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사기의 혜택을 받지 못하던 70년대초 서슬퍼런 유신체제가 싹트고 있던 때 이 책의 영역본을 겨우 빌려 볼 수 있었던 것은 나의 생애에 일대 행복이었다.
제 1장, 2장을 어렵게 어렵게 도움을 받으며 우리말로 옮겨 나누어 읽었던 친구들이 오늘도 이 시대의 변혁의 일꾼으로 살아가고 있다.
「억눌린 사람들의 교육」이라는 원제가 계급투쟁을 선동하는 악서로 오도되었고 이 땅에서 ‘의식화’-아마도 유신체제 이후 가장 금기시됐던-라는 말의 출처가 되는 이 책은 본래 교육적 변증의 목적으로 남미 브라질에서 문화운동이 일으킨 성인문맹퇴치활동의 열매에 대한 교육평가서이기도 하다.
브라질은 16세기에서 19세기초에까지 포르투가르이 식민통치권력을 축으로 하여 대지주, 가톨릭교회, 황실에 의한 민중의 수난사로 점철되어 왔다. 군대의 반란으로 공화국이 설립된 이후에도 정치경제의 권익은 신장되기는커녕 지배자들의 분할, 조종, 수탈에 의해 철저하게 유린 당해왔고 1920년대 경제공황은 브라질 민중에게 참담한 삶을 살게 하였다. 프레이리는 이 시대에 태어나 극한적 굶주림을 경험한 바 있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민중의 무지, 무기력은 기나긴 억압의 결과로 그 중에도 ‘교육제도’는 이러한 ‘침묵의 묵화’를 영속화시키는 도구일 뿐이었으며 학습자들이 세계에 대해 비판적으로 인식하고 그 세계를 변혁하는 동시에 스스로를 개조하는 작업을 고무시키기는커녕 기존체제에 길들여지도록(domesticate)부채질 했다고 프레이리는 주장한다. 기왕의 교육제도-유치원에서 대학원에 이르는-는 억업자들이 바라는 수동적인간, 곧 세계와 사회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 비판의식이 거세된 인간을 양성하는데 공헌하였으며 이러한 교육은 소위 ‘은행저축식교육(banking education)'에 의해 완결되고 포장된 지식을 교사에게서 받아 삼키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교육은 우리의 교육처럼 교사와 학습자 간의 비인간적 간극을 촉진시키는 것이었다. 이러한 기존 교육론에 대한 대안으로서 프레이리는 ‘문제제기식교육(problem posing education)'의 정당성을 주장한다.
현실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함으로 세계를 폭로하고 비판적 인식과정은 해방과 인간화를 목표로 하는 이 과정은 인간으로 하여금 주체가 되게하여 억압하는 세계를 변화시키는 실천적 활동과 이 실천에 대한 비판적 반성으로서의 이론 사이에 통일이 이루어지게 한다. 실천과 이론, 행동과 반성사이의 통일을 프락시스(praxis)라고 부르며 이러한 프락시스 과정의 전체를 ‘의식화(Conscientizacao)'라고 하였다.
이러한 참신한 시대적 소망을 불러 일으킨 저서는 이 따의 뜻있는 良心으로 하여금 자신을 구속하고 억압하는 세력에도 불구하고 70-80대의 사회변혁의 선구가 되도록 하는 힘이되었다.
최근 몇 년동안 참교육의 고난 받는 교사들을 매도하였던 교육당국은 그들이 중립적 입장을 갖지 않았다는 것을 이유로 내세웠다. 그러나 프레이리는 이 저서를 통해 천명한다. ‘중립적인 교육이란 결코 있을수 없다’고 그러므로 교육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기존체제를 유지하게 하는 수단이 되든지, 아니면 사람으로 하여도 세계를 인식하고 그것을 변혁시키는데 기여하든지 둘중의 하나일 수 밖에 없다.
그의 「페다고지」를 비롯한 저서들이 이미 고인이 된 채광석 선생들의 노력으로 우리말로 옮겨진 책들의 일독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