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3 | [신귀백의 영화엿보기]
보편적 문제의식 외면한 청소년 영화, 그 한계점
장세진․방송평론가
(2004-01-29 12:01:30)
우리 영화 이야기를 시작하며
-선택적 문화행위, 우리 영화를 찾는 일-
한 편의 영화관람은 TV드라마를 보는 것처럼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내가 보기 싫어도 가족중 누군가에 의해 비선택적으로 강요당하는 것이 드라마라면 영화는 혼자만의 확실한 의지가 뒷받침되어야 극장을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관람은 이를테면 확실한 의지에 의해서 성립되는 ‘선택적 문화행위’인 것이다.
때문에 우리 영화는 그 ‘몰골’이 처참할 지경이다. 다소의 불만을 가슴에 품은 채 오락일 변도의 드라마를 만나는 사람들도 우리 영화는 시시하거나 재미없다면서 아예 보려하지 않는게 저간의 사정이다. 이제 겨우 국민소득 6천불에다가 정치의 민주화가 노상 과제인 이땅에 살면서 말이다.
하긴 그 말이 그럴 듯 하긴 하다. 우리 영화가 맞닥뜨리고 있는 영세한 자본과 기술, 소재제약과 완성도 부족, 그리고 관객들의 턱없는 외화중독증 등 열악한 여러 환경이 그 원인인 셈이지만 보다 중요한 사실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짊어져야 할, 바로 우리의 몫이라는 사실이다. 더불어 관객이 보지 않는다면 우리 영화는 그들 말대로 영원히 재미없거나 시시할 수 밖에 없음을 상기시키고 싶다.
언제부터인지 정확한 기억은 없지만 내가 우리 영화를 주로 보는 것은 그런 까닭에서다. 인터뷰에 응한 어느 시민이 “국산품은 품질이 나빠 외제 수입품을 쓴다”고 말한걸 TV에서 본적이 있지만 못났다고 내 자식을 양질의 외제로 바꿀 수 없기에 우리 영화를 부지런히 보더라는 지도 모르겠다.
우리 영화를 주로 보기만 할 뿐, 그러나 거기에 대한 전문적 이론과 풍부한 식견이 내겐 없다. 다른 장르의 비평에 미미하게나마 종사하고 있기는 하지만 영화를 평하려는 생각 역시 내겐 역부족일 수 밖에 없다. 굳이 변명하자면 실제비평적으로 접근, 다만 우리 영화를 형식이나 이론에 구애됨 없이 ‘자연스럽게’ 이야기 해보고자 할 뿐이다.
여느 해나 다름 없이 외화가 판치는 신년대목 극장가에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우리 영화가 개봉되었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1989)로 청소년 영화의 새 장을 열고, 정치성 영화 「누가 용의 발톱을 보았는가」(1990)로 소재 영역의 확대를 꾀한 강우석 감독이 만든 「스무살까지만 살고 싶어요」가 그것.
제목이 암시하듯 「스무살까지만 살고 싶어요」는 백혈병에 걸려 생명의 마지막 불꽃을 태우는 18세 소녀 민초희(윤연경)와 음악 프로 DJ(문성근)의 흔치않은 사연을 담고 있는 슬픈 영화다. 무릇 죽음 앞에서 모든 것은 무화(無化)되며, 인간 역시 본성적으로 슬퍼지기 때문이다.
워낙 슬픈 영화라 콧등이 절로 시큰거리지만 내용 자체보다 배우의 실연이 큰몫을 하고 있다. 특히 DJ로 분한 문성근이 초희의 슬픈 사연을 읽어나가는 표정과 대사연기는 일품이다. ‘영화 속의 인물들이 억지 눈물을 짜는 것은 문제’라는 지적이 어째서 나왔는지 모를 정도다.
민주화 투쟁에 앞장서 여러번 감옥살이를 겪은 문익환 목사의 아들로서보다도 연극배우로 잘 알려진 문성근이 영화와 TV드라마 나들이를 활발하게 하고 있는데, 연기자의 생명인 연기력이 내 눈에 돋보이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단, 영화 「베를린 리포트」, 「경마장 가는길」과 드라마 MBC(베스트극장-「문밖에서」를 기준함)
연합통신발 기사를 보면 ‘문성근 정상발돋움’ 이라는 제목에 그의 가능성을 점치고 있는데, 초희의 친구 철수로 분한 최진영 역시 유망주라 할 만하다. 이 영화에서 무거운 분위기를 환기시키는 일종의 통풍구 역할을 그의 코믹한 연기가 대신하고 있는 것이다.
