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박학(博學)과 사회개혁론에 정채를 발한 사상
존재의 학문과 사상내용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우선 그가 남긴 저술을 살펴보는 것이 순서겠다. 존재의 저술은 90여권이 넘는다고 하나 정조의 지시로 상당부분이 내각에 들어갔고 또 산일되기도 하여 현재 그 명칭을 알수 있는 것은 56권이고 장흥 위씨의 종가에 현존하는 것은 39권뿐이다. 존재는 특히 경학(經學)과 예(禮)에 밝았다고 하는데, 그 밖에도 천문, 지리, 역사, 정치, 경제, 문학, 의학 등 미치지 않은 분야가 없을 정도로 박학하였다 한다. 그는 비록 궁벽한 시골에 있으면서 관심있는 서적을 다 찾아볼 수 없다고 안타까워하기도 했지만
남다른 노력과 스승 병규의 배려로 그러한 한계를 극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당시 서울 등 중앙의 학자들의 학문적 호기심의 대상이었던 서양과학이나 천주교에 대해서는 ‘그 서적들을 아직 보지 못하였기 때문에 잘 알 수 없다’고 밝혀 자신의 견문이 미치지 못함을 토로 하였다.
대표적인 저작들은 분야별로 나누어 보면 다음과 같다.
*경학 : ≪사서차의(四書箚義)≫,≪고금(古琴)≫,≪경서조대(經書條對)≫
*경세학 : ≪정현신보(政絃新譜)≫,≪봉사(封事)≫,≪만언봉사(萬言封事)≫
*지리학 : ≪환영지(寰瀛誌)≫,≪해도지(海道誌)≫,≪지제지(支提誌)≫
*역사학 : ≪명사평(命史評)≫,≪상론(尙論)≫
*국어학, 문학 : ≪대학언해차의(大學諺解箚義)≫,≪연어(然語)≫,≪덕산행(德山行)≫,≪자회가(自悔歌)≫등 가사와 시조
*기타 : ≪원류(原類)≫,≪격물설(格物說)≫등 사전적 해설의 류서
저술 목록에서만 보더라도 그의 학문적 관심과 업적이 호한함을 알수 있겠는데, 그중에서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정채를 발휘하는 부분은 경세학과 지리학 분야이다.
존재의 학문과 사상의 특성은 무엇일까? 필자는 우선 두가지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는 박학(博學)에로의 지향을 들 수 있겠다.
존재는 기본적으로 유교경전 속에서 진리를 구하고자 했다. 불교나 도교에 대해서 정통유학자의 입장에서 그것들의 비현실성과 기복적인 내세관을 비판하였으며, 당시 유행하였던 풍수설에 대해서도 배척하였다. 한편 스승 병계의 영향을 받은 이유도 있겠지만 성리학 자체에도 거부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끊임없는 논쟁만 일삼는 당시의 성리학적 풍토를 비판하면서 실용적인 여러학문을 다 포용하고자 하였다. 그는 조선에서는 최초의 시계지리서라고 할 수 있는 ≪환영지≫를 지음으로써 세계에 대한 인식의 지평을 넓혔고, ≪명사평≫과 ≪상론≫헤서는 중국사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이해를 제시하였다. 그 밖에 금수, 초목에 대한 박물학적 연구와 군사학에 대해서도 자세한 저술을 남기었다.
그런데 이러한 학문영역의 확대는 그 자체로서 이미 성리학적 학문풍토에서 벗어나려는 의지의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즉 당시 성리학자들이 경멸한 박학적인 학문경향을 오히려 중시하였다는 측면에서 그러한데, 이점은 실학자들에게 공통되는 특색의 하나이기도 하다. 존재 역시 여느 실학자들처럼 성리학과 같은 철학에 한정되지 않고 여러분야에 관심을 가진 백과전서파의 일원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경학에 있어서 존재는 원시유학에 대한 희귀를 지향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그의 고학(古學)적 경향을 성리학적 학문분위기에 대한 회의에서 나왔을 것으로 추측해 볼 수있다.
무엇보다 현실적인 사회모순에 대해 비판의식을 가졌던 그로서는 유교경전을 관념적이고 보편적인 철학서로 보다는 현실적이고 역사적인 경세서(經世書)로 이해하고자 하였던 지향의 발로라고 여겨진다.
둘째로 호남파 실학자로서 존재사상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사회개혁론의 제시에 있다.
그의 경제사상은 ≪정현신보≫≪만언봉사≫≪봉사≫에 집약되어 있다.
