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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3 | [문화저널]
고대사회의 서양음악(1)
문윤걸․전북대 사회학과 조교 (2004-01-29 11:56:02)
이 땅에 인간이 살면서 ‘문명’이라는 것이 생기기 시작한 때는 대략 기원전 3천년경이라고 한다. 인간이 한 곳에 터를 잡고 생활하면서 자신들의 생산력을 점차 발전시켜 나가는 과정중에 자연스럽게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인도, 중국 등지를 중심으로 이른바 4대 문명권을 형성하였다. 이중 서양음악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 지역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문명인데 그중에서도 특히 그리스와 로마의 문화는 서양의 고대 문화뿐만 아니라 이 글에서는 그리스와 로마의 음악문화를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그리스는 고대문명을 화려하게 일궈 낸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와는 지중해를 사이에 두고 있어서 활발한 물적&#8228;인적 교류가 수월하다는 지리적 조건 때문에 다양한 주변문화의 영향하에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인들은 이 문화의 지배하에 있지 않고 인접국가들의 문화를 수용하여 이를 집대성하고 체계화하면서 새롭게 일궈냈다. 그리스와 로마의 문화는 서양의 모든 예술분야에서 대단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서양의 모든 예술분야에 걸쳐 그리스의 조각, 건축, 시, 연극 등은 오늘날까지도 서양예술의 훌륭한 모범이 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예술에 대한 그리스인들의 생각이나 가치관은 예술에 관한 학문적 연구의 고전적 예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인들이 남겨 준 음악적 유산들을 살펴보면 수많은 문헌들을 통해서 선법, 음계, 리듬, 음정 등에 관한 기초적인 이론 뿐만 아니라 음악비평, 음악미학, 음악교육학, 음향학 등 음악이론에 관한 중요한 학문적 기초가 되는 글들을 찾아볼 수 있다.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 음악이 중요시 된 것은 문자가 발명되기 이전 고대 사회를 지켜 온 사회적 도구가 바로 음악이었기 때문이다. 고대 사회법을 노래로 만들어 부모에서 자식에게로 전해진 것이다. 이와 더불어 또 하나의 중요한 점은 그리스의 지리적 위치가 동&#8228;서양이 만나는 곳으로 여러 민족들이 그리스에 모여 들면서 문화적 충돌을 일으킨 것이다. 예를 들면 북쪽의 도리안과 이오니안 민족은 엄숙하고 엄격한 성격인데 반해 동쪽의 브리기안 민족은 부드러우면서도 개방적인 성격을 지녀 이들 사이에 문화적 충돌이 컸다. 이런 충돌을 환화하기 위해서는 학문을 통한 인격수양이 필요했으며 이를 위한 기제로서 음악의 역할이 그 중요성을 인정받으면서 음악을 중요학문으로 여기게 되었다. 그리스 문화의 역사는 상당히 오래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이를 이해하는데 그리스 신화는 좋은 단서가 되고 있다. 그리스 신화에서는 음악에 관한 얘기가 많이 등장하는데 특히 ‘뮤직’이 라는 단어의 어원이 된 ‘뮤즈’는 모두 9명으로 그 하나하나가 음악과 시의 각각 다른 부분들을 관장하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는 그리스의 예술이 상당히 분화되어 다양한 모습을 띠고 있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또 훗날 오페라의 소재로 많이 쓰였던 오르페우스의 이야기에서 오르페우스가 음악을 통해서 그의 아내인 유리디체를 죽음으로부터 구해내는 장면 등은 그리스인들의 신비주의적 음악관을 잘 반영하고 있다. 그리스인들은 음악의 마술적이고 신비로운 권능을 믿고 음악을 육신과 영혼의 치료나 종교의식의 중요한 소재로 사용하였다. 음악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주인공들이 악기를 연주하면서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 나오는 호머의 <일리아드>와 <오딧세이>에서 볼 수 있다. 이 글은 기원전 8세기에 쓰여진 작품으로 이를 통해서 우리는 이 시기에 이미 어느정도 짜임새 있는 음악이 가능했으며 그것을 연주하고 즐기는 일이 일상화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의 그리스 음악은 아직 전문 작곡가와 연주가의 구분이 없고 말과 음악이 합쳐진 형태였다. 