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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2 | 연재 [문화저널]
겨울여행(2)
박남준․시인(2004-01-29 11:31:43)

여수, 이기차의 종착역, 아직은 먼 여명으로 인해 재 어둠이 가시지 않은 여수는 부스스 기지개를 켜며 날을 맞았다. 이번이 두 번째인가?
그때가 대학4학년 때였으니까 벌써 6년여의 세월이 흘렀다. 여수역을 빠져나와 간밤의 숙취와 출출한 허기를 느끼며 오동도쪽으로 방향을 잡아가는 길목에서 국밥 한그릇을 달게 비우며 식당문을 나서자 거리는 훤한 아침을 맞은 이들의 시작되는 일과로 부산해지고 있었다.
푸르른 남해, 여수항의 크고 작은 고깃배들의 하늘위로 갈매기들의 힘찬 날개짓이 숙취의 머릿속을 상쾌하게 씻겨주고 있었다.
오동도를 향하여 길게 뻗은 방파제는 예전에 비해 시멘트 구조물이 눈에 띄게 늘어난 것 외에 별달리 변한 것은 없었다. 내가 여수에 오자마자 다른 곳을 제쳐주고 곧바로 오동도를 찾게 된 까닭은 별 사연이랄 것은 없지만 첫 여행에의 기억이었다.
그때 오동도의 어귀에는 물질을 하는 해녀들이 있었다. 제주의 바닷가에나 볼 풍경이 내 발걸음을 멈추게 하였고 급기야 나를 안타까움속에 빠뜨렸는데…….
해녀들이 파란 물길속에 자맥질해가며 잡아올리는 것은 주로 멍게가 주종을 이루고 있었다. 문제는 그녀들이 잡아올리는 멍게를 그 자리에 앉아 초장을 찍어 소줏잔을 기울이는 몇 사내들이 내 시야에 들어왔을 때였다. 뱃속에서 어느새 잠잠하던 술벌레들이 그야말로 살기등등하게 요동을 치고 있었다. 주머니 속에는 몇 번을 거듭하여 털털 털어보아도 전주로 돌아 갈 예매 차표밖에 나오는 것은 담배 찌꺼기, 휴지조각, 솜처럼 뭉쳐진 먼지덩어리.
그러나 나의 눈길은 해녀들이 그 맑은 바닷물에 깨끗하게도 씻어 그릇에 담아내는 멍게며 달콤하게도 들이키는 사내들의 소줏잔에서 자석처럼 떼어지지 않았다. 또한 나는 어처구니 없이 한심스러울 정도로 그들의 저만큼 한 켠에 쭈그리고 앉아 부질없는 빈주머니를 확인해가며 연신 군침을 삼키는 것이었다. 그 때였다. “실례합니다” 나는 깜짝놀랐다. 나의 속마음을 누구에게 훤히 들켜 버린 것처럼 금새 얼굴이 화끈거렸다. “예?” 내 또래의 사내였다. “술 좋아하십니까?” 그는 간밤의 기차로 여수에 왔다고 했다.
멍게를 안주 삼아 술을 한잔 하려하는데 혼자 마시기에는 양도 많을뿐더러 궁상맞게 보일 것이라는 감사한 동석 제의를 해왔다.
상큼한 갯내음이 물씬한 멍게가 혀를 감아돌며 감로수처럼 녹아 흘렀다. 아 그때의 그 술맛이란…….
겨울이어서인지 오동도에는 해녀들이 보이지 않았다. 먼 날의 흐뭇한 추억을 떠올리며 섬에 들어서자 내 눈안에 경이로움으로 가득 들어오는 진풍경, 그것은 아름드리 동백이 이 겨울 속에 피워올린 붉은 꽃, 그리고 수줍어 내어민 속살같은 노란 꽃술이었다.
이 겨울 남해의 오동도 동백꽃 피어나요, 봉황도 오동나무도 어부와 이쁜 각시의 슬픈 죽음도 전설로 잊혀진지 차마 오래인데 이 겨울 섬 가득히 붉디 붉은 정열, 동백이 피어요. 눈물의 바다 위 가슴에 피꽃 떨구며 수줍은 촌색시의 동백이 지는 날 어쩌자고 그 붉은 동백보며 내 가슴은 온통 진탕되어가나-시리도록 푸른, 아니 풀길없는 회한의 멍든 자욱 같은 오동도의 바다위로 내 어머니의 눈물처럼 뚝뚝 붉은 동백이 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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