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창 김성옥은 19시기 초반에 활동했던 사람이다. 김성옥은 가왕(歌王)으로 일컬어지는 송흥록(宋興祿)과 처남 매부지간이었다고 한다. 김성옥은 충청남도 강경 일끗니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강경은 북부 호남 평야와 황산벌을 끼고 있는 문물의 집산지이다. 금강을 따라 여기까지 배가 드나들 수 있었기 때문에, 육로 교통수단이 발달되지 않았던 시절에는 교통과 상업의 요지였다. 이곳에 모인 세곡(稅穀)은, 여기서 배에 실려 황해를 거쳐, 한강을 따라 한양으로 실려 갔으며, 한양의 여러 가지 상품 또는 외국의 물건까지도 배를 통해서 이곳까지 쉽게 실려 올 수 있었다.
나중에 일제에 의해 금강 하구에 있는 군산항이 호남평야 곡물의 수탈기지로 개발되자, 강경은 쇠퇴하기 시작했지만, 역시 조선시대에는 강경은 우리나라에서도 몇째 안가는 도회지였던 것이다. 강경의 판소리는 이러한 강경의 번성과 무과하지 않다. 비록 판소리가 농경 문화 속에서 생겨난 것이긴 해도, 소리꾼들이 소리를 팔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이 많이 모이고 재화(財貨)가 풍부한 강경과 같은 도회지가 판소리의 중심지가 되기도 했다. 나주, 사포, 하동, 진주 등이 그런 곳이다. 그러니깐 강경의 판소리는 강경의 융성과 함께 융성했고, 강경의 쇠퇴와 함께 쇠퇴했다고 볼 수 있다. 강경이 융성했을 때 이곳에서 독특한 판소리를 피워낸 인물이 바로 김성옥이다.
김성옥이 태어나서 살았다는 일끗리는 어디 쯤 있는가, 문헌에만 나오는 일끗리를 찾기 위해 강경 읍내를 다 돌아다녀도 일끗리는 정말 이 세상 ‘끝’에나 있는 것인지, 찾을 수 가 없었다. 길가에서 만난 노인들도 일끗리나 판소리에 대해 아는 사람은 없었다. 읍사무소에 들러, 혹시 ‘일끗리’의 ‘끗’이 혹시 한자로는 “말(末)”이 아닐까 싶어, ‘末’자 들어가느 지명을 물었더니 부두가 있던 곳에 ‘창말’이라는 곳이 있다고 했다. 그러나 ‘창말’의 ‘말’은 ‘끝’이라는 뜻보다는 ‘마을’이라는 의미이기가 쉽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창고가 있던 마을’이 아닐까. 마침 창말에는 창고들이 있었다고 했다.
전라남도나 전라북도에서는 명창이 난 곳을 찾아내 비석을 세우고, 하다 못해 표석(標石)이라도 세워 기억하려고 애쓰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는데, 다리 하나를 사이에 두고, 문화에 대한 의식이 이렇게 다를 수도 있는 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강경에 맞닿은 전라북도 쪽 익산군 망성면에는 일제시대 명창 정정렬이 살았고, 그곳 사람들은 모두 정정렬이 당대 최고 가는 소리꾼이었음을 기억하고 있는데, 그보다 한 세기쯤 앞서 간 사람이라고는 해도, 이렇게 흔적이 없을 수 있는 가 싶었다.
김성옥으로 다시 돌아가자 김성옥의 스승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니까 자득(自得)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말하면 당시의 사회문화 속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난 명창인 것이다. 김성옥은 일찍이 학슬풍(鶴膝風)에 걸려 오래 병석에 누워 있다가 결국 30대에 요절하고 말았다고 한다. 학슬풍이란 요새 용어로 말한다면 아마 무릎 관절염쯤 되는 모양이다. 그런데 김성옥은 오랜 와병중에 홀로 누워<진양조>를 완성했다고 한다. 학슬풍이란게 기동만 어려울 뿐 그다지 고통이 심한 병은 아닌 모양이다. 그러니 누워서 이런 저런 궁리 끝에 그런 새로운 장단을 만들어 낼 수 있었을 것이다.
