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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3 | 연재 [문화저널]
독자를 위한 현대문학이론 입문
이종민 전북대 교수, 영문학, 본지주간(2004-01-29 11:47:22)


독자여러분께 양해 말씀 드립니다. 지난호부터 필자가 시작했던 현대문학 이론에 대한 소개가 당초의 취지대로 연재 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번역 연재하기로 한 『독자를 위한 현대문학이론입문』의 초판(1985년 판)이 이미 단행본으로 번역, 출판(문학과 지성사, 1987년)되었기 때문입니다. 필자가 번역을 하려고 했던 것이 1989년판으로 그 내용이 다소 보완되어 있고 또 번역을 하면서 상세한 역자의 설명을 더한다고 해도 그 기본적 내용은 같기 때문에 원래의 취지를 살리기에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 됩니다.
그래서 다른 방식으로 현대문학이론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앞으로 이난은 필자가 여러 문학이론을 정리, 소개하는 형식으로 이어가게 됩니다. 그 내용속에는 당초에 밝혔던 러시아형식주의, 맑시스트 이론, 구조주의 이론, 탈구조주의 이론, 독자지향이론 페미니스트비평에 관한 소개가 물론 주를 이루게 될 것입니다. 가능한 여러 관련서적을 바탕으로 현대문학이론을 정리해 가겠지만, 문학비평이론 전공자들을 위한 전문적 논의로서 형식이 아닌, 다양한 이론에 대한 소박한 길잡이 차원으로 엮어갈 계획입니다. 물론, 글의 형식도 전문적인 논문형식이 아닌 수필형식의 글이 될 것입니다.
격월로 연재될 「현대문학이론 입문」이 독자여러분의 문학이론에 대한 호기심을 다소나마 덜어줄 수 있기를 기대하며 다시한번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요즘 ‘경마장’에 관한 이야기가 시끌적한가 보다. 그 파격적 형식이나 내용에 대해 말도 많지만 그것에 대한 비판에 대해 작가가 부리는 ‘신경질’도 관심거리가 되어 있다. 그 ‘신경질’의 요지는 주로 ‘알기나 하고 비판을 하라’는 질책이다. 그것의 배경이 되고 있는 누보로망 혹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오묘한 미학이나 기법 등에 대해 제대로 이해를 하고 나서 덤벼도 덤비라는 말인가 보다. 무식하다고 하니 잠시 무춤해지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곧 소설을 이해하고 감상하는데 그 복잡한 이론이 다 필요한 것인가 고개를 갸웃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이론이나 그 이론이 내세우는 입장이 독자와 작품의 ‘순수한 만남’을 방해할 것이라고 의심을 하기 때문이다.
사실 대부분의 독자들은 문학이론서적 하나 들추지 않고도 소설을 즐기고 있으며 비평가의 도움(매개 혹은 간섭?) 없이도 시를 감상하고 또 평가하기도 한다. 아무런 매개도 거치지 않고 ‘순수하게’ 반응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이것을 독자 나름의 순수한 반응이라고 할 수 있는가? ‘경마장’에 찬사를 보내는 사람이건 비판을 가하는 사람이건 또 어떠해야 한다는 것에 관한 기준이나 입장을 가지고 있다. 그 기준이나 입장은 정규교육을 통하여 형성된 것이기도 하고 자기 나름으로 많은 작품들을 읽으면서 익숙해진 문학적(소설적) 관습들에 의해 형성된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독자의 의식에 일정하게 영향을 미치는 사회적 문화적 풍토하고도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독자는 적어도 그 작품이 쓰여진 언어는 알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 언어야 말로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문화적 경험들의 산물이다. 독자는 이러한 ‘순수하지 않은’ 언어를 통해서만 작품과 만날 수 있다. 