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 박물관 考古전시실의 선사시대코너에는 최근에 발굴조사되어 전북지역의 대표적인 청동기 시대집터 및 무덤유적으로 주목을 끈 바있는 全州 如意洞遺蹟 출토 유물들이 전시되고 있다. 다양한 종류의 민무늬 토기(無文土器)와 여러 가지 용도의 石器들, 그리고 청동거울을 포함한 청동기 유물들은 2천년도 더 넘게 오래전에 이 지역에 퍼져있던 청동기 시대 문화의 일면모를 보여주는 좋은 例가 되고 있다.
여의동은 전주시의 서북쪽에 위치하며 원래 完州郡 助村面 如意里였으나 행정구역 개편으로 전주시에 편입된 곳이다. 유적은 여의동 일대에 남북으로 뻗어있는 낮은 구릉의 정상부와 그 동쪽 斜面에 형성되어 있는데 즉, 정상부(높이 약50m)와 그 능선을 따라 널무덤(土壙 墓)이 조영되었고 그 東斜面에 집자리(住居址)와 민무늬토기․석기유물 包含層이 위치한다.
이 유적이 알려지게 된 것은 1985년 4월에 현지주민에 의해 구릉정상부의 널무덤 1기가 파헤쳐져 묘광내부에서 청동거울․도끼․끌 등의 청동기 유물이 수습, 신고되면서였다. 이를 계기로 현장일대에 대한 조사계획이 수립되었고, 1988년 9월~10월에 걸쳐 약 40일간 全州大學校博物館)에 의해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다. 그 결과 청동기 시대에 해당하는 집자리 1基와 널무덤 3基, 그리고 넓은 유물포함층이 발굴되어, 각종 민무늬 토기 및 석기들이 수집되었다. 아직 정식보고서가 간행되지 않아서 이 유적조사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알수없으나 그 동안 발표된 略보고문의 내용에 따라 이 유적과 출토유물에 대하여 대략 살펴보기로 한다.
먼저 집자리는 낮은 구릉의 완만한 경사면에 이루어진 평면원형의 움집으로서 그 규모는 깊이 약 0.4m, 지름 약 6.6m 내외이며, 현 지표아래 약 0.5m에서 내부바닥이 나타난다. 집자리 내부에는 토기片, 석기片들이 널려 있고 바닥 중앙에는 타원형의 화덕자리로 추정되는 시설이 있는데 그 규모는 길이 1.45m, 폭 1.0m, 깊이 약 0.3m이다.
그리고 그 주위로 움집의 기둥을 세웠던 기둥자리가 4군데에 네모꼴 배치를 보이며 노출되었다. 유물은 주로 집자리 바닥에서 바리(鉢)․항아리(壺)․독(甕)등의 민무늬 토기와 돌자귀․갈돌․긁개 등의 석기가 수습되었다.
널무덤은 모두 3기가 조사되었다.
1호널무덤은 구릉 정상부에 위치하며 동-서 長軸 방향으로 조영되었다. 1985년에 현지주민에 의해 뚜껑들이 제거되고 내부가 파헤쳐졌기 때문에 나머지 잔존 遺構의 정리 및 조사가 이루어졌다. 묘광은 먼저 타원형의 外坑을 파고 다시 그 내부에 갱을 파들어간 다음 마지막으로 길이 2.2m, 폭 0.5m, 깊이 0.4m의 타원형 매장구덩이를 팠으며 그 윗면에 뚜껑돌로 板石 1매를 덮어 준 형식이다. 또 묘광 내부에는 바닥에 돌을 깔고 벽면도 주로 냇돌을 사용하여 다져 붙였다. 출토유물로는 이미 주민에 의해 신고되었던 청동기 거친무늬거울 (多 粗文鏡) 2매와 청동도끼․끌 각1점이 있고 발굴 조사 時에 출토된 검은간토기목 항아리(黑陶長頸壺) 1점이 있다.
2호널무덤은 1호의 서북쪽 약 40m 떨어진 능선에 위치한다. 조영방법은 타원형의 묘광을 파고 上部에는 길이 0.7m 내외의 자연 板石 5매를 가로 걸쳐 덮고 작은 막돌로 틈새를 막고 있다. 그리고 묘광내부 바닥에는 토기조각을 깔았다. 枕向은 동쪽으로 추정되며, 묘광의 오른쪽 허리부분에서 간돌검(磨製石劍)1점이 출토되었고, 뚜껑돌 뒤에서 민무늬토기 1점이 출토되었다.