진양조란 판소리 장단의 한 종류로 6박이 네 개 모여 총24박으로 되어 있다. 그러니까 판소리 장단중에서도 가장 긴 장단이다. 또 느리게 부르는 경향이 많아서 흔히 제일 느린 장단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어느날 김성옥의 처남인 송흥록이 문병 차 찾아오게 되었다. 송흥록은 당시 최고가는 명창 광대답게, 방으로 들어서며 ‘근래는 병세가 어떠하며, 과히 고적하지나 아니한가’라는 말을 중모리 장단에 맞춰 노래로 불렀다. 김성옥은 곧 ‘고독의 비애를 몹시 느낀다’는 의미의 말을 새로운 장단으로 불렀는데, 이것이 바로 진양조 장단의 효시가 되었다는 것이다. 중모리는 12박으로 되어 있어, 이를 배로 늘리면 24박 진양조가 된다. 물론 박이 늘어나면 리듬의 형태 또한 달라져야 하지만, 단순하게 생각하면, 중모리를 배로 늘이면 진양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송흥록은 깜짝 놀라 이를 치하해 마지 않았다. 그리고 송흥록은 이를 세련시켜 현재와 같은 진양조 장단으로 완성하였다고 한다.
김성옥의 소리는 그의 아들인 김정근에게 이어지고, 다시 김정근의 두 아들 김창룡, 김창진, 이동백에게 이어졌는데, 김창룡, 김창진, 이동백이 활동하던 20세기 초반에는 김성옥의 전통을 이은소리가 최고읜 융성을 누렸다. 그리고 이들의 소리를 <중고제>라 이름하게 되어, 김성옥은 <중고제>소리의 시조로 알려지게 되었던 것이다.
김정근은 강경에서 살다가, 지금의 장항읍 성두리로 이사를 하였다. 이는 아마도 강경의 쇠퇴, 그리고 군산의 융성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추측된다. 김정근은 지금은 사라져 버린 <무숙이 타령>을 잘하였으며, ‘삼공잽이’라는 곡조를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삼공잽이는 무가의 한 장단으로 판소리에서는 느린 진양조를 일컫는다. 김정근의 아들 김창진도 느린 진양조에 특히 뛰어났다고 하는 말이 있고 보면, 중고제 소리는 진양조와 필시 깊은 인연이 있는 모양이다.
진양조는 양반들의 음악인 정악과는 갊은 부분이 많다. 우선 느리다는 점이 그것이며, 소위 ‘가곡성 우조’라 하여 정악의 선율을 판소리화 한 곡조는 모둔 진양조라는 점에서도 그렇다. 또한 판소리에서 사용되는 장단중 진양조만이 유일하게 노동의 리듬이 아니라 사색적 리듬이라는 점도 진양조의 정악과의 관련성을 뒷받침해 준다. 중고제 소리와 진양조의 깊은 관련성은 따라서 자연스럽게 중고제와 정악과의 깊은 관련성으로 이어진다.
현재 우리가 들어볼 수 있는 중고제 소리는 이동백, 김창룡의 소리와 방진관 심순정등의 소리인데, 이들의 소리도 각 개인마다 상당히 다른 특성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한 마디로 얘기하기는 곤란하다.
김창룡은 다루(소리를 떨거나 꺾는 것)가 적고, 맑은 음색의 건조한 창법을 구사하고 있지만 이동백은 그렇지도 않다. 따라서 아직도 많은 연구가 요청된다.
다만, 구체적 분석의 결과에 의하지 않은 단순한 감각적 인상으로만 볼 때는, 아무래도 전라도 지역의 소리와는 상당히 다른 느낌을 준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반세기 전만 해도 굉장한 세력을 가져왔던 이 소리가 전승에서 완전히 탈락한 것도 일제 이후 판소리 청중이 전라도 중심으로 축소된 점과 관련이 아주 깊다. 곧, 중고제 소리는 일제 이후 판소리 전승의 기반이 되었던 전라도 청중의 감성과 기호에는 맞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중고제 소리와 전라도 소리의 차별성을 증명하는 것이다.
이제 김성옥으로부터 시작된 중고제 소리는 사실상 찾아볼 수 없다. 이동백의 <심청가>가 김연수를 통하여 오정숙에게, 김창진의 <심청가>는 박동진에게 전해졌다고 하지만, 오정숙이나 박동진의 <심청가>는 이미 중고제 소리는 아니다. 전라도 소리에 동화해 버린 것이다. 문화 패턴의 변화에 의한 어쩔 수 없는 현상이라고는 해도 안타깝기 그지없다. 그러한 변화가 발전을 의미하는 게 아니고, 판소리의 전반적인 몰락으로 가는 불안한 조짐의 일단이라는 점이 더욱 마음을 무겁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