즉 그리스 언어구조상 긴발음과 짧은 발음을 변화있게 짜 맞추어 다양한 박자를 만들어 내고 거기에 여러 가지 틀을 갖춘 긴발음과 &#51686;은 발음을 변화있게 짜 맞추어 다양한 박자를 만들어내고 거기에 여러 가지 틀을 갖춘 선율을 붙여 노래부르는 사람이 그때 그때의 상황에 맞추어 적절히 변형해 가며 부르는 즉흥연주의 형태를 띠고 있는 것이다. 우리 나라의 시조창처럼 시와 음악이 따로 구분 되지 않는 형태였는데 기원전 5세기경부터 악기음악이 따로 연주되면서 말과 음악이 둘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그리스인들은 여러 신에 대한 제전에 각각 상반된 음악을 사용하였는데 아폴신을 위한 제전에는 ‘키타라’나 ‘리이르’ 같은 현악기를 사용하면서 경건하고 단순하며 정적인 연주로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세계를 관조하는 듯한 느낌의 음악만을 사용함으로써 그리스 정신의 일반적인 특징으로 일컬어 지는 ‘고귀한 단순성과 정적인 위대함’을 잘 드러내고 있다. 이에 반해 분출하는 생명력과 본능적인 정열을 상징하는 풍요의 신인 디오니소스를 위해서는 열광적인 춤과 음악을 동반하는 광적이고 원시적인 제전을 열고 ‘아울로스’라는 피리형태의 관악기를 사용하여 열정적이고 관능적인 색채를 띤 음악을 사용하였다. 디오니소스를 위한 축제는 추수가 끝난 11월부터 네차례에 걸쳐 열리는데 사람들은 제단이 있는 광장에 모여 악기를 연주하고 춤을 추며 노래를 했다. 이때 사람들이 모여 춤추는 곳을 ‘오키스트러’라고 불렀고 구경꾼들을 위해 광장을 중심으로 반원형의 객석을 마련하였다. 이러한 형태가 점차 발전하면서 연극적인 형태를 띠게 되자 ‘오키스트러’라는 말은 무대앞의 공간에서 연주하는 악단을 일컫는 말로 변하게 되었다. 따라서 그리스 연극의 이러한 형태가 훗날 오페라라는 독특한 음악양식을 탄생하게 하는 중요한 모티브가 되었다. 즉 그리스 문화에서 서양음악에 중요한 영향을 준 또 하나의 문화는 연극인데 그리스 연극은 시, 연극, 노래가 합쳐진 종합예술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그리스인들은 혈기에 충만하고 신비적이며 내세적인 동시에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며 지적인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이성과 감정 사이에서 많은 갈등이 있었는데 아폴로 제전과 디오니소스 제전에서 보는 상반된 음악적 표현이야 말로 바로 이런 그리스인의 갈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플라톤은 그리스인의 축제에 사용되는 음악들이 너무 난잡하고 시끄러워 사람들을 방탕으로 이끌 위험이 있다고 경고하면서 음악이란 조용히 명상하는 요소가 앞서야 된다고 주장했으며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이라는 글을 통해서 예술의 본질과 가치에 관해 언급하면서 당시의 음악에 관해 악기 연주자들이 너무 기교에만 흘러서 환상적이고 복잡한 음악만을 즐기는데 노예나 동물까지도 즐길 수 있는 그런 음악을 해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이는 당시의 음악이 대단히 관능적이었음을 의미하는데 초기의 신을 위한 건전한 의미의 축제가 세월이 갈수록 환란위주로 바뀌는 과정에서 그리스 민족사회를 묶어 주던 중요한 예술이 제 모습을 잃어가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또 다른 측면으로는 고대 그리스의 민중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독특한 다른 음악문화를 즐기고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도 하겠다. 이러한 그리스의 사회적 상황을 볼 때 그리스에서는 대단한 음악 문화의 발전이 있었으리라 짐작되는데 이를 더욱 강력하게 뒷받침해 주고 있는 것은 그리스 철학자들이 음악에 관한 많은 논의들을 남겨놓았다는 사실이다. 기원전 6세기경에 이르러 비로소 음악이 신비적인 영역에서 벗어나 과학적 연구의 대상이 되었는데 이러한 작업은 피타고라스 학파에 의해서 처음으로 이루어졌다. 그들은 물질의 본질을 수(數)에서 찾음으로써 음악이 인간의 심성에 미치는 영향도 수적관계에서 찾으려 하였다. 음악을 현실적이거나 감성적인 것이 아닌 세계법칙성의 상징으로 파악하고 훗날 음향악의 기초가 된 길이가 다른 여러 줄에 의해 음도 달라진다는 ‘현(鉉)에 의한 음정의 비례법칙’을 발견하였다. 또한 음향현상을 천체의 움직임에 비유하여 천문학적인 도식을 만들었는데 각각의 별들이 지구와의 거리에 따라 이에 상응하는 음을 낸다는 것이다. 이는 동방의 우주론과도 비슷한데 별의 운행속도나 거리, 사계절의 변화, 해와 달의 주기, 탄생과 죽음같은 자연현상을 음악과 관련지워 생각한 것이다. 