어떤 독자도 언어나 문학적 관습 등과 같은 보이지 않는 영향권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시인이 자연이나 현실에 대한 ‘순수한’ 관찰과 인식(사실은 이처럼 순수한 관찰이나 인식이라는 것도 애당초 불가능한 것이지만)으로부터 시를 쓰기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선배시인들의 작품을 눈여겨 보고 또 그것을 모방하면서, 즉 문학적(시적) 인습들에 익숙해지면서 시작활동을 시작하는 것처럼, 독자들도 거듭되는 작품들과의 접촉을 통하여, 문학적 인습이나 관행들에 익숙해지면서 작품에 대한 인식 혹은 감상능력을 키워나가는 것이다. 천부적인 감수성이 창작이나 감상에 있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아무런 수련과정을 거치지 않고 아무런 ‘매개없이’ 그 감수성이 형성될 수 있다는 얘기는 신화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작품을 읽는다는 것은 일정한 방식으로(이미 형성되어 있는 기준과 입장에 따라) 읽는다는 즉 해석을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달리 말하면 모든 작품읽기는 그것에 대한 비평행위이며 모든 독자는 비평가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도날드키지라는 영문학자의 지적처럼, 자기 스스로의 비평적 입장이나 전제들을 의식하지 못하는 비평가(독자)가 되느냐, 아니면 자신의 작품읽기 방식에 대하여 충분히 알고 있으면서 동시에 다른 방법들에 대해 심사숙고를 한 연후에 자신의 방법을 택하는 좀더 성실한 비평가(독자)가 되느냐 하는 것을 선택하는 문제일 것이다. 이데올로기부터 벗어날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어쩔 수 없는 상황일 때 좀더 바람직한 이데올로기를 취하려 하는 것이 올바른 태도인 것과 마찬가지로-사실 이데올로기부터의 해방을 강조하는 주의주장 이면에는 대개 불순한 이데올로기가 숨어 있다-작품을 읽어내는 데 있어 일정한 비평적 관점을 완전하게 배제하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라면 좀더 바람직한 관점을 세우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올바른 자세가 된다.
그러므로 모든 비평이론은 바로 이 좀더 바람직한 해석의 관점을 제시하기 위한 주의주장에 다름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작품의 의미를 가장 정확하게 해석하기 위한 모색의 산물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그 해석의 방법이라는 것들이 너무도 다양하여 이들을 한꺼번에 일목요연하게 정리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우리가 올바른 입장을 세우기 위해서는 이러한 다양한 해석방법들의 가르마를 타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앞서 인용한 영문학자 키지의 말을 빌면, 다양한 비평이론들은 작품의 정확한 의미를 규명하기 위하여 일정한 문맥(context)을 중시한다. 어떤 이는 작가라는 문맥을 중시하여 그 작품이 어떻게 탄생되게 되었는가, 즉 작가의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 의도가 무엇이며 그 작가가 처해 있던 사회적 정치적 지적 분위기가 어떠했는가에 비중을 두는 반면 어떤 이는 독자라는 문맥을 강조하여 그것이 독자에게 어떻게 읽히는가를 중시한다. 어떤 비평적 입장은 현실이라는 문맥을 강조하여 문학작품과 현실의 관계에 주의를 기울이는가 하면 다른 입장에서는 다른 문학작품과의 상호관련성에 주목하여 작품의 의미를 해석하려 하며 또 다른 입장에서는 작품 자체에 초점을 맞추어야만 작품의 의미를 올바르게 해석해낼 수 있다고 주장한다. 물론 이들 모든 입장이 모두 의미가 있으니 어느 한편만을 고집해서는 안된다는 절충주의적인 입장도 있을 수 있겠고, 또 많은 비평이론들이 이들 중 어느 하나의 관점만을 고집하고 있지 않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현대 비평의 여러 흐름을 개괄하기 위해 이런 포괄적인 틀거리를 상정해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 이를 도표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작 가


