≪정현신보≫는 전․후편으로 구성되어있다. 전편은 ‘시폐(時弊)’13조로 구성되어 있는데, 여기에서 그는 당시 사회의 모순과 폐단을 날카롭게 지적하였다. 후편은 전편을 지은지 30여년 후인 65세 때에 저술한 것으로 전편 13조에 19조를 더한 32개 분야에 걸쳐 ‘구폐(舊弊:사회개혁안)’가 제시되어 있다. 이와 함께 존재의 개혁사상은 70세때 정조에게 올린 ≪만언봉사≫에 종합되어 있다. 존재가 고발하고 있는 ‘시폐’는 그가 평생 향촌에서 농민들과 함께 농사를 지으며 피치자로서 겪은 실제체험에서 나온것인 만큼 구체적이고 세밀하다. 또 그가 제시한 개혁안의 내용도 토지제도, 세제, 군역, 공물, 상공업, 지방행정의 개혁안, 관리선발제도, 도량형제도의 개혁과 민생안정론, 향토방위론에 이르기까지 국정의 전반적인 분야에 걸쳐져있다. 이 개혁안들을 보면 경세치용학파로서의 존재의 면모가 약어하다. (상공업분야게 있어서는 부분적으로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어 그가 중상(重商)학파는 아니고 중농주의(重農主義)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지방행정과 향토방위체제, 교육개혁방안 등은 그 자체로 하나의 체계를 형성하고 있으며, 자신의 직접적인 체험과 실천적인 활동에서 나온 개혁안답게 정체를 발하고 있다.
특히 오늘날 우리의 상황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점은 지식인의 역할에 관한 그의 인식과 교육제도의 개혁안이다. 그는 당시 사회가 문란하고 피폐해진 원인은 국가의 원기가 되어야 할 지식인(士)이 타성에 빠져 나라를 다스리는 방략을 구명하지 못하고 교화를 해야하는 본분을 망각한 채 안일과 사사로운 욕심에만 몰두함으로써 오히려 국가피폐의 핵심요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선도적 역할을 해야할 지식인이 타락하여 그 기능이 마비된 상황하에서 백성들의 마음이 안정되지 못하고 상하관리들이 사리를 도모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대책으로서 그는 근본적인 방안을 교육의 개혁에서 찾았다.
우선 당시의 학교교육이 과거시험 중심의 교육으로 인해 황폐화한 실태를 비판하면서 덕성함양을 위주로한 교육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 교육기회의 불평등을 지적하면서 상인이나 서리들의 자제도 양반자제와 같이 교육시켜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흥미있는 것은 그가 학교운영의 부패상을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학교와 교수의 정당한 권위를 지키기 위해 교수를 투표로서 선출할 것을 제안한 점이다.
나아가 그는 관으로부터 학교의 자율성을 확보해야 할 뿐만 아니라 학교가 향촌사회의 중심이 되어야 하고 오히려 말단 행정관리( )를 규찰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왜냐하면 학교의 교수는 민의(民意)의 중립적 대변자이므로 그러한 역할을 맡는 것이 타당하다고 보았던 것이다. 심지어 그는 소규모 향촌의 장(面長)은 그 지역의 훈장이 겸임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상과 같은 존재의 개혁안은 교육과 행정의 결합을 시도하는 등 이상주의적인 덕치주의(德治主義)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그 실현성에 의문의 여지도 없지 않다. 이점 그의 한계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교육의 상대적 우위를 강조함으로써 자신과 같은 재야지식인들의 참여기회를 보장받으려는 뜻도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개혁안은 구체적인 상황속에서 절실한 체험을 바탕으로 나온 것이고 자신이 실험해 본 것이므로 타당성여부를 쉽게 과소평가할 수 없다. 또 오늘날의 상황과 관련해 볼 때 아주 흥미있으며 시사하는 바도 적지 않다.
4. 존재사상의 의의
19세기 전반기의 대유학자인 매산(梅山) 홍직필(洪直必)은 위백규의 학문과 사상을 평하기를 ‘호남의 학문이 하서(河西 金麟厚), 고봉(高峰 奇大升)을 거쳐 손재(遜齋 朴光一), 목산(木山 李基慶) 공에 이르고 있다“라고 하였다. 그는 존재를 높이 평가하면서 그의 ’세상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재주와 실용적인 학문‘이 쓰이지 못했음을 애석해하였다.
