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산 저 산 꽃이 피니
분명코 봄이로구나
봄은 찾아 왔건만은
세상사 쓸쓸하더라
나도 어젠 청춘일런디
오날 백발이 한심하더라
내 청춘도 날 버리고
속절없이 가버렸으니
왔다 갈줄 아는 봄을
반겨 헌들 쓸데 있나
봄아, 왔다가 가려거든 가거라
네가 가도 여름이 오면
녹음방초 성화시라......
작년 어느 무덥던 날 우연찮게 배웠던 단가의 첫소절이다. 평소에 쉽게 접할 수 없었던 분야인지라 당시에도 상당히 부푼가슴으로 배웠던 것 같다. 길다면 길 우리네 인생살이에서 하고 싶은 것을 다 할 수있을지는 몰라도 다 잘하기는 어려울 것 같아 판소리를 듣는 것으로 만족했다면 분명코 변명이리라. 평소부터 전통적인 부분에 관심을 쏠리던 차에 명창의 판소리를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광고를 보고 약간 무리를(?) 해서 참가했다. 작년의 우연한 판소리 귀동냥을 쉽게 잊지 못했던 때문이었다.
명창과의 만남은 담양의 박동실 선생의 초당에서 이루어졌다. 박동실 선생은 그곳 유지의 도움으로 초당에 기거하면서 그곳뿐만 아니라 전국 각지로부터 온 많은 사람들을 가르쳤다고 한다. 전주에서 출발하면서부터 계속 방영되어진 “판소리 기행, 동편제․서편제”를 통해서 어느정도 감을 잡을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신 주최측의 배려에도 불구하고 굳이 동편제와 서편제로 나눈 이유와 또한 인명의 계보, 즉 누가 누구의 제자이고, 누구는 스승의 기법을 그대로 물려받았다느니 하는 것들에 큰 의미를 두어야만 하는 것인지 의구심이 생겼다. 실지로 그러한 사실을 기초적으로 알고 넘어가는 것은 바람직한 일일 것이나 그것이 주가 되어 버린다면 옳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까닭이다. 머릿속에 가득찬 이런 생각이 초당을 보는 순간 잠깐 잊혀지고, 내려앉은 구들장과 흐트러진 기왓장, 언젯적 것인지 모를 색바랜 달려과 모양없는 형광등에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성창순 선생님은 이곳의 그 옛날의 명성을 그리워 하시며 무척 안타까워 하시는 듯한 표정이셨다.
구슬픈 한의 소리가 우리가 볼 수 없는 그 어떤 곳에서 터져 나올 때, 또 그것을 느낄 수 있을 때, 우리는 가슴속 깊이 찡하게 울리는 감동을 만날 수 있다. 더욱이 우리에게 한이란 것은 민족적인 유전이 아닐까. 혹 심한 반박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한은 우리민족의 맥 속에 영원히 흐르고 있는 유전이라는 인식을 나는 갖고 있다.
애초에 상상했던 것보다도 더 근사한 성 선생님의 판소리를 보성에서 들었다. 문학기행 참가지 뿐만이 아니라 판소리를 아끼는 그 곳의 어르신네와 그 곳의 학생들까지 모인 뜻깊은 자리가 만들어진 것이다.
한복이 아닌 양장차림으로 소리를 하실 수 없다고 몹시 당혹스러워 하시는 선생님의 모습은 아직도 소녀같은 부끄러움을 잃지 않고 계시는 모습이셨다. 사실 어떤 판소리가 세련된 것이고, 명창의 소리고, 또 어려운 기법이고….이런 것들은 잘 모른다. 단지, 무식한 이의 변명일지는 몰라도, 가슴으로 느끼고 또 마음으로 아픔을 느낄 뿐이다. 묵을 장소에서의 자유로운 이야기를 시간은 모든 사람들이 마음을 열고 자유스럽게 대화를 한 것같다. 아마도 판소리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공통된 공유의식이 그런 친근감을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 기억에 남는 과거의 이야기를 웃음까지 터뜨리시며 하나 하나 기억해 내셨던 선생님의 판소리를 몇 번 더 듣고 그 자리를 마감했는데, 평생에 그렇게 귀한 자리가 몇 번이나 더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좋은 자리였다.