발생학적 비평














현 실

모방론적 비평

작 품

텍스트상호관계적 비평

문 학








형식주의 비평


















감화론적 비평


















독 자






작가지향적인 발생학적(Genetic) 비평으로는 1) 작가의 미학적 경험 이외의 경험 즉 작품이 탄생하게 된 배경으로서 당시의 정치사회적 상황이나 이에 대학 작가의 입장 등을 중시하는 전통적인 역사주의적 비평, 2) 시간을 초월한 보편적 진리의 존재를 부인하고 문학을 사회정치적 이념이 만들어낸 언어적 서술로 간주하는 신역사주의적 비평, 3) 문학을 특정 역사의 산물로 규정하고 그것의 역사적 책임감을 강조하며 문화와 사회라는 맥락에서 문학을 이해하려는 맑시스트 비평, 4) 작가가 의도한 혹은 ‘지향한’ 의미가 바로 작품의(불변의) 의미라고 주장하며 ‘객관적 해석’의 가능성 혹은 당위성을 강조하는 해석학적 비평 등이 그 예라 할 수 있다.
작품지향적인 형식주의적(Formal) 비평에는 1) 자족적 실체로서 작품의 유기적 통일성과 ‘실제비평’을 중시하며 면밀한 책읽기를 강조하는 영미 신비평, 2) 문학성을 작품의 형식적 장치들을 통한 ‘낯설게 하기’에서 찾는 즉 문학을 언어의 독특한(실용언어로부터 일탈하여 그것을 왜곡하여 사용하는) 용례로 규정하는 러시아 형식주의 비평 등이 있다.
독자지향적인 감화론적(Affective) 비평에는 1) 독자들의 작품에 대한 개별적인 반응과 그 반응의 동기에 관심을 기울이는 (좀더 주관적인) 독자반응 비평, 2) 독자와 작품이 이루는 연속적인 체험의 장을 가정하여 ‘이상적’ 독자가 ‘지향’을 통하여 작품의 의미를 수용하게 된다고 주장하는 (좀더 객관적인, 혹은 작품 쪽에 기운) 현상학적 독자반응 비평, 3) ‘해석 공동체’ 혹은 ‘문학능력’ 등의 개념을 동원하여 상대적 객관성을 비평의 현실로 받아들이는 (위 두 입장의 중간쯤에 서있는) 구조주의적 독자반응이론 등이 있다.
현실지향적인 모방론적(Mimetic) 비평이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모방론에 입각한 전통적 비평방법론으로 특정한 유파를 형성하고 있지는 않지만 기본적으로 토대-상부구조론에 근거하고 있는 맑시스트 비평이론이 현대의 대표적인 현실지향적 비평이론이라 할 수 잇으며, 또 문학작품에 나타나는 여성의 상투적 이미지 등을 분석하여 작품 탄생 배경에 숨어있는 남성중심 이데올로기를 파헤치려하는 여성해방론적 비평도 그 한예라 할 수 있다.
다른 문학의 모방을 통한 문학의 생성을 강조하는 상호텍스트적(Intertextual) 비평에는 1) 칼 융의 ‘집단무의식’의 개념을 수용하여 심리학적 측면에서 문학의 하부구조에 관심을 보이는 신화비평(혹은 원형비평) , 2) 소쉬르의 언어이론에 근거하여 문학장르의 토대로서 초시간적인 체계(구조)의 탐구를 강조하는 구조주의 비평 3) 의도적 오독(misreading:선배 작가들의 영향을 거부하고 자신의 독창성을 내세우려는 욕망에서 작품을 임의로 곡해 하는 것) 및 텍스트상호성(intertextuality:어떤 문학텍스트가 다른 텍스트를 반영하거나 그 텍스트들과 불가피하게 연결되는 여러 가지 방식을 지칭하는 말)등의 개념을 도입하여 문맥이나 구조등의 개념에 대해 근본적인 도전을 시도하는 후기구조주의 비평등이 있다.
키지 스스로가 인정하고 있는 것처럼 이러한 도식은 임의적인 것이다. 각 비평이론들의 핵심적인 주의주장이 이런 도식으로는 모두 설명되지 않는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또 위의 예에서도 확인되듯 하나의 비평적 입장이 어느 한편만의 지향으로는 설명될 수 없다. 맑시스트 비평이나 여성 해방론적 비평은 작가지향적이기도 하고 현실지향적이기도 하다. 역사 변혁을 위한 의식화 작업의 방편으로는 문학예술을 중시하는 점에 있어서는 독자지향적이라 할 수도 있다. 또 비평이론에 있어 작품의 의미해석에 못지 않게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작품의 가치판단의 부분은 위의 도식으로 쉽게 분류되지 않는다. 또한 고정적인 의미 자체를 부인하여 해석의 불가능성을 강조하는 해체주의 비평(Deconstructive Criticism : Deconstruction에 대한 번역어로는 해상(海象) 파원(波源) 등이 있기는 하지만 여기에서는 가장 널리 쓰이고 있는 용어를 택했다) 등의 최신 이론들이 비집고 들어갈 곳도 마땅치 않다.(키지는 해체주의 이론을 에필로그로 첨가 분류함으로써 이 난관을 피해가고 있다)