존재의 사상은 당시 영․정조에 활발하였던 다른 실학파들과의 교류나 영향받은 바 없이 남도의 한 끄트머리에서 혼자 이룩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개혁사상은 명백히 경세치용적인 성격을 띠고 있지만 성호 이익을 중심으로 한 근기지방 실학파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있었다. 단지 존재는 현실에 대한 인식과 개혁론 등에서 볼 때 율곡 이이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정현신보≫를 비롯한 저술 곳곳에서 율곡을 인용하고 있으며, 그가 만년에 정조에게 올린 ≪만언봉사≫도 율곡이 선조에게 올린 그것에서 본 딴 것이었다. 또 그는 부안에 와서 20여년간 살면서 호남 실학을 개창한 반계 유형원의 영향을 받고 있다.
반계의 사상은 그의 사후 두 갈래로 계승되었다고 볼 수 있겠는데, 그 하나는 근기(近畿)지방의 일군의 실학자들이고, 다른 하나는 호남파 실학자들이다. 그 중에서도 존재가 반계의 경세치용적인 개혁사상을 이어 받고 있다. 그는 근기지방의 실학자들과 일체 교류한 일이 없으면서 반계와 비슷한 상황과 현실체험 속에서 독자적인 경세론을 제시하였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호남실학자들이 백과전서적인 박학성을 과시했던 반면 사회개혁에 대한 적극적인 개혁안 제시나 의지는 부족하였는데 비해, 존재의 경우에는 사회개혁에 대한 강한 실천의지와 구체적인 개혁안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이점에서 그의 사상은 한국실학사상 경세치용학파의 또 다른 하나의 갈래로서 자리매김 되어야 할 것이다.
존재의 학문과 사상의 성격을 보면 기존의 전통적 질서나 체제를 크게 변동시키지 않고 고쳐나가는 입장 내지는 그 운영의 개선을 통해 현실에 대응해 보려고 하는 다분히 ‘온건개량적’인 성격을 드러내고 있다. 존재사상의 기본틀이나 윤리관, 경제관 등은 전통적인 유학자들과 다를 바가 거의 없다. 가치관이나 행동양식에 있어서 조선전기 개혁적 사상가들의 그것을 계승하고자 하는 회고적인 지향이 없지 않았다. 서학(西學)에 대한 인식의 폭의 제한, 도교나 불교에 유학자의 입장에서 강하게 비판하고 있는 점에서도 그러한 면모를 엿볼 수 있다. 〈만언봉사〉에 요약되어 있는 그의 개혁사상의 목표를 한마디로 말하면 왕도(王道)정치의 구현과 국부민안(國富民安)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향촌사회에 대한 존재의 현실적인 비판의식과 그러한 현실적 모순에 대해 나름대로의 구체적인 개혁안을 제시하고 몸소 실천한 점은 그의 독특한 면모라고 할 수 있겠다. 동시에 그의 개혁안의 바탕에서 당시사회와 농촌, 특히 농민에 대한 짙은 애정은 느낄 수 있으며 강렬한 민중지향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이상적인 개혁사상과 현실의 괴리 사이의 마찰을 가능한대로 줄여보고자 하는 의도로 개혁사상이 현실지향적이 되고 온건화되는 것 자체를 ‘개량’ 혹은 ‘개선’이라고 하여 저급하게 평가하는 것은 올바른 태도가 아니라고 생각된다. 사상이라고 하는 것이 현실사회의 모순을 해결하고자 하는 지적 고뇌의 산물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당대에 수용되어 실현 될 가능성이 중요시되어야 한다. ‘변혁’, ‘개혁’, ‘개선’, ‘개량’이라는 개념은 일정한 방향성을 설정한 뒤에는 그 역동성을 비교하는 상대적인 개념에 불과할 수 있다. 보다 핵심적인 문제는 그 사상이 얼마나 확산되었고, 그 개혁의지가 실질적으로 구현되었는가에 달려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지 않으면 존재의 사상은 별로 논의할 가치가 없을지도 모른다. 아니 역사상의 수많은 학자와 사상가들의 고뇌가 너무 단순히 매도당할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존재의 행적을 통해 볼 때, 그는 조선후기 향촌사회의 변동은 주도하였던 이른바 ‘농촌지식인’의 전형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중간계층으로서 양반중심의 현실사회에 대한 견제와 민중옹호라는 기능을 수행하였으며, 다양화해 가는 당시의 신분, 계층구조 속에서 새로운 사회형성의 주역이 될 수 있었던 세력이었던 것이다. 그러한 역사적인 측면이나 의의는 차치해두고라도, 존재는 지식인이 자기가 살고 있는 사회에 대해 가져야 할 기본적인 성실성을 뚜렷이 보여준 인물로서 오늘날 재조명되어야 할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