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3 | [특집]
건강한 단합이 건강성 회복의 지름길
김채현․무용평론가․서원대 교수
(2004-01-29 12:04:28)
춤문화의 건강성에 대한 기준은 관점에 따라 여러 갈래로 설정될 수 있다. 우선 생각되는 것은 춤 작품의 관객층이 어떠하든지 간에 그에 상관없이 작품의 내용과 장면이 건전해서 청소년들에게 해악을 끼치지 않고 사회풍속에도 어긋나지 않는 경우로서, 작품에 한정된 이런 평가는 ‘춤 문화’라는 폭넓은 개념을 충족시키기에는 매우 제한적이다. 그렇다면 문화의 범위를 작품에 한정시키지 않고 작품이 생산되고 유통되는 전문인들의 사회로 넓혀 볼 수 있겠고, 이런 전문인들의 사고방식이나 행동양식이 얼마나 논리적이며 합리적이냐에 따라 그들이 속한 문화의 건강성 여부가 판별되기도 한다.
그리고 전문인들의 범주를 좀 벗어나는 경우를 상정해볼 수 있겠는데, 춤이 무용인들만의 것에 머물지 않고 일반 대중들이 접근하는데 부담스럽지 않을 적에 건강한 춤 문화를 어느 정도 충족 시킨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것은 전문인들과 대중들의 협력에 의한 춤의 생산 및 유통 구조를 전제로 하기 때문에 복잡한 논의를 유발 할 수 밖에 없다.
끝으로 이와 아울러 춤이 이른바 예술춤의 전문 공간(오늘날에는 주로 옥내 무대가 이런 전문 공간이다)에서 행해지는 것 못지 않게 일상생활 공간에서 행해질 경우에는 춤 문화는 좀 건강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동안 우리의 춤 문화를 자성(自省)하는 움직임이 무용계 안팎에서 적지 않게 있어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으로 전망된다. 빠르게는 월간지 『춤』지가 창간되던 70년대 중반부터 그러한 견해들이 지속적으로 표명되었으나, ‘80년대 중반 이전에는 대체로 일과성적 지적에 그친 인상이다. 우리의 춤 문화가 건강하지 못하다는 지적은 비로소 근자에 표면화되어 무용계 내부에서 공론화되고 동시에 무용계 외부에서도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는 점을 다시 한번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춤문화의 건강성을 운위하기에는 춤문화의 몸체가 보잘 것 없었던 이전에 비해 이제는 그만큼 탄탄해졌다는 의미뿐만 아니라 거꾸로 춤 문화의 건강성에 역행하는 현상들이 춤의 활성화를 타고서 근자에 올수록 자주 빚어지고 있다는 의미를 내포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춤 문화를 끝내 긍정시하려는 시각이 없지 않다. 연간 수십회의 공연 규모를 완전히 따돌리고 연간 7백여에 이르도록 불어난 춤의 양적 증대나 국시립무용단 등의 설치와 대학 무용학과들의 증가를 통한 제도적 기반확충 그리고 이에 힘입은 예비 무용가들의 증대(대학 졸업자만 해도 매년 1,300명이 넘는다)는 60년대나 70년대의 무용계를 퍽 초라하게 보도록 만드는 일면이 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우리의 춤문화는 설익은 밥 같은 느낌을 주고 따라서 더 다듬어져야 한다는 진단 앞에서 반론을 내놓지 못하는 형편이다. 다시 말해 춤이 활발하게 공연된다고 해서, 예비 무용가들이 는다고 해서 그것이 곧 춤 문화의 풍요를 말해 줄지는 몰라도 건강함을 입증해주는 것은 아니다.
흔히 우리 무용계를 겨냥하여 작품의 질적 수준이 낮다느니 춤 공연장에 일반 관객도 없는데다 그에 대한 대책도 없다느니 춤이 옥내 공연장에 편중되도록 무용인들이 생활춤을 도외시하고 있다느니 무용계 질서가 인맥과 학연과 파벌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느니…하는 등등의 따가운 비판이 자주 내려지는 것을 목격할 수 있다. 이러한 비판이 없을 만큼 온전하면 얼마나 바람직하랴마는 비판이 필요함에도 비판 없이 지나쳤거나 비판이 있어도 무시했던 시절보다 비판이 제기되고 공론화될 수 있는 이즈음의 상황은 미약하나마 바람직스럽다 하겠다. 여기서 우리의 춤 문화가 비판을 감당해낼 정도의 체질로 성장하였음을 짐작하게 되고, 역설적으로 우리 춤 문화가 미구에 건강성을 회복하리라고 예견하게도 된다.
