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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4 | 연재 [문화저널]
겨울여행(4)
박남준․시인(2004-01-29 12:12:44)


짧은 겨울 해가 어스름 저녁놀을 그리는 풍경, 때로 어둠은 저렇듯 반기지 않는 일상처럼 찾아드는 것일까? 해운대역을 출발하여 도착한 이 나라 굴지의 제철공업단지, 포항의 밤은 수십수백의 공장지대를 밝혀 놓은 나트륨 등으로 인해 마치 공상만화 영화에 나오는 거대한 괴물로봇들이 불을 내 뿜으며 검은 바다의 수면위로 떠오는듯한 기괴한 풍경이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일제히 밤을 타고 내뿜는 검은 매연의 불기둥과 수면 가득 번들거리며 퍼져가는 죽음의 산업 폐기물들, 그것은 바로 제철산업의 신화라고 까지 일컬어지는 포항제철이 만들어 그 땅에 사는 사람들과 그들의 산천에 후한 인심을 안겨준 값비싼 선물이었다.
포항은 이제 더 이상 만선의 깃발을 한껏드날리며 넘실거리는 동해의 푸른 바다가 아니었다. 이제 다시는 돌아갈 수 없으리라. 못가리라. 못가리라 그 바다. 그러나 바로 저만큼 공장지대를 가로 흐르는 폐수의 강언덕에 앉아 오랜 갈증과도 같은 담뱃불을 당겼을 때였다. 내가 밟고 있는 발밑에 보이는 것은 풀이었다. 내발밑을 두드리는 아아 바람보다 바람보다 먼저 눕고 끝내는 다시 일어나는 짓밟히고 깨어져도 일어서는 이땅의 풀, 비록 누더기처럼 더덕더덕 먼지를 뒤집어 쓰기는 했지만 그것은 분명 이 엄동의 1월, 추운 겨울에도 그 푸른 기운을 잃지 않고 꿋꿋이 살아있는 것이 아닌가?
생명은 참으로 질긴 것이구나. 눈물겨운 것이구나. 코 끝이 매운 겨자를 맛본 뒷끝처럼 시큰거렸다. 눈을 감았다. 그때마다 내 눈을 비집고 달려드는 것은 폐암으로 사위어 가며 무서운 고통으로 일그러지는 아버지의 얼굴이었다. 도망치듯 내가 포항을 빠져 나온 것은 저 죽음의 매연에 감겨 질주하는 포항의 살풍경을 떠나 아예 그 무엇도 보이지 않는 무저갱의 암흑속이나 아니면 눈부신 햇살과 함께 밀려오는 푸른 동해를 보며 애써 지우며 잊고 싶었다.
어쩌면 그것은 내게 있어서 풀어야할 삶의 문제로부터 도피이리라.
포항 시외버스터미널 앞에 서성거리며 수첩에 붙어있는 조그마한 그나마 반쪽의 분단된 이나라 지도와 버스 노선 시간표를 번갈아 보며 숙박지를 겸한 곳은 영덕게로 유명한 작은 포구, 강구였다. 포구의 강구에는 오십천의 강줄기와 바다가 만나는 사이를 두고 꽤 넓은 다리가 가로질러 마을의 이쪽과 저쪽 언저리를 이어 주고 있었다.
내가 다리 앞쪽에 제법 술렁거리는 포장마차를 두고 건너편의 불빛을 찾아든 것은 운이 좋은 편이었다.
배낭을 내려놓으며 국수 한 그릇과 잔술을 시켰다. 내 또래의 젊은 주인은 나의 행색과 말거지를 살피며 말을 건네왔다. “혼자 여행을 다니시다니 참…전주요? 전라도 전주? 전주 비빔밥이 유명하다는 말은 많이 들었지에‘ 그는 소주안주로 말린 새끼 꽁치가 이 일대의 별미 특산이라며 몇 마리를 군침이 돌도록 구워주었다. 내가 거의 술한잔을 비워갈 무렵 옆자리엔 두 사람의 청년이 자리를 잡고 앉아 술을 청하기가 무섭게 옆에 놓인 예의 배낭을 보고 말을 건네왔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굳이 여관 잠을 잘 필요가 있어요?” 이윽고 두 청년과 권커니 받거니 불과하리만큼의 술순배가 돌아갈즈음 그들은 고맙게도 나의 잠자리를 걱정하며 그들의 집으로 갈 것을 제의했다.
“고마운 말씀이옵지만 생면부지의 초면에 너무 결례가 되는 것이 아닌지요” 나는 그들의 따뜻한 배려로 인해 편안한 하룻밤의 잠자리와 후한 아침식사까지 대접을 받으며 헤어짐의 수인사를 나누었다.
강구의 포구를 따라 많지는 않지만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횟집들의 수족관엔 내가 두팔을 벌려 그 길이를 가늠해야 할 만큼 커다란 영덕게가 두눈을 껌벅거리며 낯선 이방인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강구는 이 동해에서 몇 되지 않는 강줄기중에서도 그 맑은 수면이 단연 빼어난 오십천의 푸른 물줄기가 바다와 만나는 곳이다.

