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3 | [교사일기]
두고두고 쓰린 생채기로 남아있는 기억들
박순식․상산고등학교 교사
(2004-01-29 12:03:23)
교단에 선 지 꼭 5년.
비교적 짧은 기간이지만, 그동안에 겪어 낸 이런 저런 일들을 생가하면 물리적인 길이 이상의 많은 세월로 기억되어 진다. 매일 같은 시간에 출근하고, 수업하고, 정해진 시간표에 따라 하루 일과를 마치면 퇴근하고 더러 이직․숙직하고……. 그런 단순한 일상의 연속된 반복이었지만, 그 속에서 대학을 막 졸업한 감수성 예민한 초년교사가 만나야 했던 많은 희비들. -돌아 생각해 보면 대부분, 그게 심각한 갈등으로 밤잠을 못이루던 것이었다 하더라도, 웃어 넘겨 버릴 수도 있겠는데, 도저히 담담한 마음으로는 기억할 수 없는 가름 아픈 기억들이 몇 개 있다. 특히 문제가 있는 부모 때문에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던 아이들에 대한 기억은 내 가슴에 두고두고 쓰린 생채기로 남아 있을 것이다.
차라리 소설이어야 했을 사실들. 아이들의 교육에 가장 적극적이어야 할 교사인 내가 그들의 고통 앞에서 소극적인 동정과 안타까움만으로 마치 관찰자 시점 소설의 서술자 역할 밖에 더는 할 수 없었던, 그 때마다 교사로서 무능함만을 확인하고 참담히 무릎을 꿇어야 했던 일들 몇을 여기 적는다.
주인공이었던 아이들이 나에게 보이는 성난 몸짓과, 일그러진 표정과, 서러운 눈물의 의미를 이땅의 부모된 자 모두가 알아야 할 것이다.
녀석은, 교단에 서던 첫 해에 담임을 맡았던 반의 아이였다. 조그마한 키, 두드러질 것 없는 외모에 약간은 시골티가 나는 지극히 평범한 녀석이었다. 성격이 원만하지 못해 동료들과 가끔 사소한 시비를 붙기도 하고, 비교적 정서가 안정되지 못해 주위가 약간 산만한 게 눈에 띄었지만 특별히 주의를 끌 만큼 모난 짓을 한 적은 없었고, 성적도 그런대로 괜찮은 편이었다.
그가 여름방학이 끝난 뒤로 내리 며칠을 결석했다. 지난 한 학기 내내 결석은 물론이고, 시 외곽의 시골동네에서 통학을 하면서도 지각 한 번 하지 않았던 터라, 그의 결석은 사뭇 의외가 아닐 수 없었다. 더구나 개학과제고사까지 결시하다니. 학생들에게 시험은 이미 목숨줄과 같은 역할을 한 지 오래다. 시험을 망치면 내신 성적이 말이 아니고 그것은 곧 대학 입시에서의 커다란 불이익을 의미하는 것이니 만큼, 대부분의 학생들이 필사적이기 마련이다. 그런 시험을 결시했다는 건 보통일이 아닌 것이다.
몇 차례 전화를 해도 도통 받질 않았다. 이리저리 알만한 아이들을 찾아 수소문해봤지만, 특별히 친하게 지냈던 친구가 없었다는 것만 확인했을 뿐 별무소득이었다.
학생이해자료카드, 교무수첩 등을 뒤적여 녀석의 주변을 살폈다.
보호자와의 관계 : 조부․조모, 보호자 직업 : 농업, … 첫 면담에 부모가 일찍 돌아가시고 조부모와 함께 산다고 했었다. 가슴이 찡하여 위로해준 기억이 났다.
이제 방법은 한 가지, 직접 찾아가는 수 밖에 없었다. 이해자료 카드에 적힌 주소와 약도를 따고, 버스 시간을 알아보는 등 준비를 하고 있던 즈음, 근 70세쯤 되어 보이는 할머니 한 분이 찾아왔다. 주름투성이의 얼굴은 햇빛에 그을려 까말 대로 까맣고, 굽어져서 펴지지 않는 허리를 연신 손으로 두드리며, 내 이름과 담임반을 확인하더니, 대뜸 내 손을 덥썩 잡고서 눈물부터 흘리는 것이었다. 녀석의 할머니였다. 온통 각질만 같은 마주잡은 손의 감촉이 그분의 삶을 말해주고 있었다.
