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인이 소설을 쓰고, 대학에서 소설을 가르치는 작가 우공(우한용 : 전북대 사대 국어과 교수, 소설가0이 첫 번째 소설집 『불바람』이 나온지 한 해 반만에 두 번째 소설집 『귀무덤』을 냈다.
소설을 쓰는 사람이 자기 소설에 대해 또는 일반 소설에 대해 어떤 형식으로든지 말할 자격이 있듯이, 독자는 어떤 작가의 작품에 대해 어떤 형식으로든지 비판할 자격이 있다. 그러나 독자가 작품을 비판하는 자유는, 작가와 작품의 많은 부분과 일치하는 한에서 보장받을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불바람』의 서평을 쓴 평론가 전영태는 소설가로서의 우공을 비교적 올바르게 읽은 것으로 보인다. 전영태는 작가를 두가지 유형, 즉 거미줄을 쳐 나가듯 작품 세계의 영역을 확장하는 방사형 작가와 두더지처럼 특정한 주제를 끈질기게 뚫어나가는 굴착형 작가로 분류한 다음 우공을 전자에 위치시킨다. 우공은 다양한 주제를 시간과 세계관과 언어의 감각의 변화에 다채롭게 펼쳐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양함’ ‘다채로움’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작가 우한용의 작품에서 어떤 일관성을 읽어낼 수 있다. 그것은 우공의 트철한 현실인식이다. “기막힌 이야기를 꾸미지 않아도 좋을 만큼 가파르고 해괴한 일들로 득실”거리는 현실이 그가 바라보는 현실이다. 그러한 현실을 바라보는 소설가의 일은 “시대의 분위기를 전달하고 이루어내는”작업이다. 그가 삶의 밑바닥을 헤집고 다니는 이유는 거기에 있다. 심리적인 현실보다는 사회적인 현실에 치중하는 소설가 우공은 바람이 쓸고간 역사의 현장과 바람벌판의 황량한 현실을 바라보면서, 그 현실과 마찬가지로 쓸쓸해하면서 사회의 모순과 비리를 농축적으로 형상화한다. 그는 작가의 의식이 사회적 현실에 뿌리를 내린 작가이다.
그러나 사회적인 현실을 추구하되 그것이 현장보고서의 성격을 벗어나지 못한다면, 그것은 소설일 수 없다. 소설은 뭐니뭐니해도 삶을 ‘재미있게’ 형상화시킨 것이어야 한다. 거기에는 놀이가 있어야 한다. 우공 역시 소설을 놀이로 파악한다. 지옥에는 놀이가 없다. 악마는 인간 내면에 솟아오르는 생의 충동과 사랑의 환희를 탈취하는 모든 존재에 붙여진 이름이다. 소설이 우리들에게 제공하는 오락은 인간에게 파고드는 순백색 무한정의 악마를 몰아내는 푸닥거리이다.“
우공은 ‘악마를 몰아내는 푸닥거리’속에 소설의 재미를 일궈내면서 현실의 말바닥에 숨겨진 의미를 추적하고 있는 것이다.
현실의 심각한 고문을 피하는 가장 좋은 소설형태는 추리소설이다.
추리소설의 독자는 소설에서 사상적 고뇌를 기대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기 삶에 대한 반성보다는 자기 삶을 그대로 수용하면서 누릴 것은 누리겠다는 세속적인 냄새를 풍기기까지 한다. 속물적인 추리소설 독자는 가정에 파타을 초래하지 않을 만큼만 불장난을 즐기는 춤바람난 여자와 다를 것이 없다. 전통 추리소설은 그러한 독자층을 확보했었다. 그러나 우공은 전통적인 추리소설과는 다른 추리소설을 지향한다. 그는 현실인식을 바탕에 깐 추리소설 형식을 통하여 지적인 게임을 즐기면서, 거기 소설을 통한 인간정신의 고양감이라든지 예술성까지를 추구하려고 한다.
『귀무덤』에는 열 편의 중․단편소설이 모아져 있다. 거기에는 소설형식을 실험하는 소설 <부메랑의 칼날>이 있는가 하며, 휴머니즘이 물씬거리는 소설 <무지개 사육장>에서부터, 한국판 마피아를 소재로 한 소설 <귀무덤>도 보인다. 그리고 영과 육이 함께 온전하기를 꿈꾸는 서해안 사람들을 소재로 한 <물을 더듬는 바람>, 속물 근성에 찌든 현대인을 풍자하는 <나귀목에 솔방울을 달아라>. 또 내가 지금 발붙이고 사는 땅 전주에 대한 온정이 담긴 소설 <객사에 누가 머무는가>는 마치 ‘나’의 이야기인 듯한 착각에 빠지게 하기도 한다. 얼핏 성격을 달리 하는 것으로 보이는 작품들은 현실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공동점을 보인다. 그러나 그 다양한 현실의 모습을 드러내는 작가의 목소리는 고압적이지 않다.
그런 점에서 소설과 우공에 대한 평론가 김영민 씨의 평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 “ 작가 우한용의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대체로 낮은 목소리로 우리들에게 이야기를 전해준다. 그러나 그 낮은 목소리가 우리 귀에 전해져와 가슴속에서 더욱 높고 큰 목소리로 증폭되는데에 그의 소설의 묘미가 있다. 무엇이 건강한 사회적 삶이고, 어떻게 그것을 성취할 수 있는가에 관한 마지막 판단을 스스로 내리게 되는 우리는 그러한 사회를 이루기 위한 책임이 작품을 쓴 작가에게나 작품속에서 이야기를 전해 준 주인공에게나, 그리고 그 이야기를 전해들은 독자인 우리 모두에게 있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낮으면서도 증폭력은 큰 저주파처럼 웅숭 갚은 작가의 목소리를 통하여 우리는 우리시대 삶의 풍경을 발견하게 된다.
“인간 없는 풍경은 장엄함을 자아낸다. 풍경 잃은 인간은 삭막한 욕망에 시달린다.”고 선언하는 우공의 소설은 삶의 풍경을 흔들리게 하는 어떤 바람을 감지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