이에 따르면 하늘의 별들은 각각 독특한 도덕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특정한 패턴의 음악적 선율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 이로 인해 어떤 선율을 사람이 듣느냐에 따라 도덕적 특성이 다르게 전달되어 성격에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기원전 5세기경의 위대한 음악이론가인 다몬에 의해 계승되는데 그는 음현상을 윤리적인 의미로서 파악하였다. 다몬은 어떤 특정한 음이나 선법, 선율이 각각의 선율에 상응하는 인간의 심성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고 믿었다. 즉 아름다운 노래와 춤은 인간을 아름답게 만들지만 그 반대의 것은 반대의 영향을 준다고 믿음으로써 음악과 어떤 특정한 마음의 상태사이에 놓여 있는 직접적인 사히심리적 연관성을 찾아 내려고 하였다. 이러한 믿음은 후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 이르러 절정기를 맞게 된다. 이 무렵은 그리스가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했던 시기로서 전제적인 오리엔트 체제에 대한 자유로운 그리스 체제의 승리를 누리면서 안정된 그리스적인 자유와 화폐경제를 기반으로 부를 축적한 시민계급이 성장하였다. 이들의 성장은 새로운 정신혁명의 물질적 토대가 되었는데 절대 불변하는 진리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으며 인간의 능력과 이성의 판단을 중요시하는 소피스트들이 출연하였다. 그들은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는 프로타고라스의 말처럼 이성의 힘으로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다고 믿었다. 기원전 5세기말부터 4세기 초엽에 나타난 이러한 철학적 사고는 그리스 음악양식에 일정한 변화를 가져왔는데 귀족주의적 이상에 얽매여 단순한 형태를 고수하던 리듬이나 선율이 보다 자유롭고 가정표출을 허용하는 이러한 변화는 민주사상과 휴머니즘에 바탕을 둔 소피스트 철학의 음악적 반영이었다. 이러한 그리스 음악의 특징은 르네상스시대의 예술가들이 성취하고자 애썼던 그들의 예술적 목표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 시기에 잠시 누렸던 음악의 자유는 플라톤의 등장과 함께 다시 귀족주의적 이상의 틀속에 갇혀 버리고 만다. 플라톤은 당시의 정치적 현실에 실망하여 ‘이데아’론 이라는 극단적인 관념론을 표방하는데 그에 의하면 미(美)란 시공을 초월한 절대적 진리로 현실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닌 이데아라는 초월적 세계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그리스가 시민이라고 부르는 특권계층과 많은 노예, 이민족이 어울려 구성된 사회임을 상기할 때 플라톤이 주장하는 시민으로서의 덕목이란 결국 노예와 이민족을 제외한 특권계층의 이상에 부합하는 것으로 계급의 분화와 노예제도, 그리고 이에 대한 지배를 합리화하는 수단으로 작용하였다. 그는 음악이 냉정과 절제, 용맹과 침착성이라는 귀족주의적 덕목을 키우는데 가장 적합한 것이라고 생각하여 음악의 교육적 측면을 강조하였다. 그는 듣는 사람의 영혼에 혼란을 주는 복잡한 리듬이나 음계의 사용을 금하고 새로운 음계를 수입하는 사람은 국가의 기강을 어지럽히는 사람으로 간주하였다. 악기는 되도록 단순한 형태여야 하고 비탄조의 곡조는 금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즉 플라톤에게 있어서 음악이란 즐거움의 수단이 아니고 정신적 교육수단으로서의 의미를 갖고 있었으며 음악을 예술이 아닌 질서의 이념으로서의 형이상학적인 의미로 파악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과 달리 음악의 즐거움을 인정하면서 실제음악에서부터 그의 논의를 시작하였다. 그는 음악을 예술로 파악하면서 음악의 다목적성을 주장하고 이에 따라 음악을 윤리적인 것과 실제적인 것, 경험적인 것으로 구분하면서 각각의 목적에 맞는 음악을 사용하도록 권하였다. 