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5 | [문화저널]
독자를 위한 현대문학이론 입문(2)
러시아 형식주의
이종민․전북대교수․본지 주간
(2004-01-29 12:16:43)
얼마전 우리 『문화저널』 편집위원들은 돌이킬 수 없는 실수로 인하여 매우 난처한 입장에 빠졌었다. '이달의 시'에 실리는 시에 오자를 낸 것이다. 아무리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여도 벗어나지 못하는 실수이기에 새삼스러울 것 이 없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짤막한 시에서 오자를 낸 것이기 때문에 시인의 격렬한 항의에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그런데 사실은 교정과정에서 이것을 발견하지 못했던 것이 아니다. 문법에 어긋나는 문장이 있어 우리 편집위원들도 의아해 했었다. 그러나 시인이 구사하는 심오한 어법에 대한 경외심 때문에 우리는 이 비문법적인 문장이 가능할 수 도 있겠다고 여기어 그냥 지나쳐 버렸다. 무언가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고도의 배려가 이 '낯설은' 어법속에 숨어 있으리라 지레짐작을 했던 것이다. 시에서는 이러 한 일이 결코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아니 오히려 이러한 '낯설게 하기'가 시적 특성의 요체이기조차 하다는, 그것이 바로 '문학성' 이라는, 어설픈 선입견을 우리는 누구나처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러시아 형식주의 문학이론의 출발점이다. '문학연구의 대상을 총체로서의 문학이 아니라 문학성, 폭 다시 말해서 특정한 작품을 문학작품이게끔 해주는 것'에 한정시키는 러시아형식주의자들은 문학과 비문학의 변별점을 그 표현앙식에서 찾는다. 문학작품이란 사회의 반영물이나 '사상의 전장(戰場)'이 아니라 언어의 가공물로서 여러 가지 장치들에 의해, ?상적인 어법을 왜곡한 '낯설은' 표현양식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낯설게하기'를 통해 문학작품은 우리들의 판에 박힌, 그들의 표현을 빌자면 '자동화된', 인식을 방해한다. '새로운 인식의 영역'을 제공해주고 그 인식의 지평을 넓혀주는 것이다.
우리는 일상적인 삶 속에서 "가만가만 어느/살땅김의 잔잔한 끌림과 이 아픔/땅을 향한 겨울 풀들의/모다 뉘인 이 그리움"(김용택 "겨울, 사랑의 편지")과 같은 식으로 말하지 않는다. 우리 시인들 가운데 가장 자연스러운(일상 언어에 가까운) 어법을 구사하고 있는 시인의 작품에서도 이처림 일상적인 표현양식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 표현들을 쉽게 발견 할 수 있다. 이러한 낯설은 표현 양식에 접했을 때 우리의 감수성은 돌연 긴장하게 되고 그리하여 그 함축적 의미가 무엇인가를 곰곰 되새기는 가운데 우리들 인식의 지평과 심도가 넓어지고 또 깊어지는 것이다.
이처럼 독특한 문학성을 작가나 독자의 정신에서가 아니라 작품자체 내에서 찾으려 한 러시아 형식주의는 20세기 초 당시 러시아문학계를 지배하고 있던 역사적, 종교 철학적인 문학 접근 방법에 대한 도전의 형태로 출발한다.