이 겨울, 먼 산 들을 흘러 돌아온 강물의
그 긴 산고를 풀어 놓은 동해강구
포구의 강어귀에 반가움처럼 맞아주는
따듯한 겨울 햇볕 속에는
맑은 강물에 비춰오는 그리운이들의
얼굴이 눈 부셔요

부산히 움직이는 포구의 사람들 곁으로 발길을 돌리자 어제밤 포장마차 주인이 별미라며 건네주던 새기 꽁치를 말리는 건조대들이 눈안 가득히 들어왔다. 이 근방에서는 꽁치를 잡는 방법이 색다른데 마치 거짓말 같기도 했다. 그것은 배를 타고 나가 긴대나무에 “토시”라고도 하고 “진저리”라고도 불리는 해초사이에 두손을 담가 휘젓는다고 한다. 꽁치는 해초사이에 손을 넣고 휘저어 생기는 물방울이 해초위에 불게되면 산란기의 꽁치들이 그물방울을 마치 자기 동족들의 알로 착각을 하여 알을 낳으려 몰려드는데 손가락 사이로 비집고 들어오는 꽁치들을 어깨 너머의 뱃바닥으로 넘기기만 한다면 되다는 것이다. 금(가격)이 좀좋을 때는 한 마리에 100원쯤하는데 한손을 뒤로 넘기며 100원이요 또 다른 손을 뒤로 넘기며 200원이요 이러면서 꽁치를 잡는다는 것이다. 병곡이며 후포, 죽변 동해를 거슬러 북상하는 해안의 곳곳엔 시리도록 푸른 바다와 흰 파도의 모래사장이 펼쳐져 있었다.
이대로 가면 그래 그럴지 몰라.
거진이며 대진, 송현을 지나 저 금강산의 마지막 산자락 외금강이며 원산을 건널 수 있을지도…….
그러나 해안의 곳곳엔 분단 족구의 건널 수 없는 철조망이 가로막고 이 땅을 가두고 저 푸른 동해를 가두고 있었다.
가고 싶은 가야할 땅이었다. 나의, 아버지의 할아버지의 유년을 가로질러 이제는 우리가 가야할 아직은 건널 수 없는 분단의 죄악이되는, 그러나 떨치며 결코 건너야할 맑고 푸르기만한 이 땅의 산천이었다.
내나라 바로 우리들의 땅이었다.
파도쳐 부서져 우는 어쩌면 동해는 그래서 저렇듯 말문을 잃고 부서져 우는 지도 모른다.
파도, 그 속살의 흰 뼈를 드러내며 부딪쳐우는 파도, 분단의 이 깊고도 암울한 질곡의 철조망, 그 앞에 서서 남루한 아픔을 더듬은 사내, 갈곳 없는 파도가 밀려서 밀려와 우는 동해의 그 푸른 바다위로 못 다한 나의 노래처럼 갈매기는 날아와 끼룩 끼루룩 목쉰 울음을 토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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