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중 전주에서 공연된 몇 편의 연극은 평소에 가졌던 연극에 대한 개인적 단상을 정리할 수 있는 계기를 주었다. 그야말로 개인적인 것이야말로 표현하기엔 다소 산만하고 너줄한 면이 없지 않지만 요약하면 공연예술이자 현장예술인 연극이 갖는 독특한 감동과 그 감동의 교감에 관한 것들이었다. 이것은 어떤 기발한 발견이 아닌 누구나 알만한 교과서적 문제지만 실제 공연에 맞닿뜨렸을 때 ‘실감나게’ 느꼈다는 점에서는 상당한 학습이 된 셈이었다.
지난 1월 25일부터 27일까지 전북예술회관에서는 극단「황토」의 제58회 정기공연이자 창단 9주년 기념공연으로 샘 세퍼드 작, 박병도 연출의 「매장된 아이(Buried Child)」가 올려졌고 2월 2일부터 25일까지는 최인석 작, 유장영 작창, 곽병창 연출의 창작극회 67회 정기공연 「방디기 뎐」이 창작소극장에서 공연되었다. 새해들어 기획 든 이 두 극단의 야심찬 작품들은 번역극과 창작극, 대극장과 소극장 무대라는 것 이외에도 상당한 부분에서 대조적인 양상을 띠어 보기에도 흥미로 왔다.
「매장된 아이」는 1978년 처음 발표되고 이듬해 퓰리쳐 상을 받았으며 70년대 미국의 대표적 희곡으로 평가받는 사회비판적 부조리극이다. 미국의 한 가정에서 일어난 근친상간의 불륜과 이 불륜의 씨앗인 아이의 비극적인 살해, 유기를 통해 현대인의 자기상실과 현실도피, 마모되어가는 인간성을 통렬히 풍자하는 작품으로 월남전 이후 도피적 성향의 미국사회를 날카롭게 조명하고 있다고 평가받고 있다.
이 작품의 대략의 줄거리는 이렇다.
농장을 경영하여 안락한 생활을 하는 「다지」와 「헤일리」의 가정은 「헤일리」와 맏아들 「틸덴」사이의 근친상간으로 태어난 아이로 인해 비극적 운명을 맞는다. 「다지」는 아이를 뒤뜰에 암매장하고 가족 모두는 이를 비밀로 하지만 이로 인해 집안은 어둡고 암울한 분위기에 휩싸인다. 위스키와 진통제로 살아가는 「다지」앞에 어느날 손자 「빈스」가 그의 여자 친구와 함께 나타나면서 극은 본격화되고 세퍼드 특유의 부조리적 전개가 계속된다. 결국 가정의 비밀은 서서히 베일을 벗게 되고 「다지」는「빈스」에게 유산으로 남긴 채 숨을 거둔다.
이 극은 상당부분의 해석상으로 모호함을 남기는 상징으로 감싸여져 있어 논란의 여지가 많지만 미국 가정의 붕괴와 미국사회의 정신적 동공화를 표현했다는 점에서는 의심이 여지가 없다.
「황토」는 이 작품을 거의 완벽하게 표현해냈다. 부분적으로 작품 전체의 분위기를 약화시켜놓은 배우들의 ‘개그’식 톤과 과정된 연기가 눈에 거슬리긴 했지만 전통적으로 탄탄하고 기복없는 연기에다 대극장을 압도하는 무대장치, 전편에 걸쳐 흐르는 배경음악, 고전적 우수에 흠뻑 빠지게 하는 조명은 흠잡을 곳 없이 빈틈없는 앙상블을 이루어 냈다.
하지만 이 작품을 대하면서 큰 감동-물론 개인적인 느낌일지 몰라도, 또한 작품이 공허함을 요구하고 있을지라도 그 공허함까지 함축하고 있는 예술적 감동-을 느끼지 못하고 한폭의 잘 그려진 서양의 풍경화를 대한 듯한 느낌을 받은 것은 일반적 수입된 번역극의 국내공연에서 야기되는 전통적인 업보로 밖에 분류할 수 없었다.
무대 외적인 문제로, 연극예술이 조금 거창하게 말해서 국경을 초월, 인간 공통의 심성의 핵 근접에서 서로 만나 그 핵을 건드림으로서 민족과 언어를 떠난 예술적 울림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지만 ‘미국의 썩어가는 꿈의 시체’로서의 죽어간 아이가, 혹은 ‘월남전 이후 미국사회의 심리적 병폐’가 이따끔 길거리에서 지나치는 미국인을 쳐다본 일밖에 없는 우리네에게까지 비극으로 통용되지 않을거라면 조금 근접한 설명이 될지 모르겠다.
어쩌면 우리는 한 가정의 불륜과 매장된 아이보다 더욱 충격적이고 비극적인 ‘매장된 아이들’을 사회환경으로 갖고 살고 있지는 않은가? 한마디로 이 극이 그 자체의 예술성으로 우리에게 던지는 풍자의 여파는 너무 멀고 우회적이어서 미미하다는 생각이며 아직 미국의 부조리극을 고전처럼 감상하기엔 우리 앞에 극적 해부를 기다리는 우리들의 앙금이 과제로 쌓여 있다는 중압감은 모처럼 잘 다듬어진 연극을 감상하는데 장애요인으로 작용해 따분함을 불러 일으켰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해봤다.
창작극회의 「방디기 뎐」은 공업화와 수입개방으로 인한 농촌의 전반적인 황폐화가 진행되는 70년대 이후의 이 농민의 전형을 판소리 가락에 담아놓은 작품이다.
‘방디기’의 「친구」를 등장시켜 농촌에서 도시의 산동네로 흘러들어 떠돌이 날품팔이로 갖은 천대와 구조적 억압 속 연명해 나가다 길거리서 딸아이의 운명을 지켜보기도 하고 단칸 월세방이 철거되기도 하는 쓰라림 속에 결국 철장 속에서 신새벽을 꿈꾸는 ‘방디기’의 인생유전을 이야기로, 노래로 전달하는 형식을 취한 이 작품은 金芳玉씨가 거론한 바 있는 ‘한국식 모노드라마’의 전형적 공연 형태에서 사실은 크게 벗어나고 있지 않다.
등장인물이 둘이라는 점에서도 기존의 「약장수」나「장날」의 형식과 같아 그다지 새로운 맛을 주지 못한다. 그러나 새롭지 않은 맛과 어설프기까지 한 극 구성이 의외의 감동을 수반하며 가슴에 밀착되을 수 있는 것은 연극이다 아니다를 떠나서 그 이야기가 바로 우리들을 말하고 있다라는 지극히 현실적인 감정에 호소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해 세련된 극 형식을 취하고 있진 않지만 편안하게 접근해 온다는 점이 강점으로 부각되는 작품이다. 여기에 무엇보다 큰 힘을 부여한 것은 유장영씨의 노래다. 그의 정확한 극 석에 기반을 둔 작창은 연출 곽병창씨와 긴밀한 조화를 통해 연극의 새로운 가능성의 세계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공연이 계속되면서 점차 늘어난 관객과의 대화장면은 부분적으로 ‘방디기 친구’로서의 배우가 배우 자신의 벗어버린 모습을 문득 문득 드러냄으로써 최소한의 연극적 약속을 깨고 오히려 자연스러운 관극을 방해하는 요소로 작용했다.
그런 모습이 ‘관객 참여 유도’ 라면 지나치게 작위적인 모습으로 비춰질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국악이 갖는 울림과 신명이 연극적 기교와 잘 어우려져 한판 넉넉한 감동을 불러일으킨 작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