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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2 | 연재 [문화저널]
올바른 예술적 전유에 대한 한 문예운동가의 단상(2)갈등의 냄새
김원호「전북노동자문화예술운동연합」의장(2004-01-29 11:42:19)

갈등이 제대로 느껴지지 않는다. 발전한 자본주의 모순투성이 남한 사회 속에서 독점자본과 필연적으로 갈등관계이나 그를 해결하는데 진보적일 수 밖에 없는 민중의 갈등표현은 심히 고차원적으로 갈등아닌양 매도되고 있다. 어불성설이겠지만 역사-사회성을 굳이 분리시켜서 생각하더라도 인간관계, 심지어 삶의 행동까지에도 갈등이 원천봉쇄되고 있다. 더구나 대중조작된 문화적 풍토는 불감증 그 자체이며 이는 너무나도 당연히 사회적 갈등을 희석화시켜내는 지대한 첨병역할을 해내고 있다. 그 복잡함과 다양함이 최고수준인 포스트모던한 시대에 우리는 지금 무서운 불감증에 중증으로 빠져 있는 것이다. 스탈린이 그 풍부함을 한 수 배워갈 정도의 남한 신식국독자적 문화적 ‘무갈등’의 시대가 현상되고 있다.

한창 인기를 누리는 『열혈남아』(원제 ; 몽콕하문)와 『아비정전』이라는 홍콩영화가 있다. 영화를 좋아하는 올드팬들의 뇌리 속에 남아있는 「게리 쿠퍼」나 「그레이스 켈리」등은 ‘점잖은 자본’같은 우상들이지만, 언젠가부터 그 신드롬이 조용필 이상이 되어버린 ‘폭력적인 독점자본’이 주는 소외의 우상인 홍콩배우 유덕화, 장국영, 장학우, 장만옥 등의 등장하는 「홍콩느와르」의 대표적인 영화이다. 아직도 헐리우드 영화사상 최고의 로맨스 영화로 평가받는 『카사블랑카』 에 등장하는 「험프리 보가트」의 다소 낭만적인 니힐의 어두움은 그래도 따뜻한 인간의 냄새라도 풍기지만 「홍콩느와르」의 장국영과 유덕화는 폭력과 깜깜절벽 그 자체의 허무로서만 존재한다. 원인과 과정의 소중함은 없이 “다음 일은 생각조차도 안하”는, 그 출구조차도 보이지 않는 소외의 결과만 동물적 감각수준으로 드러내 보인다. 소재자체가 뒷골목 룸펜의 기생적인 한탕주의의 주먹이며, 그들의 사회적 인간관계의 최고선은 모태회귀의 자본적 변종인 무지스러운 ‘의리’이며, 그네들의 희망은 따라서 전혀 없다. 2001년에 중국으로 반환되는, 독점자체이자 그 예민한 치부인 홍콩의 불안한 사회 심리를 반영해낸 다소 리얼한 영화인 이 『몽콕하문』과 『아비정전』이 만들어내는 갈등의 수준은 그러나 현실을 정면으로 다루어내지 못하는, 창백한 형광블루의 포스트모던일 뿐이다. 그런데 마지막 비상구조차도 없는, 총격사망당할 수 밖에 없는 신종 데까당스의 우상들이 만들어내는 갈등의 그 천박한 수준이 지금 남한 신식국독자 대중에게 열광적으로 감정이입되고 있다. 일견 자의적으로, 또 물론 그 풍토는 대중조작으로 기막히게 조성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의 대중은 유덕화적 모태회귀의 의리적 갈등, 「드라마게임」의 아무것도 아닌 번잡한 일상적 애증과 애욕의 갈등, 유니섹스한 발라드가요적 애상의 갈등, 폭력과 포르노를 경원하면서도 은근히 즐기는 변태적 갈등 때문에 자본주의를 반(反)하면서도 점차 그 자체를 즐길 수 밖에 없는 소시민적 백치가 되어가고 있다. 목하 진정한 사회적 갈등의 냄새가 점차 거세화되어나가고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적 소외의 객관적인 본질 중 하나는 그것의 사회적인 외형이, 그 바탕에 깔려 있는 사회적 적대 및 대립물의 투쟁을 숨기고 또 호도한다. 그 속에서 인물 그리고 사물은 내적 관련이 없이, 단순히 “낯설고 하릴없는 것, 단순히 다양한 것, 서로 대립이 없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갈등내용의 현실성 없음, 예술의 사회적 기능마비, 개인적 파편화의 데까당스적 오만방자한 예술 작품들에서는 인물, 주관적 체험, 분위기 등이 대개는 해결될 수 없는 단순한 대립으로 표현되며, 모순의 처리와 대립의 계기로서의 투쟁, 사회-인간적 운동은 물론 개인적 인격발전의 원천으로서의 갈등이 더 이상 생겨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갈등수준을 형상적 감동으로 역사-사회적으로 진보시켜야 할, 대중의 인식과 가치평가를 예술을 통해 진보시켜야 할 남한의 문예운동적 갈등형상화 수준은 어떠한가? 불행히도 과학기술과 포스트모던 시대의 우리의 문예운동진영은 아직 누추한 갈등의 냄새만 풍길 뿐이다.