순서가 바뀐 듯 하지만 초희역을 맡은 윤연경이 매스컴의 각광을 받고 있는 모양이다. 그러나 자연인으로 있다가 감독에 의해 전격 캐스팅된 그야말로 오리지날 신인인 윤연경이 청순한 이미지를 풍길지언정 썩 잘해낸 연기로 보이지는 않는다. 앞에서 말했듯 이 영화를 그런 대로 지탱해주는 것은 오히려 문성근과 최진영의 연기다.
가수라고 노래를 다 잘하는 것이 아니듯 연기도 마찬가지다. 강감독은 신인으로 무난한 연기를 하여 만족하다고 밝혔지만 지금 남아있는 장면은 하나도 없다. 10년도 넘은 화면이지만 표독스런 연기의 이미숙(장희빈역)을 나는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짐짓 증오 해보지만 그것마저 깊은 사랑의 다른 가지임을 연기하던 김희애(MBC 「내일 잊으리」)도 이미 4년 전 일이건만 생생하다.
한편 「스무살까지만 살고 싶어요」는 청소년영화일 이유가 거의 없는 것이 문제다. 우선 주제의식과 관련하여 그 문제를 생각해 볼 수 있다. 백혈병에 걸린 초희가 꿋꿋하게 의젓하게 살다가 결국 죽는다는 것이 우리 청소년들에게 과연 어떤 생각을 갖게 할까?
청소년영화로 분류되었고 제목이 「스무살까지만 살고 싶어요」역시 사실 ‘문제’ 투성이인 청소년들의 좌절-방황-자살 등의 이야기가 기대되었다. 그것은 물론 입시위주의 교육풍토와 사회의 구조적 모순 등 이 땅의 병리현상을 질타하는 주제의식을 구현을 전제로 한 전개과정이라고 생각한데서 온 기대감이다.
굳이 생각해본다면 18세 소녀, 음악프로, 학생친구 등 드러난 소재들이 청소년영화인 체하지만 이 땅엔 원천적이고 대중적인 청소년 문제가 산적해있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클 수 밖에 없다. 가장 큰 이유로 ‘환자의 상품화’를 들수 있지 않을까 한다.
왜 하필 백혈병인가? 그것 역시 더러 있을 수 있는 청소년 문제이긴 하겠으나 보편적 공감대의 형성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환자의 상품화를 통한 활로 모색이라는 평가가 가능할 것 같다. 가령 교통사고를 당한 주인공을 내세운 「잃어버린 너」의 흥생성공이 그런 예다.
방학중인 학생 등 청소년을 겨냥하여 개봉한 영화이면서도 그 호응이 기대밖(서울기준 관객동원수는 4만)인 것은 당연하다. 감독의 연출의도가 “그들 나름대로 아름다운 삶을 꾸려가는 모습을 그리려 했다”는 것이지만 백혈병의 소녀가 죽는 모습이 슬프기는 할망정 많은 청소년들의 가슴에 응어리진 ‘한’을 풀어주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청소년 영화의 경우 그들이 가장 심각하게 안고 있는 갈등이 무엇인지를 파악하고, 보다 현실적 진실의 느낌으로 와닿도록 접근해야 한다. 10만명중 1명 있을까 말까한 백혈병환자이야기보다 9만명이 공통으로 느끼고 있는 보편적 문제들을 소재 삼아 재미있으면서도 메시지가 담긴 청소년 영화는 정녕 희망사랑이고 말까?
우리 영화를 꾸준히 보겠다는 나의 의지는 그래도 변함 없지만 주요고객인 학생들마저 폭력이 정당화되는 그렇고 그런 외국영화에 뺏길 것을 생각하니 암담하기 그지없다. 나는 틈날 때마다 관객들의 무조건적 외화선호를 질타하지만 그마저 자신없어지는 것이 바로 이런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