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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5 | [문화저널]
봄날의 노래
박남준․시인 (2004-01-29 12:11:43)
55. 봄날의 노래 이 봄은 그렇게 내게 왔습니다. 아직 산자락에 지난 겨울의 잔설이 분분한데 양지바른 숲길 한모퉁이 연보라빛 그 고운 색깔 코딱지 나물꽃이 초롱초롱한 꽃망울을 터뜨리며 피어났습니다. 아- 벌써 피어나다니 참 곱기도 하구나 내가 다가가 인사를 건네자 꽃들은 수줍은 미소로 나를 맞이했습니다. 보는이 없어도 꽃피어 납니다. 가장 먼저 봄날을 노래하는 꽃. 문득 입고 있던 겨울옷을 이젠 벗어야겠다고 말하자 그래요 그래요 어서 겨울을 벗고 저 빛살의 봄날을 생명의 기쁨을 온몸으로 맞아 드려요 노래해요 이 봄날을 아 가슴이 벅차 오른다는 말을 이제야 알 것 같은 봄날, 나는 기쁨으로 차올라 훠얼 둥실 하늘로 날았습니다. 꽃을 보며 나는 조금씩 제 자신을 돌아보았습니다. 그렇게도 이쁜 꽃들은 코딱지 나물꽃 이라는 우스꽝스러운 이름을 달고도 조금도 부끄러워한다거나 노여움으로 인해 얼굴을 찌푸리기는커녕 항상 큰 기쁨의 노래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에 비하면 나묵은 밭으로 나갔습니다. 밭을 일구었습니다. 작은땀을 흘렸습니다. 시원한 봄바람이, 산들바람이 저의 몸에 작은 땀들을 식혀 주었습니다. 호박 구덩이와 박 구덩이도 몇 개를 파 놓고 똥거름을 냈습니다. 주황빛 호박꽃에 벌나비가 날아들고 새라는 생명은 참 얼마나 못난 생명입니까 또한 얼마나 어리석기가 그지없습니까 나는 코딱지나물 꽃이라는 이름보다 '가장 먼저 봄날을 노래하는 꽃'이라는 이름이 더 어울릴 것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만 이내 그 생각을 고쳐 먹었습니다. 그리고 먼 먼 옛날 오늘의 저에게 이와 같은 깨달음을 주기 위해 이런 이름을 붙여준 선대의 고마움을 그 호연지기의 마음을 생각했습니다. 낮이면 나물을 캐고 물마시려 밤이면 잠을 잤습니다. 꿈같은 행복입니다. 56. 작은 땀이 솟던 하루 내가 이 곳 모악의 산자락 그 한 골짜기에 떠도는 잠을 정한지도 벌써 일년을 훌쩍 넘겼습리다. 눈 내리는 겨울밤과 치둥 치둥 바람 불며 질척이는 비나리는 쓸쓸하고도 외로움으로 눈물나던 많은 땀들이 지났습니다. 어느듯 봄이 와서 허리 아픈 봄이 와서 저도 이젠 방안에서의 눈을 돌려 들녁으로 나갔습니다. "삼천리 강산에 새 봄이 왔다네 농부는 밭을 갈고 씨를 뿌리네" 들녘은 생명으로 가득 했습니다. 바로 농부들의 허리 아픈 봄이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아 나도 밭을 일구어 씨를 뿌려야지. 삽과 괭이와 호미를 들고 지난 겨울 하얀 박꽃위로 달빛이 내려오는 풍경이 눈에 선했습니다. 저의 집 지붕이 보기 흉한 슬레이트라는 것이 마음에 걸리기는 합니다만 참 초가지붕 위에 하얀 박꽃은 그 얼마나 어울리는 정겨운 풍경입니까 어린 날의 동요가 생각납니다. "초가집 지붕에 새하얀 박꽃이 활짝들 피어서 달구경하지요" 가마솥에 불을 때서 밥을 지어먹었습니다. 따뜻한 방구들에 누우니 절로 잠이 왔습니다. 내일 아침이면 창호지로 기척도 없이 찾아온 햇살이 저의 늦잠을 깨울 것입니다. 그리고 눈을 뜨면 들려오는 새들의 고운 노래 소리, 뜰앞의 맑은 개울물 소리 57. 손바닥빼미 그래도 명색이 채마밭이기는 합니다만 집을 찾아온 사람들은 사람들마다 짤깔거리며 웃음을 금치 못하는 것은 아닌게 아니라 내가 보아도 손바닥만하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그 손바닥만한 밭을 여섯 두럭으로 나누어서 두 두럭은 상치를 두두럭은 열무를 심고 그리고 나머지 두두럭은 딸기 모종을 해 놓았던 것입니다. 소꿉장난을 하는 것처럼 사람들은 저의 집 채마밭이 참 이쁘게도 생겼다고……다음부터는 손바닥빼미가 아니라 손꼽장난 빼미로 이름을 바꿔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정말이지 순무공해로 재배하는 저의 집 채소들이 무성히도 자라는 여름이면 지푸라기로 한단 한단 묶어 남부시장에라도 나가볼까하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그리고 말입니다. 그 무공해 채소로 돈을 사서 시장안의 막걸리 집에 들러 술한잔 또 몇잔하고 간고등어나 한 마리 사서들고 흥얼흥얼 노래부르며 이슥 어둑한 밤길을 휘청거리며 집으로 돌아오는 모습도 그려보았습니다. 흠흠 절로 웃음이 나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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