1915년경에 설립된 .「모스크바언어학회」와 「시 언어 연구회(오포야즈)」를 중심으로 활발하게 전개된 이 문학 이론의 중심인물은 아이헨바움, 야콥슨, 슈클로프스키, 토마쉐프스키, 티니아노프 등이다. 처음 이들의 반작용은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고, 다만 경멸적인 의미에서 형식만을 중시하는 '형식주의자들'이라는 칭호만을 얻게 된다. 그러나 1920년대 전반기에 이르러 이론적으로 성숙하게 된 이 이론은 당시의 주도적인 사회주의 문학이론에 대한 심각한 도전으로 간주되기에 이르고 공식적인 비판의 대상이 된다. 1930년경에 이르러서는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결부되어 강제적으로 '진압 당하게'되며 그 이후에는 그 연구 중심지를 체코의 프라하로 옮기게 되는데 그 중심 인물인 야콥슨과 르네 웰렉이 1940년대 이후 다시 미국의 대학에서 강의를 하게 됨으로써 신비평이 지배하고 있던 당시의 문학계에 적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형식주의는 말 그대로 작품의 형식에 관심을 집중한다. 그것은 예술작품을 정치적선전의 도구로 보아 그 정치적 사회적 전언 내용으로 중시하며 그 형식적 특성을 부수적인 것으로 여기던 전반적인 러시아의 문학계에서 돌연변이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역사발전 과정에서 확인되는 작용과 반작용의 원리를 염두에 둔다면 그것의 출현이 결코 돌연변이적인 것이라고 할 수만도 없다. 지나치게 형식을 중시하는 경향이 지배적이면 그에 반발하여 내용의 의미를 강조하는 경향이 대두하게 마련이며 내용만을 앞세우는 경향에 대해서는 다시 형식의 의의를 중시하는 반작용이 자연스럽기조차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러시아 비평사상의 주류로부터의 이탈로 여겨지는 이 형식주의 이론의 출현은 전통적인 '강박관념'에 대한 건전한 반작용으로 평가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19세기 낭만주의의 연속선상에 있는 상징주의에 대한 거긴 반발로 출발한 미래파 운동과 그 궤를 같이한다. 미래파 예술파 들은 모든 19세기적 전통 그 '상식과 고상한 취미'에 선전포고를 한다. 그들은 모든 사회적, 윤리적, 미학적 권위와 규범을 거부한다. 그들은 시의 어휘와 구문과 제재를 혁신시키고, 사랑이나 연애사건과 같은 낡아빠진 '감상적인' 주제, '쓸모 없어진' 문법법칙 등 모든 문학적 인습을 거부하며 이것이 타로 시인의 권리이자 의무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언어의 자기 충족적인 특성을 강조하며, 사물을 지시하는 능력과는 구별되는, 언어가 지니고 있는 독립적인 소리의 유형을 강조한다.
이러한 미래파 예술가들과 마찬가지로 이들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은 작가의 기술적 역량과 기교적 재주를 강조하며 예술가를 '건축가, 기술자, 혹은 십장'으로 간주한다. 이들에게 있어 예술가는 어떤 신비스러운 영감에 의해 자기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강력한 감정'을 쏟아내는, 낭만주의자들이 말하는, 예언자적 존재가 아니다. 예술가는 의식적으로 우리의 인식을 심화시키기 위해 독특한 예술적 장치들을 고안해내야 하는 (20세기 기계시대의) 한 장인에 불과한 것이다. 이러한 예술적 장치란 실용적인 언어로부터 이탈하여 그것을 왜곡시킴 으로써 사물을 다르게 보도록 만들어주는 기교이다. 이러한 기교의 총화가 바로 예술인 것이다.
예술가들은 일상적인 '습관이 냉혹하게 끌어당기는 힘'에 대항하여 싸우기 위해 끊임없이 새로운 기교들을 창안해내야 한다. 상투적인 표현과 그에 따르는 기계적 반응에 '치명적인 일격'를 가해야 하는 것이다. 이처럼 창조적인 변형행위를 통하여 우리의 인식을 날카롭게 해주어야 한다. 그러므로 이들에게 있어 '낯설게 하기'의 기법은 문학적 전위의 단순한 구호가 아니라 문학의, 시의 근본적 목적이며 그 존재이유가 된다.
