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TV화면에서 나이든 여성들이 머리에 흰 띠를 두르고 구호를 외치거나 혹은 격렬한 몸쌍무을 벌이는 장면들을 간혹 볼 수 있다. 민가협(민주화실천가족협의회)이란 이름으로 불리우는 그들은 거의 대부분이 시국관련 재소자의 어머니나 혹은 아내들로 이 시대의 아픔을 함께 느끼고 함께 행동하게 된 평범한 주부들이다. 그 가장 평범하면서도 결코 평범하지 않은 어머니 한 분을 “여성과 삶” 이번 호에서 만나보았다. 지난 2월까지 전북민가협회장직을 맡았었고 지금은 ‘그냥 민가협 어머니’로서 계속 활동중인 오경숙씨(56세)는 2남2녀를 둔 중년여성이다
민가협과 인연을 맺기 전까지 30여년의 결혼생활은 말 그대로 살림에 매달려 온 세월이었다. 부하직원의 잘못에 책임을 지고 공무원직을 사직한 남편이 10년이 넘게 공들인 건축사업의 실패로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을 때, 그에게 남겨진 것은 당장 생계를 꾸려가야 하는 무거운 짐 뿐이었다. 주변의 도움을 받아 갖가지 생활용품의 외판과 좋은 신랑 신부감을 찾아 짝지워주는 일 등으로 4남매를 거뒀다. 그저 자식들이 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 직장 얻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러다 둘째 아들(이영훈씨)이 원광대학교 치과대학에 들어가면서 새로운 걱정이 생겼다. 2학년때 부턴가 집에 형사들이 드나들기 시작하고 아들은 그들을 피해 집을 비우는 일이 잦아졌다. ‘아들이 학교에서 데모를 하고 있으니 와서 데려가라’는 전갈에 교수님을 찾아가 걱정을 나누고 온 날은 ‘집안형편 생각해서 공부나 해라’고 타이르기도 했다. 그러나 아들은 휴학과 유급을 거듭하다가 86년 9월에 일을 저지르고 만다. 전주 코아백화점 앞에서 아시안게임반대시위를 하다가 연해되어 간 것, 이런 상황에 처한 어머니의 마음은 다 같은 것일까. 막상 붙잡히고 나니까 오히려 안심이 되더란다. “매일 매일 애가 어디에 있나, 밥은 제때 먹나, 잡혀간 것은 아닌가 걱정하다 소재가 확인되니까 차라리 마음이 가라앉대요.” 그때부터 날만 새면 북부경찰서로 아들을 보러갔다. 면화를 안 시켜줘 싸우기도 했고, ‘내 아들 때리면 가만 안 있겠다’고 으름장을 놓기도 하면서 아들의 건재함을 확인해야 했던 것이다.
재판을 지켜보면서 ‘잘못한 사람들은 따로 있는데 왜 내 아들이 저기서 있이어야 하나 싶어’ 분한 눈물을 흘렸다는 어머니는 아들이 1심에서 1년 6월, 2심에서 일년을 받고 전주 교도소에 수감되자 더 이상 예전의 어머니 일수가 없었다. 교도소 안에서 자행되는 가혹행위들이 들려오고, 그에 항의하다 금치처분을 받은 아들을 면회할 수 없어 발을 구르는 어머니가 하나가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거기서 만난 다른 어머니들도 똑같은 걱정과 울분으로 가슴 태우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자 자연스럽게 그들과 행동을 같이 하게 됐다. 혼자 싸우는 것보다 여럿이 한꺼번에 달라붙으니 효과도 컸다.
그들 사이에서 민가협이 거론된 것은 필연적인 일이었으리라. 87년 2월 16일은 오경숙씨에겐 평생 잊지 못할 날이 되었다.(아들이나 남편에 관한 일은 정확한 시기를 거의 기억하지 못하면서도 그 날짜만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전북 민가협이 결성되고 그 회장직을 맡은 것이다.
말이 민가협이지 처음엔 마땅히 모임을 가질 장소도 없었고 무슨 일을 하고자 해도 재정이 항상 큰문제였다. 우선 회원들끼리 회비를 거두고 일일 찻집을 열어 후원금을 모았다. 그러자 몇군데 후원을 자청하고 나서는 곳도 생겼다. 이제 그들은 교도소 정문 앞에 석유난로를 피워놓고 스티로폴을 깔고 앉아 밤을 새우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전경들이 스티로폴을 빼앗아 짓밟아버리면 다시 쪼개진 조각들을 줏어모아 앉는 실갱이가 몇 번씩 벌어졌다. 시국사범의 재판은 빼놓지 않고 찾아다녔고 감옥에 갇힌 이들에겐 농민이건 노동자건 학생이건 가리지 않고 영치금을 넣어주었다.
처음엔 50여명으로 시작되었던 모임이 100명을 넘어서고 전주, 이리, 군산, 정주까지 쫓아다닐 때는 바쁘고 고된만큼 보람도 컸다. 그러나 집안살림은 도맡고 있는 어머니들이 대부분인 민가협은 그 활동에 한계를 드러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시골에서 농사짓는 사람은 하루라도 농사일을 미뤄 둘 수 없는 형편이고, 여러 가지 생활고에 시달리면서 바깥일을 계속 하자니 살림이 엉망이었다. 물론 민가협에 남자회원들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결성 당시만 해도 성원의 3분의 1쯤은 아버지들이었다(이번에 신임회장을 맡은 김금섭씨는 전북대학교 구속학생이었던 김인수씨의 아버님이시다).