우리가 각 비평이론들의 핵심적인 내용에 접근하고 또 그것의 의의 혹은 가치를 평가하기 위해서는 이런 작품 의미해석 부분뿐만 아니라 문학성, 문학과 이데올로기, 문학의 자율성, 문학과 사회 등의 문제들에 대하여 각 이론들이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가도 살펴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우리의 문학현실에서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 민족문학논쟁, 리얼리즘 논쟁, 포스트모더니즘 논쟁 등에 접근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이론적 논쟁에 있어 재미있는 현상은 이러한 논쟁들이 대개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라는 구도를 택한다는 것이다. 즉 자신의 입장 이외의 잡다한 논의들을 선사(先史)(pre-history)로 취급하여 참된 역사(자기들의 이론)가 시작되기 이전의 암중모색적 시행착오쯤으로 간주한다는 것이다. 해체주의 비평이론은 그 이전의 비평적 관점들은 모두 모든 현상을 거대한 하나의 구도(이를 대서사 Grand Narrative라 부르기도 하지만)로 설명하려는 계몽주의적 사고의 산물로 간주하여 비평의 경향을 해체주의와 그 이전의 모든 비해체주의적 비평이론으로 판가름 하려 한다. 포스트모더니즘론자들은 자신들의 입장이야말로 모더니즘과 리얼리즘의 한계를 동시에 극복한 것으로 이제 비평적 입장은 포스트 모던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으로 반분되었다고 주장한다. 반면 리얼리즘론자들은 신비평, 형식주의, 구조주의, 탈구조주의, 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 등의 주의주장들이 모두 역사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에서는 동일한 문학주의적 입장의 분파들이라 주장하며 현대 비평의 흐름을 리얼리즘과 비 혹은 반리얼리즘으로 양분하여 자신들의 입장을 옹호하는 것이다.
또 하나 재미있는 사실은 다른 주의주장들을 자기 나름으로 단순하게 정리하고 그것을 근거로 하여 비판을 가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필자가 이런식으로 그들을 싸잡는 것이 바로 그 전형적인 예라 할 수 있다) 서로 비슷한 입장에 서있는 사람끼리 끊임없는 입씨름을 벌릴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자기 스스로도 끊임없이 잘못 읽기를 하면서도 상대편이 말귀를 못 알아듣는다고 비판을 하는 것이다. 또 하나 자주 들리는 것은 ‘무식하다’는 말이다. 앞서 소개한 작가의 신경질도 여기에 해당한다. 모더니스트들은 모더니즘이 얼마나 심오하고 유래가 긴 것인데 그렇게 쉽게 매도하느냐고 리얼리즘론자들을 공박한다. 포스트모더니즘 옹호자들도 자신들의 주의주장이 근거하고 있는 심오한 철학이나 사상에 대해 잘 알아보고 나서 비판을 해도 하라고 짜증을 부린다. 리얼리즘론자들 역시 자신들 논리의 진지한 철학적 근거와 과학성을 역설하며 모더니스트나 포스트모더니스트의 ‘섣부른’ 공박을 비판한다. (그러나 비판을 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안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런지도 모른다. 아는 것하고 비판을 위한 입장을 세우는 것이 동시에 일어나는 것이지 앎이 반드시 선행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비판의 칼을 세우지 않고 참다운 앎에 도달할 수는 없다. 진정 아는 것과 비판의 입장을 세우는 일은 복잡한 변증법적 주고받음의 과정을 통해 진행되는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비평이론에 회의를 느끼는 것은 어쩌면 이런 물고 물리는 입씨름에 짜증이 나서 일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불구경만 하고 있을 수가 없다. 이런 논의들을 통하여 우리의 문학이 더욱 풍성해 지는 것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시인이나 작가들도 이러한 논의들에 주의를 기울이며 창작을 하기 때문에 그들의 시나 소설을 좀더 폭넓게 그리고 심도 잇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귀기울이고 있는 미학이나 비평이론에 함께 귀를 기울여주어야 하는 것이다. 때로 짜증스럽기도 하겠지만 우리가 문학을 포기하지 않는 한 감내해야 할 고행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입장이 없는 것이 반드시 불편 부당한 것이 아닌 것처럼 비평이론의 간섭으로 벗어나는 것이 문학작품과의 공정한 만남을 보장해주는 것은 결코 아니다. 우리가 올바른 입장에 서 있어야만 현란한 수사와 수식어로 우리의 의식을 마비 혹은 오염시키고 있는 사이비 문학으로부터 우리를, 우리의 참된 문학을 지킬 수 있는 것이다. 그래야 ‘경마장’ 주인의 핀잔도 피할 수 있는 게 아니겠는가? 아니면 되돌려 면박을 주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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