달리 말하면, 이들에게 있어 작품의 문학성은 "말을 최대한도로 앞에 내세우는 것(foregrounding :前景化)"에 있다. 여기서 "앞에 내세운다"는 것은 어떤 것을 가장 눈에 띄게 하고, 그것을 우리의 지각에서 지배적인 것이 되게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말을 앞세운다는 것은 언어의 지시적인 면과 논리적 관계 등을 "뒤로 물러나게 함"으로써 시를 말 자체로, 즉 음성기호로 "감촉할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을 의미한다.
브레히트의 유명한 '소외효과(alienation effect)'를 연상시키는, 또 그러한 개념 형성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 이 '낯설게 하기'의 기법은 의미를 보충해주는 단순한 장식물이 아니라, 음성학적, 구문론적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의미론적 차원에서도 언어의 전적인 재구성을 수행하는 시의 고유한 특성이다. 즉 이러한 형식적 장치들이 따로 내용의 의미까지를 규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브레히트의 서사극 이론에서처럼 낯익은 실재의 양상들을 낯설게 만들어 관객으로 하여금 작중의 인물이나 주제에 정서적으로 말려들지 않도록 해주는 효과를 이용하여 관객의 비판적 태도를 부추김으로써 사회적 현실에 순응하지 않고 그것에 대항하도록 한다는 정치적 목적을 함축하고 있지는 않다.
이러한 러시아 형식주의 문학이론이 문학을 평가하고 해석하는데 있어 문학 외적인 것에만 비중을 두는 편향에 대해 일정한 궤도수정의 기여를 했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기본적으로 문학이 언어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언어에 관심을 집중한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다. 우리는 흔히 너무도 일상적인-예를 들자면 물이나 공기 같은-것에는 마땅한 주의를 주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핵심적인 것이다. 이처럼 핵심적인 언어에 주목을 한다 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작가가 처한 상황이나 작가의 의도 혹은 그 사상 등은 작품을 이해하는데 있어 무시할 수 없는 배경을 형성한다. 그러나 그것이 결정적으로 작품의 의미를 규정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개연적 상황 혹은 문맥(context)에 불과한 것이다. 작품을 이해하고 평가하는데 있어서는 작품 자체에 대한 분석이 선행되어야 하며 그것을 이루고 있는 언어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인 것이다.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이 신비평가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작품 자체에 대한 꼼꼼한 읽기와 실재비평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이 분야에 남다른 성과를 거두고 있는 것은 그들의 커다란 업적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들이 문학의 언어와 일상적인 언어의 차이점을 강조한 것은 문학이 현실과는 무관한 것이라는 편견을 조장하여 결국은 예술을 위한 예술 혹은 예술지상주의라는 또 다른 편향을 야기 시키고 말았다. 또한 언어라는 것이 이데올로기와 무관할 수 없다는 너무도 당연한 사실이 이들의 언어에 대한 관심에서는 항상 배제되어 있다는 점도 심각한 문제이다. 문학의 언어가 일상적인 언어를 왜곡한 것이라 할 때 이들의 주장 속에는 일상적인 언어도 여러 층위가 있다는 사실에 대한 배려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 이것은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가 하나의 '규범적인'-이데올로기와는 무관한-언어라는 생각, 즉 모든 사회 구성원이 똑같이 사용하는 하나의 공통된 언어가 있다는 환상의 산물이라 할 수 있는 것이. 6공화국의 거대 여당이 자기들 다수의 횡포를 호도하기 위해 '법대로!'를 외치는 것하고 법의 사각지대에서 소외 받고 있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권익을 지키기 위해 메아리 없이 외치는 '법대로! '의 의미가 결코 같을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후에 바흐찐학파가 행한 '언어적 다양성' '대 화적 공존' 혹은 '대화적 상호작용'등의 개념을 동원한 비판은 중요한 진전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은 언어를 추상적인 문법체계나 구조, 중립적인 매체 등으로 이해하는 대신 다양한 사회 언어들의 갈등과 대화의 장, 즉 다양한 세계관들간의 대화와 투쟁의 장으로 간주하여 현실과의 관련 속에서 문학연구를 진척시킨다.