우리 춤 문화의 으뜸가는 현안으로 자주 거론되는 작품의 저수준 문제는 춤 문화의 건강성이라는, 보다 포괄적인 시각에서 볼적에 오히려 부차적인 현안으로 밀려난다. 물론 작품 수준은 전체 춤 문화의 지평 속에서 결정되는 것으로, 그들 사이에는 언제나 일정한 연관성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작품이 대변하는 것은 춤문화의 최종 단계이지 작품에서 춤 문화가 시작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춤 문화의 건강성을 운위 하자면 작품 이전에 춤 문화를 결정짓는 배후 동향을 더 중시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솔직히 말해 무용계에는 의타적 분위기가 배어 있다. 관객이 거의 없어도 초소 기백만원의 경비가 드는 춤 공연이 무시로 열리는 데서 공연 경비가 무용가의 ‘예술적 자력’으로 충당되지 않고 있음을 알게 된다. 서울무용제처럼 공연 경비의 상당 부분을 외부에서 지원하고 상금까지 곁들여지는 공공 행사에서는 담합이 횡행하여 참가단체외 수상작이 미리 결정되었다는 불만이 드물지 않다. 공연 경비의 일정액을 지원하는 민간행사에서는 대개 인맥과 파벌에 의해 참가단체가 안배되고 선정된다는 것은 공공연한 관행으로 굳어진 상태다. 춤 수준의 문제점을 지적받으면 춤을 할 수 있는 여건이 미흡한 탓으로 말머리를 돌려 버리는 습관도 병폐라면 병폐라 할 것이다. 바로 이러한 현상이 세계관 운운하기 이전에 우리 춤 문화가 건강하지 않음을 나타내는 사례임에 틀림없다.
위에 든 여러 가지 건강하지 못한 징후가 이전에도 있었지만 유료 관객이 거의 없이도 춤 공연은 항상 있는 사례를 빼놓고는 문제점 지적이 뒷전의 잔소리 정도에 그쳤던 상황을 넘어 이제는 그런 병폐가 백일하에 드러나는 경우를 경험하는 수도 종종 있다. 이는 무용계의 제반 사안을 눈여겨 보는 객관적인 집단이 존재하고 또 무용가들끼리 지분을 요구할 만큼 목소리가 커진 단체가 늘어나고 있음을 반증한다. 이와 같은 집단이 존재하고 단체가 는다고 해서 그것이 곧 의타적 분위기를 배제하리라고 기대하기는 성급한 일이겠지만 아무튼 무용계의 공공행사가 합리적 관행을 축적하게 되는 효과는 가져올 것이다. 사회 일각의 끼리 끼리 다 차지하는 담합의 양상이 음으로 양으로 심지어 문화계 전체뿐만 아니라 무용계에도 영향을 끼친 바 적지 않았으나 이제는 그런 흐름에 제동을 거는 세력이 출현하기 시작한 때로 보인다.
무용계의 건강치 못한 징후가 무용계 내의 병폐로만 간주되어 서는 아니되는 까닭은 그동안 문화 정책이 서울무용제나 제반 지원 시책을 통해 무용계를 양분시킨 바 컸고 제반 여건이 무용인들이 마음먹은 대로 창작에 전념하지 못하도록 만든 탓도 잇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용계에서는 미약하다고, 이것이 심각한 병폐를 조장한 근본원인으로 지목된다. 낙후한 춤 여건 속에서 춤의 명맥을 이어야만 했던 60, 70년대에 무용인들이 결속해야 했던 것은 당연하고 지금도 그럴 필요가 있다. 그렇지만 알게 모르게 결속이 담합으로 변질하고 담합의 구조 내에서 합리적 판단과 주장이 매도당하고 마침내 창작 정신 마저 실종 당하는 풍토는 무용계를 예술적 유파보다는 파벌로 판가름짓는 부작용을 낳아 왔으며 아직도 무용계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바로 이것이 무용계의 발전을 저해하는 최대의 걸림돌로 보인다. 더욱이 춤 여건이 그나마 호전된 이제 와서 춤 여건 타령만 하면 설득력도 없다.
그러므로 춤 문화의 건강성 회복은 파벌과 인맥이 조장한 정당치 않은 기득권을 포기하는 데서 시작해야 옳을 터이지만 말처럼 쉽게 될 것으로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렇다면 차선책으로 밀실 구조에 연연하지 않는 사람들끼리 연대해서 열린 관행을 축적하는 데서 해결책을 강구하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 이미 무용계는 양적으로 팽창하여 파벌이나 인맥이 이런저런 따위를 독식할 시기가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구태에 젖은 세력이 있어 소위 내분이라 표현되는 갈등들이 표출되고 있다. 이런 갈등은 곧 열린 관행을 갈구하는 세력이 없으면 외부로 표출되기 어려울 것이므로 우리는 춤 문화의 건강성 회복을 위해 열린 관행을 갈구하는 세력들이 그만큼 있다고 본다. 이런 점에서 현재의 무용계 갈등은 춤 문화의 건강성 회복을 위한 진통이라 할 것이고, 올바른 의미에서의 재결속을 통해 춤의 현안(특히 춤 수준의 개선, 생활춤의 정착, 춤 교육의 수술)을 논의하는 시스템이 요청된다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