3호널무덤은 2호의 북쪽 약 4m 떨여져서 나란히 자리한다. 지표 아래 약 0.3m 깊이에서 묘광 바닥이 바로 드러났으며 벽면은 남아 있지 않았다. 바닥에는 납작한 자갈돌을 깔았으며 유물들은 출토되지 않았다.
유물포함층은 집자리의 동쪽 낮은 곳에 퇴적된 것으로서 여기서는 많은 양의 민무늬 토기片과 다양한 석기들이 수집되었다. 토기에는 항아리, 바리, 독(甕) 종류가 많고 석기로는 돌검, 돌살촉, 흠자귀(有溝石斧), 반달돌칼(半月形石刀), 방추자, 숫돌, 갈돌, 긁개 등이 보여진다.
이상에서 여의동 유적은 크게 집자리유적과 무덤유적으로 나눠볼 수 있다. 우선 집자리의 평면구조나 출토유물을 볼 때 ‘송국리형토기문화’라 부르는 벼농사(稻作)에 기반을 둔 민무늬 토기문화와 같은 유형임을 알 수 있다. 즉, 여의동 집자리에서 보여지는 평면원형의 중앙에는 타원형의 홈이 패여진 시설이 있고, 그 주위로 움집내부에 세우는 기둥자리가 배치되어진 구조와 유사한 형태들은 부여․松菊里, 서산․海美, 광주․松岩洞, 영암․長川里등 송국리형토기 문화권에 속하는 집자리 유적들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또한 여의동 집자리 및 그 아래쪽 경사진 유물포함층에서 다량출토된 민무늬토기의 대다수가 아가리가 벌어지고 부풀은 몸체에 축약된 바닥을 가진 松菊里形土器이며, 석기유물들도 벼농사에 수반되는 수확, 가공용 도구가 많은 점은 위에 열거한 유적들과 그 성격이 유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여의동 집자리와 비슷한 예로 전북지방에서 조사된 정읍․보화리집자리 유적을 들 수있다. 보화리 집자리는 낮은 야산의 구릉에 자리하고 있으며 직경 6m 내외의 원형움집터로 바닥 중앙에는 화덕자리가 있고 그 주변에는 네곳에 기둥구멍이 있다. 유물로는 민무늬토기片과 숫돌, 갈돌, 돌도끼, 가락바퀴 등이 출토되고 있다.
한편 여의동 널무덤은 토광을 파고 자연 板石을 이용하여 뚜껑돌을 덮어준 점에서 서로 유사성이 보여지지만 한곳에서는 검은 간토기와 청동기유물이 출토되고 다른 곳에서는 간돌검(磨製石劍)과 민무늬토기가 출토된 점이나 묘광내부구조에서는 서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즉, 청동기가 출토된 1호에서는 바닥과 벽면에 주로 냇돌을 다져 붙인 반면, 간돌검이 출토된 2호에서는 바닥에 민무늬 토기 조각을 깔고 있다. 또한 1호무덤과 청동기 일괄유물을 대전․槐亭洞, 아산․南城里를 비롯한 금강유역의 청동기 일괄출토유적 및 유물상과 유사한 성격을 띠고 있으며 검은간토기목항아리는 이러한 청동기와 세트관게로 출토되는 유물이다. 그리고 2호널무덤 출토의 간돌검과 민무늬토기는 청동기시대의 주된 묘제인 고인돌(支石墓) 이나 집자리 등에서 자주 보여지는 유물이다. 이렇게 출토유물과 묘광내부시설의 차이는 서로 다른 성격의 문화적 소산으로 볼 수 있으며 이들이 같은 지역에서 조사된 것은 각기 이질적인 두 문화가 동일지역에서 접촉․융합된 것을 추정할 수 있는 뒷받침이 되므로 그 문화사적 의미는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을 종합해 볼 때 여의동 유적은 간돌검과 벼농사에 수반되는 민무늬토기․석기를 위주로 하는 토착의 민무늬토기문화에 새로운 청동기문화가 융합․동화되어 형성된 청동기시대 후기의 집터․무덤유적으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