“선생님, 우리 ○○이를 어째야 헌다요? 이날 적금 고것만 걸고 살아왔는디”
“무슨 일이 있습니까?”
“고것이 시방 병원에 입원해 있구만요. 에그, 불쌍한 것. 제 에미 애비꼴도 못보고 커왔는디…”
애가 태어난 지 석달만에 아버지가 병으로 돌아가고 말았는데, 몇 달후 젖먹이를 놔두고 어머니마저 가출해버려 할아버지․할머니가 길렀단다. 가진 재산도 넉넉하지 못해 정부가 주는 구호양곡에 의지하며 몇뙈기 안되는 밭에 포도를 심어 그 수익으로 겨우 학비정도 마련하여 근근이 생활을 꾸려 왔는데, 다행히 애가 건강하고 착해서 돌보는 낙(樂)이 커 재미지기도 했었지만 중학교에 진학할 무렵부터는 두 분이 이미 70이 넘은 상태라 정상적인 노동을 할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책임감 때문에 무리하게 일을 하다가 병을 얻고…그런 환경속에서 고교진학.
“어리긴 하지만 철이 들고나서는 할미 할애비한테 되려 지가 위를 허기도 허고, 일도 잘 도왔지요. 그러던 애가 대여섯달 전 부텀은 통 말이 없고 혼자 밤늦게꺼정 잠도 안자고 허데요. 공부 허니라고 그러는갑다혔는디, 고것이 할애미 할미 생각 절 버리고 간 제 에미 생각땜에 속이 상해 그랬던갑서요. 그러다가 요번 방학때 고 지경이 됐구만요. 내도 지친할머니는 아녀요. 친할머니는 진작 돌아가시고 내가 들어왔는디 내 혈육은 아니지만 보살폈지라우. 가끔 젖먹이를 버리고 간 제어미가 원망스럽기도 했지만 다 지 팔자일턴디 어쩌것어요.”
녀석은 정신병원에 입원하고 있었다. 연로한 데다가 병까지 든 조부모에게 자신은 지나친 부담밖에 되지 못한다는 생각과, 그런 조부모님들의 지나친 기대, 어머니에 대한 증오 등등이 정상적인 심리상태를 깨뜨린 것 같았다.
그날 오후 병원을 찾았다. 무슨 죄인의 취조실같이 썰렁한 면회실로 걸어오는 그의 몸짓이 마네킹처럼 딱딱했다. 초점 잃은 눈, 핼쓱한 표정… 그러면서도 나를 확인하더니 선 채로 눈물만 흘리는 것이었다.
분열증같은 중증의 정신병이 아니고 심한 노이로제상태라 피해의식이 너무 심해서 치료에 애로가 있긴 하지만 치료하면 좋아질 거라는 의사의 설명이었다.
달포쯤 지난 뒤 퇴원하여 학교로 돌아왔지만 표정이 밝아진 건 아니었다. 그날 그의 할머니는 수확한 포도 두상자를 손수 들고 왔었다. 손자가 퇴원한 것을 무척 기뻐하고는 있었지만 포도값이 말이 아니어서 걱정이라며 또 한숨이었다.
이 이야기는 많은 것들중 하나에 불과하다. 이중살림을 하는 아버지에 대한 증오 때문에 결혼을 않겠다고 하던 아이, 교제하다가 헤어져 다른 여자와 결혼한 남자의 아이를 낳아 시집도 가지 않은채 살고 있는 어머니 몰래 아버지를 찾아다니던 아이며, 도벽을 고친다는 이유로 아버지에게 열손가락끝을 촛불로 지짐당한 아이하며…….
인간의 혼을 기른다는 교사, 그러나, 그런 부류의 아이들이 온몸으로 겪는 처절한 고통의 깊이를 알지 못하는 내가 어떻게 그들의 상처받은 혼을 어루만져주기라도 할 수 있겠는가. 오히려 그들이 자신들의 아픈 삶을 통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내게 가르쳐주는 입장인 것이다.
이 글을 읽고 행동거지 하나하나에 자신과 인연을 맺고 있는 여린 영혼들에 대한 배려를 아끼지 않게 된다면 그는 나의 따뜻한 이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