그러나 현장에서 부딪쳐 싸우는데는 어머니들을 따라갈 수가 없다. 그 원인은 모자간의 맹복적인 사랑에서 쉽게 찾아질 듯하다. “엄마가 자식 생각하는 데는 물불 가릴게 없어요. 남자들처럼 체면 생각할 것도 없고, 그래서 민가협에서는 여자가 더 유리해요.” 오경숙씨의 설명이다. 그러나 어머니는 집안에 묶인 존재이기 쉽다. 그러다 보니 차츰 발길이 뜸해지고 회원수는 점점 줄어들었다. “게다가 아들이 석방되고 나면 조금씩 남의 일같이 생각되고, 또 언제까지 남의자식들 뒷바라지를 할 수 있을까 막연해지기도 하겠지.” 그렇게 이해는 하면서도 안타까운 심정은 어쩔수 없는 듯 어머니의 음성이 잦아들었다. 현재까지 열심히 활동하고 있는 10여명은 모두 처음에 만나서 뭉쳐진 그 때 그사람들이다. 한때는 민가협에 들게 하려고 영치금을 구속자 부모님께 대신 전해주기도 해보았다. 70-80만원씩 들여 도움도 안되는 민선변호사를 사는 그들에게 인권변호사를 소개해주면서 설득하기도 했지만 그때만 지나면 ‘계란으로 바위치기’란 생각으로 돌아가고 마는 경우가 더 많았다. 그럴 때마다 ‘아직 멀었다’는 생각에 지치기도 하고 너무 힘들게 여겨지기도 하지만 그동안 민가협이 해낸 일들을 생각하면 다시 힘이 솟는다.
몇년전 군산에서 미군이 택시기사를 구타한 사건이 있었을 때, 이 문제를 들고 일어난 대학생들에게 법정에서 7년을 구형했다. ‘그대로 놔두면 그 학생들이 못 나올 것 같아’ 선거공판 이틀 전에 법원을 기습방문, 판사면담에 성공했다. ‘당신들은 한국사람 아니오?’란 무례한(?) 항의가 주효했는지 서명 형식의 석방운동을 통해 그들을 집행유예로 나오게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때의 기쁨은 잠시, 5공시절보다 2배나 되는 양심수를 가둬놓고 있는 현 정권을 생각하면 앞길은 더욱 막막하다. 어머니가 바라는 것은 그런 작은 승리가 아니다. “양심수가 한명도 안남고 그래서 민가협이 필요없게 될 때가 언제 올른지…”
한동안 이어진 침묵이 무거워질 무렵 이영훈씨가 돌아왔다(좀전에 자신의 이야기가 나오니까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 나갔다가). 그는 87년 7월에 형기 2개월을 남기고 가석방되어 나온 뒤에 구속청년학생협의회, 공정선거감시단 등에서 일하다가 현재 이리 노동교육연구소 간사로 있다. 연구소에 대해 몇 가지 물어보았다. 노동자들을 상대로 그들의 임금문제, 산재, 노조활동 등을 상담, 교육하고 조사, 연구하는 작업들을 주 업무로 하면서 ‘이리 지역2만여 공단 노동자들에게 대사회적 인식을 갖게 하는데 연구소가 무슨 도움을 줄 수 있을까’를 당면과제로 삼고 있다는 설명이 끝나자 마자 불쑥 ‘어머니에 대해 한 말씀’을 부탁했다.
“어머니께 자세한 말씀을 들려드릴 수 없을 때도 내심 어머니를 믿고 존경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어머니께서 해오신 일에 정말 감사하고 있고, 그동안 제가 어머니께 도움 받은 점도 많습니다. 가끔 너무 욕심을 부리시는 것도 같지만(웃음)…” 든든한 동지를 바라보듯한 믿음이 어머니와 아들 사이에 가득 퍼진다. 사실은 여기에 빼놓을 수 없는 또 한사람의 동지가 있다. 같은 학교에서 학생운동을 했고, 지금은 같은 사무실에서 같은 일을 하고 있는 그의 아내, 신정일씨(그를 만나보지 못해 참으로 아쉽다)의 존재가 대화 속에서 차츰 부각되었다.
결혼 3년째에 접어든 아들 내외에게서 손주를 기다리는 어머니와 아이를 원하지만, 육아문제에 합의가 이루어질 때까지 아내에게 강요하고 싶지 않다는 아들. 이들을 동시에 만족시킬수 있는 방도는 무엇일까. 일을 가진 여성들의 최대 난제인 육아문제는 바로 여성문제와 맞닿아 있을 터, 신정일씨에게 묻고 싶은 것을 그 남편에게 대신 했다
“여성문제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서로 의존하지 않아야 합니다. 어머니가 자식에게, 여자가 남자에게 일방적으로 의존하려 하지말고 각자 자기의 설자리를 찾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