그 누추함의 하나는, 남한적으로 독특한, 딸깍발이와 모리배수준 사이를 왔다갔다 하는 소시민적 모더니즘의 잔존풍토와, 비판적 수준의 현실안목정도가 기묘하게 결합된 지식인적 문예풍토이다. 이는 갈등의 정체불명이라는 야릇한 보호색을 만들어주어 기본적으로 가치중립일 수가 없는 현실을 슬며시 비껴다니며 양심어루만지기를 하게끔 하고 있다. 이들이 만들어내는 살등형상화 수준은 자위적 설움과 책임지지 못하는 꿈의 수준이라, 깊은 절망의 아픔과 그것이 필연적으로 만들어주는 미래사회에 대한 낙관의 역사-사회적 현실고통을 감당하지 못하는 무게를 가지고 있다. 개인적으로 고창하는 수준의 ‘예술성’을 소리내어 부르짖지만 사실은 빈약한 내용을 화장하는 수준정도이다. 그러나 빈약한 갈등일망정 그를 집요하게 형상화시켜내는 영역대화와 나름의 치밀한 방식은 배울 바가 의외로 있다.
그보다 더 악독한 누추함은 아나키스트적이거나, 근본적으로 무지한 갈등수준밖에 없는 남한적인민주의자들이 보여준다. 이 전통은 꽤나 오래되었는데 인류의 진보적 문화유산을 부정하는 속류사회학주의와 스탈린의 무갈등론에 그 뿌리를 대고 있다.
속류사회학주의가 탄생시킨 세계관과 예술방법의 이분법 시각은 현실주의의 역사적 발전과정에 의해 극복되었지만, 이념만 있으면 된다는 예술도구주의의 편향속에 아직도 뿌리깊게 남아 잇다.
무갈등론의 남한적 편향은 현실인지능력이 척박한 소영웅적 풍토 속에, 대중의 역동적인 근봄힘을 모르는, 대중추수주의를 왓다갔다하는 써클적 사고방식 속에 여러 가지 변종으로 잔존해 있다. 아다시피 스탈린적 편향은 사회주의를 하나의 독립된 사회 구성체로 이해하여 계급투쟁의 소멸선언, 즉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폐기하면서 출발된다. 그러나 사회주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다름아닌데, 현실이 엄연히 프롤레타리아 독재인데 관념상으로 그것을 부정함으로써 현존하는 사회주의에서 불가피하게 존재하는 계급투쟁은 왜곡된 형태로 처리되게 되었다. 즉 프롤레타리아 권력은 재판과 숙청이라는 억압적 방법에 의해서 유지되게 되며 그 과정에서 당은 철저히 관료화, 경직화 되어 나갔다. 이러한 왜곡의 표현대로 개인숭배가 나타나며 이는 재차 당의 무오류 신화를 강화화는 결과를 가져왔고, 문예는 과학적 사회주의와 현실운동의 ‘예술적’ 융합이기를 그만두고 ‘추상적’ 진리의 예증으로, 도상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또한 실질적 계급투쟁이 테러적으로 왜곡, 대행되는 분위기는 사회주의 선설의 현실적 갈등에 대한 적극적인 탐구를 가로 막으면서 현실에 대한 낙관적인 태도를 갈등 자체의 해결이라는 환상과 동일시하도록 작용하였다. 이에 따라 결국 사회주의 문예는 현실주의 문예가 아니라 낭만주의 문예로 전락하게 되었다. 이상과 같은 스탈린적 편향의 문예적 관철에 대하여 루카치는 사회주의적 ‘자연주의’와 혁명적 ‘낭만주의’의 결합이라고 비판한 것이다.
그러나 남한변혁운동의 정착과 더불어 이제 문예운동진영은 노급문예를 중심으로 현실주의의 출발수준을 획득하였고 이는 우리에게 올바른 역사-사회적인 깊은 갈등의 냄새를 맡게 해주어 역동적 개체로 성숙하는 즐거움을 선사해줄 것이다.

