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3 | [서평]
「한국에서의 자본주의 발전 - 시론적 분석」
서울과학연구소. 경제분과, 새길
지역사회연구모임
(2004-01-29 11:56:52)
1.
1980년대 중반 이후 우리 사회의 성격 및 발전단계, 사회변혁의 주체, 대상 및 과제를 둘러싼 이른바 ‘사회구성체논쟁’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여러 차례 구도변화를 겪으면서 수년간 계속된 이 논쟁은 실천과 이론의 결합을 통한 과학적 변혁이론의 수립에 기여한 바 크다. 그러나 다른 한편 이 논쟁은 ‘운동의 대중화’라는 측면에서 보면, 지나친 추성성과 이론 지형성으로 인하여 그 논리 전개의 화려함에 비해 그다지 생산적이지는 못했다는 비판도 강하게 받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더욱이 90년대에 들어서면서 한국사회구성체논쟁은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다. 즉, 사회주의권의 몰락이라는 국제변혁운동사에서의 급격한 변화에 고무된 다양한 수정이론들이 80년대적 변혁이론의 기초를 부정하고 나선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논쟁의 국면을 우리가 ‘90년대적 논쟁’이라 부를 수 있다면, 이것은 (그 논쟁의 구도야 어떤 것이든) 기존 변혁진영의 정책부재에 대한 질책을 포함하고 있다 할 수 있다.
최근 이러한 도전에 직면한 기존 변혁이론진영의 새로운 대응이 시도되는 바, 그것은 이들이 더 이상 이론적 자기 완결성에 집착하지 않고 한죽자본주의의 성격 및 발전과정에 대한구체적, 실증적 분석에 집중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처럼 이론의 구체성을 획들하려는 노력이 일련의 성과로 제시되고 있는데, 그 대표적인 한예가 최근에 출판된 『한국에서의 자본주의 발전-시론적 분석』(서울사회과학연구소 경제분과, 새길, 1991 ; 이하 ‘서사연’, 『한자발』로 약칭)이다.
2.
이 책을 저술한 서사연은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독점강화/종속심화’ 명제로 정리되는 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론적 입장을 대표하는 집단이며, 이 책의 서술도 기본적으로 이러한 관점에 입각한 것이다.
이들은 “제국주의 시대의 자본주의 발전의 보편성을 지배적 자본주의와 종속적 자본주의라는 두가지 유형적 특수를 통해 발현되는 것으로 간주”하는데, 이럴 경우, 한국과 같은 식민지 종속형 자본주의사회에서의 주요한 연구과제는 “자본주의의 발전이라는 보편적 과정이 한국사회에서 관철되는 특수성(=보편의 특수화로서의 구체적 보편)에 대한 해명”이 된다.
한편 “자본축적과정에서 심화되는 자본주의의 내적 모순이 구체적 현실 속에서 관철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폭발하게 되고, 이를 통해 한편으로는 자본이 자신의 축적기반을 재정비하고 새로운 축적의 활로를 개척하며 동시에 자본주의의 기본 모순을 확대 재생산함으로써 이행의 필연성을 드러내는 계기”로서의 자본주의의 위기에 주목하는 위기론의 관점이 이들의 한국자본주의 발달사 서술에 있어서의 기본관점이 되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서술된 이 책은 18세기 이후 1980년대까지의 한국자본주의의 발달과정을 식민지 이식형 자본주의의 성립-식민지자본주의의 위기와 신식민지 자본주의로의 재편-신식민지자본주의의 위기와 신식민지파시즘을 매개로 한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로의 성장전화-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의 위기와 그 반동적 재편 및 민중민주주의 전망의 현실화의 과정으로 파악하고 있다.
3.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위기론의 관점에서 한국자본주의 발달사를 서술하고 있는 이 책은 전체 4부로 구성되어 있다. 즉 8.15를 분기점으로 하여 그 이전은 ‘제1부 봉건사회의 해체와 식민지자본주의의 발전 : 8.15 이전’, 그리고 이 이후는 ‘제2부 신식민지자본주의의 발전과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의 확립’ : 8.15 이후-1970년대‘에서 다루고 있다. 그리고 제3부에서는 ’1980년대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의 반동적 재편과 민중민주주의적 전망‘을, 제4부에서는 ’한국자본주의 연구의 이론적-실증적 쟁점‘을 다루고 있다.
이 책의 서술의 기본관점을 다른 입장들과 자세하게 구별하고 있는 제4부는 일단 논외로 하고 앞의 3부의 구성을 다시 보면, 내용의 특성상 제2부는 다시 두 개의 장으로 나뉘어진다. 그 중 첫째장은 8.15에서 50년대까지를, 둘째장은 60~70년대를 다룬다.