보성공원의 박유전 선생님 기념비까지 아침산책을 한 후, 여러분들의 도움말을 들으면서, 일 순 든 생각이 과거에는 그토록 천대받고 업수임을 당하던 판소리가 이제는 어엿한 한 예술의 장르로까지 인식되고, 문화재로 보존되고 하는 것은 어떤 이유일까 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아마도 국민들이 예술에 대한 소양이 과거보다 세련되어 진 것과, 신분계급이 소멸되어 진것과, 특히 물밀 듯이 들어오는 서양의 하이테크 물질문명이 쉽사리 친근감을 주지 못하는 데서 오는 과거 전통에로의 향수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리고 여러분들의 설명을 들으면서 차츰 정리되어지는 것이, 동편제와 서편제로 굳이 구분하는 것이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특히나 속 깊은 이유가 혹시 아직도 학문적으로 체계가 세워지지 못한 분야이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체계를 갖추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권진 선생, 정응민 선생의 생가는 회천이다. 그들은 부자지간이었고, 둘 다 판소리의 명창들이었다고 한다. 당시 정권진은 자신의 아들이 판소리를 배운다는 것에 대해 별로 탐탁치않게 생각하여 반대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정응민이 하고자하는 의욕이 너무나 강하여 할 수 없이 승낙하였다고 하는데 그의 아들 정회천 선생님이 여러 가지 부가적인 설명을 너무나 많이 해 주셨고 또 성창순 선생님이 바로 그분들의 제자이신지라 아마도 우리가 들었던 선생님의 판소리는 그분들의 특성이 제일 많이 남아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다음, 신문을 통해서 언젠가 한번 본 기억이 있는 임방울 선생님의 기념비를 나주 송정리에서 보았다.
그 당시 가장 사랑받는 ‘가수’가 바로 선생님이셨다는데, 특히나 대원군으로부터는 선물 및 극진한 대우까지 받았을 정도로 소리가 탁월했었음에도…. 현재 임방울 선생의 흔적을 알릴 수 있는 그의 제자가 하나도 없는 탓인지 그의 소리는 이어지거나 그리 불리워지지 못하고 있다. 당시 임방울 선생은 주로 많은 공연에 힘썼기 때문에 제자양성을 할 여유가 없었을 것이라는 추정은 하지만, 생전에는 별로 인기있는 예술인이 아니었으나 현재는 그의 제자들이 활동을 잘하여 그 명성을 날리고 있는 박유전 선생과 비교해 볼 때 생각해 봄직한 부분이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간 곳은 고창 모양성 앞에 있는 신재효선생의 생가였다. 부유한 중인이었던 그가 사재를 털어가면서 판소리에 쏟아 부었던 열정들이 현재는 비판과 칭찬, 양면다의 다각적인 평가로서 이루어지고 있는 모양이다. 시대가 흐러면서 역사가 재평가되고 가치판단 기준이 달라지는 것은 아마도 그 나름대로 그럴만한 설득력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나 판소리 역시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이 과연 근본적으로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 접근되는 것인지, 결국 우리 인간에게 어떤 도움이 될 수 있는지에 관한 것이리라. 전통이라는 것을 그냥 알고 말자는 것인지, 거기에서 현재와의 어떤 연계성을 찾아내 새로운 의미로 다가가야 하는 것인지, 깊이 숙고해야 하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냥 지나치기는 쉬운 이런 문제를 우리가 좀 더 나은 전통의 모습으로 실현시키는 것이 설득력 있고 타당한 의무 및 책임이 아닌가 한다. 이번 기행은 그런 면에서 볼 때, 다시 한번 전통에 대한 사고를 재정립시켜 주었고 또 판소리의 모습에 다가가는데 큰 도움을 준 것같다.
끝으로 문화저널 주최측에 부탁하고 싶은 것은 어려운 일인 줄은 알지만 이런 뜻깊은 좋은 자리를 많은 사람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단없는 문을 만들어 달라는 것이다. 형편없는 글이로나마 기행의 좋았던 기억들을 잠시 들추어보았는데, 욕심이라면 앞으로도 자주 이런 기회를 놓치지 않고 참가해 보고 싶다. 문화저널의 더 큰 발전과 끊임없는 열정이 모아지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