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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3 | [문화저널]
고창 사내마을 마을 굿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생명의 마을
이상훈․편집위원 (2004-01-29 12:02:08)
전화를 했다. 찾아가고자 했던 곳, 고창군 성송면 사내리 사내마을.(고창과 대산의 중간 쯤에 위치해 있는 마을) 아저씨가 받는다. 오늘 (음력 정월 열나흗날밤) 마을굿을 친단다. 그런데 깨끗해야 한다며 단단히 주지시키고는 전화를 끊는다. 마을굿판이 벌어지는 현장에 참여하고자 미리 마을굿을 하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 전화를 했던 것이다. 학교 퇴근후 출발하여 어두컴컴해서야 고창에 당도할 수 있었고 시내버스를 기다리는 잠깐동안 고창고에 근무하는 친구가 함께 해주었다. 그 친구는 함께 하지 못함을 미안해 하면서 입고 있던 두툼한 잠바를 건네주어 따뜻한 마음을 대신 해 주었다. 곧 도착한 시내버스에 몸을 싣고 사내 마을에 당도했다. 마을 길목에는 양쪽에 대나무를 세우고 금줄을 쳐 놓았다. 부정탄 세인들에게 접근금지라고 말하는 듯한 표시로. 금줄은 이곳 길목에만 쳐 놓은게 아니라 마을 중심에 있는 공동우물 그리고 마을로 통하는 모든 길목에 쳐 놓았다. 이는 적어도 깨끗지 못한 사람을 들어오지 말라는 표시이다. 예전에는 마을 외부인 통행을 일체 금할 만큼 마을굿판을 신성한 영역으로 규정짓는 것이 금줄이었다. 머뭇거리면서 카메라 셔터를 누르고 금줄 옆으로 통과했다. 지금의 상황은 옛날과 같지는 않았다. 논가운데에서 동네 몇몇 아이들은 신나게 망우리를 돌리고 있었다. 때로 하늘로 치켜 올라간 망우리통이 떨어질 때면 환상적인 불꽃을 만들어주기도 했다. 멀리서는 풍물소리가 잔잔히 들려온다. 소설 『토지』속에 머물고 있는 느낌이다. 구천이 마을을 내려다 보며 정월 대보름날 당산에서 달집 태우기 하던 모습을 떠올린다. 「“워어이이- 달 나왔다아” 아이들이 달을 향해 소리치면 강아지도 덩달아서 짖어 대었다. 저마다 한가지씩 소망을 품었을 마을 사람들이 달집 둘레에 모여 들면서 불을 질렀다. 훨훨 타오르는 불길, 아낙들은 손을 모아 수없이 절을 했었다. 불빛을 받은 사내들 얼굴은 짙붉게 번들거렸으며 눈은 숯덩이처럼 짙게 빛났었다. 순박하고 경건한 소망의 기원이 끝났을 때 마을 사람들은 장날에 모여든 장꾼처럼 떠들기를 시작했었다…….」 정월 대보름날은 예삿날이 아닌 듯 싶다. 모두가 신을 모셔야만 하는 신성한 날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마을에 동티가 난다. 그런 믿음에서 마울굿은 펼쳐지는 것이다. 아이들은 조금 떨어진 논에서 모닥불을 쪼이고 있고 이야기를 나누는 동네 어른 몇분과 열심히 제물을 장만하는 화주의 모습도 보인다. 화주인 이기성(58세)씨가 제주를 겸한다. 생기복덕에 맞추어 정해진 깨끗한 사람이다. 당산막에는 삼실과, 가조구, 미역, 편 등 고창장에서 보아온 제물이 놓여 있고 화주는 손수 나무로 불을 지펴 밥을 짓는다. 기껏해야 7~8명이 모여 있다. 아이들마저 마을굿에 참여하지 않았다면 아마 허전했을 것이다. 필자는 한 마을 사람의 호의로 저녁을 요기할 수 있었으며 그의 집에서 하룻밤 묵기까지 했다. 시골의 정인가 보다. 11시를 조금 넘길 무렵 몇분의 동네 어른이 더 참여한다. 그러나 꽹맥이 치는 것, 장구 두드리는 것, 징소리 울리는 것 모두가 어색하게 들려온다. 제 맛이 아니다. 힘이 없다. 흥이 나지 않는다. 너무 뜸하게 하는 일이라서 그런가 보다. 이런 모습은 그만큼 이러한 허전함을 알 사람이 없다는 것을 반영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우연히 마을굿판에서 만난 사진작가는 또한 마음을 우울하게 했다. 