그러나 그 역시 아직도 음악의 윤리성과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몬과 플라톤의 정신을 계승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음악이란 어떤 특정한 영혼의 상태를 모방한 것이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 어떤 특정한 영혼의 상태를 모방한 음악을 들으면 실제로 그러한 성격의 사람이 된다고 생각하고 극기, 인내, 절제, 용기를 모방한 음악을 권장하는 등 음악의 교육적 용도를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반음과 온음의 연속적인 결합에 불과한 그리스의 선법에서 각각 고유한 성격적 특성을 도출해내려 애썼으며 이를 규정화하려 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예술창조행위를 인간의 인식활동의 하나로서 매우 지적인 행위로 파악하고 그속에는 일정한 규범과 법칙들이 내재되어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그는 창조과정을 윤리적인 용어가 아닌 기술적인 용어로 설명하는데 창조과정에 대한 이러한 인식의 변화(창조과정이 인간의 지각능력 밖에 있다는 생각에서 올바른 통일성과 조화의 원리에 따라 구성되는 지적행위라는 인식으로의 전환)는 곧 헬레니즘의 도래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기원전 4세기 알렉산더는 고대 이집트를 정복하고 알렉산드리아라는 도시를 건설하였는데 이 도시를 중심으로 고대 이집트 문명을 비롯 동방의 문명까지 한데 어울리며 차츰 그리스 문화권으로 재창조되는 등 고대그리스 문화의 황금기를 맞게 되었다. 알렉산더에 의한 그리스제국의 건설은 피정복인과 융화정책을 필요로 하였고 이는 결국 그리스인의 폴리스 성원으로서의 공동체 의식을 약화시켰다. 따라서 이제 사람들의 관심은 개인적 행복과 이익의 추구에 있었으며 이로 인해 헬레니즘 문화의 두 특징인 개인주의와 세계시민주의가 대두되었다. 헬레니즘 시대에 음악은 시로부터 독립하여 독자적 예술로서의 위치를 갖게되는데 전문 연주자 집단이 등장하는 등 그간의 음악적 특성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따라서 이러한 음악형태의 변화는 그때까지 사람들을 지배하던 음악에 대한 관념적 사고에 변화를 주어 필로데무스는 선율 그 자체는 아무런 도덕적 가치를 갖고 있지 않다고 파악하고 이제까지의 음악이 시와 결합된 형태였기 때문에 가사로 인한 도덕적 효과를 마치 음악에 의한 것으로 착각했을 뿐이며 시와 음악이 분리된 이상 이제 음악은 더 이상 도덕적인 것도 신비로운 것도 아니라고 주장했다. 로마는 강건한 시민정신과 막강한 군사력, 그리고 치밀한 조직력을 바탕으로 엄청난 제국으로 커나갔다. 이 과정에서 그리스인들은 예술을 시민이 직접 주도했던데 반해 로마인들은 주로 식민지의 통치에 전력을 기울였고 예술은 노예들에게 맡겼다. 그러나 로마인들은 대단히 음악을 즐기는 민족으로 시간과 공간의 제약없이 항상 음악이 세계의 중심지로서 타지역의 문화가 쉽게 전파되어 들어올 수 있었는데 음악에 있어서 가장 큰 발전을 이룬 그리스의 음악도 그때 로마에 광범위하게 전해졌다. 이 두민족 사이에는 음악에 관한 생각의 차이가 있었는데 그리스인들은 그들의 문화를 넓은 지역에 전파하며 헬레니즘 문화를 꽃피운데 비해 로마인들은 다른 지역의 문화를 수용하는데 그쳤으며 또 그리스인들은 음악이 인간의 정신에 어떻게 작용하는가 하는 음악의 이론적인 면에 관심이 많았던데 비해 로마인들은 음악을 어떤 때에 어떻게 써야 좋은지에 관한 음악의 실용적인 면에 더 많은 관심을 두었다. 음악수용에 관한 이러한 차이 때문에 음악에 관한 로마의 공헌은 악기의 발전에 있는데 로마인들은 다른 나라에서 들어 온 악기를 여러모로 개량하여 오늘날 음악사에 중요한 몇가지 악기를 만들어냈다. 바로 오르간, 트럼펫과 호른형의 금관악기들이 그것인데 이는 로마가 큰 나라로서 거대한 행사를 많이 치루어야 하는 필요의 결과였다. 또한 로마의 음악 소비량이 점점 늘어남으로써 그만큼 직업적인 음악가의 수효도 증가하였는데 직업음악인들이 최초의 노동조합을 만든 것도 이때라고 한다. 로마예술의 특징은 그 양적인 풍부함과 시각적인 장대함에 있었다. 통치자들은 대규모 야외극장을 건설하고 대규모 야외극장을 건설하고 대규모 음악경연대회를 개최하는 등 양적인 문화 정책을 펴 나갔는데 이는 실상 로마제국의 말기에 오는 자기모순을 감추려는 우민화정책의 일환이었다. 전쟁과 질병, 그리고 노예제도의 붕괴 등으로 황폐해진 로마제국 말기에 등장한 신 플라톤주의자로 분류되는 플로티노스는 인간의 감각으로 파악되는 미(美)란 저급한 것이라 믿고 미(美)의 육체적 감각을 멸시하는 금욕주의의 신봉자였다. 이 시대의 철학자들이 플라톤의 세계로 돌아간 것처럼 민중들은 다시 마술과 미신이 지배하는 신비의 세계로 돌아갔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은 그대로 음악에도 영향을 주어 초기의 마술적인 영역으로 음악을 돌려 놓았다. 고대의 음악사상은 신화와 도그마에서부터 출발하여 과학적 진리와 윤리적 규범의 시대를 거쳐 다시 신비주의의 세계로 돌아왔다. 현실적인 것과 이성적인 것을 거부하고 내세적인 것을 추구했던 이 시대의 말기적 상황은 기독교 정신으로 대표되는 중세의 시작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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