가 대단원의 막을 내릴 때까지 남원군 관계 공무원과 마을 사람들의 물심양면의 도움이 있었다. 특히 당사 세전리 새마을 지도자로 계시던 이천석씨의 노고에 대하여 기록하지 않을수 없다. 조사 시작 동시에 발굴단과 인연을 맺은 그분은 3차 발굴조사단이 철수하는 날 까지 하루도 빠지지 않고 작업에 참가하여, 현장의 코메디언으로 때로는 폭군의 모습으로 현장을 누비면서 조사에 많은 기여를 하신 분이다. 박카스를 박케스, 포크레인을 코끼리 땅차로, 빨갛다를 삘하다…등 지쳐있는 조사단원들에게 신선한 웃음을 선사해 주다가도 작업태도가 불량한 사람이 눈에 띠면 즉시 달려가 ‘어디 아파!’하며 호통을 치시던 순간들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발굴하는 사람으로서 가장 보람 있는 순간, 즉 발굴의 꽃이라 하면 역시 유물이 출토되는 순간이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할 것이다. 발굴 중에 유물이 본래 모습대로 출토되는 순간 발굴 현장에는 앗! 하는 소리와 함께 만루 홈런 한방으로 대역전극이 벌어지는 야구장의 떠들썩한 분위기와는 달리 잔잔한 흥미 속의 전율이 흐른다. 이 자릿한 순간 때문에 발굴하는 많은 사람들은 지친 육신에 삽. 호미, 꽃삽, 붓…등을 들고서 그 현장을 누비는 것이란 생각은 혼자만의 느낌은 아닐 것이다. 세전리 유적은 그러한 스릴과 낭만을 충족시키는데 전혀 부족함이 없는 유적중에 하나였다.
세전리 유적 발굴조사에서는 지금까지 조사된 단일 집자리 유적중에서 가장 많은 유물이 출토되어 시종 흥미와 흥분 속에서 작업이 이루어졌을 뿐만 아니라 선조들의 생활상을 재현한 부분도 빼놓을 수 없다. 당국에 허가도 받지 않고 불법으로 토기 굽는 공장을 차려놓고 토기굽는 과정을 재현하였는데, 생대로 토기가 만들어지지 않아서 못생긴 것들을 들고도 무슨 걸작품인양 신기해하기도 하였다. 또한 그 당신 선조들에 숨어있는 고기를 해머로 내리쳐서 물고기를 일시적으로 졸도키는, 극히 원시적인 방법까지 동원되던 일들은 그 발굴 조사에서 잊을 수 없는 것들이다.
그러나 발굴이란 위에서 열거한 흥미 내지는 스릴만점인 일들만 연속되는, 그냥 낭만적이고 화려한 것만은 결코 아니다. 허허 벌판 발굴현장 구석이나 주막집에 쪼그리고 앉아 막걸리 한잔에 지친 육신을 달래는 시간도 많은 부분을 차지하기도 한다. 발굴은 먼저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야 하며, 항상 실패라는 폭탄이 도처에서 기다리고 있어 마치 전쟁터를 방불케 하기도 한다. 또한 발굴 시작과 동시에 철수할 때까지 휴일과 국경일은 자의반 타의반 완전히 무시되고, 쉬는 날이라고는 하늘이 도와서 비나 눈을 내려주는 날 뿐이다. 그리하여 항시 발굴전에 올리는 개토제(고사)를 지낼 때에는 무사고와 자신의 건강을 빌기에 앞서 이번 발굴 중에는 더 많은 비를 내려달라고 기도하는 해프닝이 벌어지고 한다.
마지막으로 세전리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은 발굴작업의 종료와 함께 곧바로 파손된 유물에 대한 복원작업 과정을 거쳐 제2의 탄생을 맞게 된다. 세전리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중에서 갖아 걸작품으로 선정된 유물은 개관된 국립전주 박물관 1층 전시실에, 그 외 일부는 전북대 박물관과 국립중앙박물관에 분산 전시되어 있다.
국립전주박물관에 전시된 유물들은 박물관 관계자들의 완벽한 전시작업을 통해 말끔하게 몸단장을 마치고 항상 여러분들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국립전주박물관 전시실에는 세전리 유적에 대한 소개와 유물 설명이 자세하게 되어 있기 때문에, 본고에서는 그 부분에 대한 설명을 생략하게 된 점을 양해 바란다.
현재 세전리 유적은 발굴조사에서 나타난 성과를 통해 전북지방 아니 우리나라의 원삼국시대를 연구하는데 굵은 획을 그을 만큼 귀중한 유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러한 결과는 발굴에 참가했던 불들의 결과물 뿐만아니라 시간을 다투는 공사중에도 과감히 제보를 해주신 김상곤씨 개인이 끌어낸 성과물로 극찬해도 지나친 과장은 아닐 것이다.
지금 이순간에도 어디선가에서는 타당한 명분을 가지고 땅을 파헤치는 공사가 계속되고 있지만, 그곳이 유적이 없는 지역이라고 어느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일이다. 따라서 그곳에 유적이 없기만을 바랠 뿐이다. 그나마 이러한 바램마저도 거의 현실성이 없는 희망사항에 불과한 것이다.
이제부터라도 우리 모두는 어떤 유적이든간에 그 중요성과는 무관하게 조서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우연한 기회에 한삽의 땅을 파건 그이상의 땅을 파든지 간에 유적이 있다는 가정 하에 자그마한 관심이라도 가져야 할 것이다.
이러한 우리 모두의 눈에 보이지 않는 노력들이 한 곳으로 축적되는 날, 다른 지역의 박물관에 비해 뒤늦게 국립전주박물관이 모든 면에서 다른 박물관을 앞서가는 날이 그리 멀지 않을 것이다. 또 박물관으로 상징될 수 있는 우리지역의 문화와 역사, 그리고 그것들에 비쳐지는 우리의 참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