그는 마을굿에 연출을 가해 보다 세련된 미를 만들려 했다. 그들은 마을굿중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일부의 과정에만 동행했다. 그들에겐 마을 굿 자체보다 몇부분의 멋진 모습이 더욱 필요했던 것이다. 사내마을은 새날이, 사나지 등으로 불렸으며 35호 정도로 구성되어 있다.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 작년에 주택개량시범마을로 지정되어 가옥이 한옥형태로 모두 개조되어 깨끗하고 편리함을 주기는 했지만, 어쩌면 지금까지 마을굿이 이어지는 곳에 기대했던 아늑함이나 풋풋한 시골 농가의 모습을 찾을 수는 없었다. 처음 찾아 굿을 드린 곳은 마을에서 보았을 때 오른쪽으로 두 번째에 위치한 갓을 씌운 할아버지 당산(높이 90㎝, 너비 45㎝ 정도의 선돌로 위로갈수록 좁아지며 그 위에는 둥그런 돌이 올려진 형태)이다. 준비한 제물을 할아버지 당산앞에 차리고, 당산몸체에 금줄을 두르고 제주는 정성스럽게 재배와 더불어 소지를 한다. 마을의 안녕과 풍농, 마을 사람들의 무병장수를 빈다. 간절하게 옆에서 굿을 치는이의 마음 또한 소지의 불꽃처럼 환하게 타오른다. 할아버지 당산 왼쪽에 아들당산(높이 100㎝, 너비 40㎝ 선돌위에 지름 80㎝정도의 둥그런 돌은 올려놓은 형태, 할아버지 당산과 유사하다). 맨 오른쪽 할머니 당산(높이 52㎝, 너비 45㎝의 선돌), 맨 왼쪽 며느리 당산(높이 57㎝, 너비 37㎝ 역시 선돌) 순으로 똑같은 절차의 마을굿이 진행된다. 가운데 2기의 선돌에만 갓을 씌운 것은 남자 신체로 모셔지기 때문이라 한다. 치러진 마을굿에는 신성함보다는 어린 아이들까지도 끼일 수 있는 천진난만함이 있었고, 엄숙함보다는 웃음소리속에 느낄 수 있었던 다정다감함이 함께 했다. 현대판 마을굿의 모습이다. 물론 본래 마을굿을 치루어내는 데는 많은 금기가 따랐다. 가령 제주는 생기복덕에 맞추어 정해지며 부정이 없어야 했고, 제주로 일단 마을회의에서 정해지면 매일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입어야 했다. 심지어 화장실 갈때마다 몸이 더렵혀진다 하여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 입어야 하기 때문에 아예 마을굿 날까지 음식물을 입에 대지 않았다. 혹 마을에 초상이 난다거나 부정한 일이 생기면 마을굿은 연기된다. 외부인의 출입을 금함은 물론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모든 금기사항이 지켜지는 것은 아니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서 여러면에서 변화가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외부인인 필자나 사진작가가 끼어들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그러나 해를 거르지 않고 매년 마을굿이 행하여 진다는 것은 어떤 믿음에서 일까. 그네들에게 당산에 대한 믿음, 신앙이 아직도 짙게 배어있기 때문이 아닌가. 마을의 안녕과 집안이 잘된다는 믿음, 모든 재수복이 여기에 메어 있다는 믿음, 잘되는 것은 당산에 정성을 드렸기 때문이요, 잘못되면 당산을 소홀히 했다는 자책. 마을굿은 1시경에 끝났다. 음복을 하고, 동네 꼬마녀석들에겐 몇 개의 곶감이 돌아갔다. 달은 밝다. 별은 쏟아질 듯하게 많이 있다. 올해에는 진정 정신 똑바로 차리고 우리가 주인됨을 발휘하는 선택을 하고, 상식이 통하는 건강한 사회가 되길 기원하며 내 개인적인 소망을 당산과 휘영청 밝은 달과 쏟아질 듯 많은 별들에게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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