이 책에 의하면 한국사회는 농업생산력의 발전과 상품유통의 발전을 통하여 봉건사회의 틀 속에서 일정한 내재적 발전(=자본주의의 싹)을 이루지만, 그러한 내재적 발전의 토대 위에서 산업혁명을 통해 자본주의화를 이룬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내부적인 자본주의적 축적이 미약하고 부르조아지의 성장도 불충분하여 부르조아적 변혁을 통한 자본주의화를 이루지 못한 상태에서, 제국주의의 침략으로 내부적인 자본주의 발전의 싹이 억제되고 이식자본에 의한 자본주의 발전의 길로 나아가게 된다. 이처럼 봉건적 제사회관계가 철저히 해체되지 않은 채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제국주의국으로부터 이식되어 발전하였고 더욱이 그것이 식민지라는 조건하에서 발전하였기 때문에 한국에서의 자본주의 발전은 기본적으로 제국주의 자본 및 국가정책에 의해 규정되는 식민지 이식형 자본주의가 된다.(제1부)
그런데 8.15를 통해 (구)식민지 자본주의체제는 위기를 맞게 되고, 해방공간에서 민족국가의 수립 및 발전을 둘러싼 민족적, 진보적 세력과 반민족적 반동적 세력간(=‘혁명적 민주주의의 길’과 ‘신식민지 자본주의의 길’)의 첨예한 계급투쟁의 결과 일제하의 식민지자본주의는 신식민지자본주의로 재편된다. 또한 한국전쟁은 남한내 계급구도의 근본적 재편을 완성시키는 동시에 향후 자본주의적 발전의 방향을 고정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어 50년대에는 미국의 원조물자와 이익의 배정을 독점하고 있는 국가권력에 의해 관료자본이 형성. 발전되는데, 50년대 말 삼백산업에서의 과잉생산과 원조의 중단으로 말미암아 신식민지 자본주의체제의 위기가 발생하게 된다(제2부 1편). 50년대 말의 축적위기를 계기로 하여 폭발한 4.19와 이에 대한 반동적 재편으로 성립한 5.16을 통해 신식민지 파시즘체제가 성립하게 된다. 이후 60~70년대에는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가 현실화되는데, 70년대 초 전태일의 분신으로 상징되는 자본주의적 모순의 심화와 자본축적의 위기에 대응하여 독점자본과 국가의 단일 매카니즘으로의 융합을 통한 신식민지국가 독점자본주의체제의 확립을 완성시키게 된다(제2부 2편). 한편 70년대 말에 이르러 외자의존. 수출도형 중화학공업화를 기축으로 하는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 축적구조는 세계경제의 침체와 더불어 과도한 중복투자와 생산과잉으로 공황을 맞게 되고, 국가권력의 일시적 공백과 민중세력의 거대한 저항을 맞아 국가는 체제의 폭력적, 반동적 재편을 시도한다.
4.
앞에서 간단히 요약해 보았듯이 이 책은 위기론의 관점에서 한국 자본주의 발달사를 ‘자본축적의 위기 및 재편’의 과정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의 필자들은 그러한 실증의 작업을 새로운 자료의 발굴을 통해서가 아니라 기존 연구들의 성과를 종합하면서 시도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 책은 스스로 인정하듯이 ‘시론적’인 것이며, 각각의 시기 및 부문에 대한 보다 체계적인 검증의 작업은 여전히 이후의 과제로 남는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우리는 토론의 과정에서 이 책이 지니는 몇가지 문제들-예컨대, 본원적 축적의 시기문제,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의 상부구조로서의 신식민지파시즘의 성격에 관한 문제, 그리고 이행의 물적 토대와 관련하여 종속성이 지는 문제 등-은 여전히 논쟁적이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최근 이들과는 약간씩 다른 입장에서는 이론진영에서도 의욕적인 실증적 작업의 성과들이 출판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서, 이러한 작업의 긍정적 측면에 더 주목하고자 한다.
사회주의의 중심부에서부터 새롭게(?) 제기된 사회민주주의적 조류 및 포스트 모더니즘, 포스트 맑시즘 등 각종 ‘후기적(post)' 또는 ’해체주의적‘ 경향들의 대두가 우리사회 내부에서도 이젠 낯선 것만은 아니다. 이것은 다시 90년대적 ’논쟁의 시대‘를 예고하는 신호로 여겨지는 바, 여기에 대한 적극적 대응이라는 측면에서도 구체적 실증적 연구는 시급한 과제라 아니할 수 없다. 구체적 현실에 대해서 열려진, 그래서 오히려 탄력적인 변혁이론의 수립은 이제 진보적 이론가들 모두의 과제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