예술적 갈등이란 한 예술작품속에 형상화된 삶의 진행 속에서 운동 및 발전의 원천으로서 대립물의 투쟁이 생겨나고, 발전하고, 첨예화되고 또 처리되는 것을 의미한다. 예술적 갈등을 통해서 일정한 성격, 인물, 태도방식, 삶과의 연관 등 속에 놓여있는 인간적 가능성 - 좋은 쪽으로건 나쁜 쪽으로건 - 이 드러나는 것이다. 그것은 예술작품을 통해 제공되는, 그리고 미적인 즐김의 본질적인 요소인 그 ‘정신적 긴장’의 주요원천중 하나이다.
세계예술의 주요작품에서 보이는 갈등형상화는 항상 인간적 갈등의 정신적 처리이며, 인간 자신의 사회적 행위 및 자기자신에 대한 인간지배의 사회적 발전의 본질적인 동력의 작용을 밝혀내고 또 정신적으로 그것에 영향을 끼치는 것을 지향하고 있다. 신화적 이거나 종교적 허구인 지배세력과의 연관으로부터 역사의 발전과정과 더불어 일정한 역사적 토대 위에서의 사회적 발전과정의 실질적인 동력에 연관되어 심화 되어 온 것이다. 따라서 현실주의에서의 갈등은 인간-인격의 토대를 상통하는 그런 모순의 처리가 관건이며, 사회적 진보의 역사-합법칙적인 주요 동력에 대한 연관이 서술된 갈등의 처리를 본질적인 내용으로 하고 있다.
인류가 만들어낸 고전 속에서의 갈등은, 소포클레스의 『외디푸스왕』, 아리스토파네스의 『뤼시스트라타』, 세익스피어의 『한여름밤의 꿈』같은 가벼운 모순처리의 필요필연성부터 브뤼겔과 꾸르베의 그림, 레싱과 라쌀레, 체르니세프스키의 문학, 심지어 왕당파인 발자크까지, 르네상스적, 계몽주의적, 비판적 현실주의의 발전과정과 더불어 진보적으로 심화되어 왔다. 그리고 자본주의, 제국주의, 파시즘에 맞서 삶의 전영역에서 수행되는 혁명적인 계급투쟁, 그와 연관한 인간의 태도방식, 자세, 자기유지 및 결의가 정치적, 사회적, 도덕적, 미적인 평가의 결정적인 잣대로 되게끔한 고전들, 예를 들어 숄로호프의 『고요한 돈강』, 베허의 『작별』, 브레히트의 『갈릴레오의 생애』, 쇼스타코비치의 『레닌그라드 교향곡』등이 쏟아져 나오면서 역사적 유물론의 견해를 토대로 구체적 역사-사회적 조건의 인격적 모순을 예술적 갈등형상화로 파악하는 틀이 갖춰졌다. 곧 당파적 현실주의이다.
전태일 이후의 남한 문예운동은 이러한 현실주의 획득과 좌충우돌의 역사였으며 그 과정중에서 진통스럽게 현실주의의 고전들을 만들어 가고 있다. 김수영, 신동엽부터 남한의 현실적 갈등의 수준은 객관화되기 시작하여 신경림의 『농무』, 박노해의 『노동의 새벽』문승현의 노래 「그날이 오면」, 김정환의 『사랑, 피터』, 신학철의 그림 「신식국독자」등이 우리에게 성숙의 긴장을 훈련시켜 주고 있다. 이러한 구축의 과정의 목표는 물론 당파적 현실주의의 성취이며 그것은 우리 문예 운동진영이 나름대로 획득해온 갈등의 깊이를 토대로 이제는 필히 전망을 만들어내야만이 그리된다. 물론 절망과 희망의 변증법적 깊이를 가진 현실천착성의 구체성 속에서.
전망의 형상화는 당파적 현실주의의 본질적인 요소이다. 전형화를 통해서 혁명적인 노동자계급투쟁의 전체 역사적인 전망이 나타나도록 하는 것은 당파적 현실주의의 주요한 형상화 원리중의 하나이다. 당파적인 현실주의 예술이, 기록적인 자연주의, 비판적 현실주의 등과 원칙적으로 구분되는 지점은 다름아닌 이 전망의 형상화에 있다. 삶 자체에서 언제나 생겨나기 마련인 갈등 속에서 새로움을 긍정하여 형상속에 숨겨진 본질을 인식하고 그 가능성을 포착해 예술적으로 농축하는 것은 당파적 예술가들의 중대한 과제이다. 엄청난 패배 속에서도 미래사회의 씨앗을 발견해내고 현실적인 갈등형상화의 풍부한 숨결을 불어넣어주어야만이 현실주의의 당파성은 사회의 변혁을 약속해 준다.

갈등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것을 감각화하고 그 인과 관계를 해명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객관적인 모순에 근거한 갈등에서 비로소 개인과 사회의 관계가 역사적-구체적 형식으로 나타난다. 포스트모던한 무갈등의 조건 속에서 우리가 현실주의적인 갈등의 냄새를 격렬하게 원한다라는 사실은, 예술작품에 대한 단순한 감동이나 재미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로부터 훈련되는 제대로 된 갈등에 제대로 익숙해져야만이, 포르노자본이 집요하게 주입시키는 몽롱한 변태에서 벗어나 스스로 자신의 삶을 역사-사회적으로 살아낼 수 있다라는 위기의식때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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