또한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언어가 꼭 무엇을 '지시하는' 아니면 무슨 정보를 꼭 담고있는 의도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도 형식주의자들의 주장 속에서는 고려되고 있지 않다. 우리가 사람을 만나 사용하는 '날씨 좋습니다' 혹은 '어디 가십니까'등의 인사말 등은 무엇인가를 정보를 주고받기 위해 하는 말이 아니다. 답변을 기대하지 않고 그냥 던지는 허투사이다. 우리가 실제 삶의 현장에서 주고받는 많은 말들의 대부분은 사실 이처럼 어떤 지시내용이나 정보 혹은 의도 등을 담고 있는 말이 아니다. 대부분의 언어는 사실 이런 말들의 간극을 채워주는 무의미한 (그러나 전혀 무의미하지만은 않은), 어떤 의미에서는 낯선 것들이다.
문학작품의 평가와 이해에 있어 러시아 형식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작품자체를 중시하는 영미 신비평가들이 오히려 시적 언어의 '자연스러움'을 강조하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 새겨 들을 만하다.
『시의 이해 (Understanding Poetry)』의 서문에서 크레안스 브룩스와 로버트 펜 워렌은 시를 '일종의 말하기'로 규정하여 그 말하는 방식이 부자연스럽고 또 그 말해지는 내용이 현실과는 무관한 것이라는 '선입견'을 공박한다. 시에 있어서 부자연스러운 (낯선 혹은 일상언어와 다른) 장치로 리듬이나 운 같은 것을 흔히 드는데, 이들에 의하면, 리듬은 우리들 모든 삶과 행동의 원리(계절의 변화, 밤과 낮의 반복, 달의 위상 변화, 조수의 교차, 철새들의 이동, 심장의 박동, 호흡 등을 그 구체적인 예를 들면서)라는 것이다. 또한 언어의 습득과정에서 어린이들이 많이 즐기는 말장난은 기실 소리의 운을 이용한 놀이이다. 또 우리가 쉽게 시적인 것이라 여기는 여러 가지 비유들도 일상적인 언어 생활과 무관한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이 신비평가들이 시작품에서 주목하는 아이러니, 패라독스, 애매모호성 등도 우리들 실제 삶 속에서 그것들이 중요한 것으로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지 그것이 '낯설게' 해주기 때문이 결코 아니다.
또 '낯설게 하기'의 기법을 모든 문학 작품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인가, 아니 적어도 그것이 작품의 문학적 의미를 구성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인가 하는 물음도 바로 이어질 수 있다. 형식주의자들의 주요 분석대상이 시작품으로 한정되어 있고 소설의 경우에는 로런스 스턴의 『트리스트람 샌디 (Tristram Shandy)』에서처럼 작가가 끊임없이 개입하여 이야기의 진행을 '방해하고' '지연시키는' 소수의 몇몇 작품에 국한되어 있다는 사실이 이들의 한계를 암시해주기도 한다.
'일상언어에 가해진 조직적인 폭력'을 문학으로 규정하는 경우 많은 리얼리즘 소설이 설 곳이 마땅치 않다. 앞에 든 김용택 시인의 경우에도 그 '낯설게 하기'기법 때문에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유별스럽지 않은 질박함이 농촌의 문제를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게 해주며 이를 우리들 자신의 구체적인 삶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절실한 문제로 느끼게끔 해주는 것이다.
또 하나의 어려움은 작품의 가치평가에 관한 형식주의 사고의 부적합성이다. 예술을 '기법의 총화'로 간주했을 때 작품의 질을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이 애매해진다. 가장 '낯선' 기법을 사용한 작품이 가장 훌륭한 작품인가? 그것이 반드시 가장 커다란 감동을, 혹은 형식주의자들의 말을 빌어, 가장 커다란 '인식의 심화'를 보장해주는 것인가? '낯설음'에 대한 평가도 자의적이지만 그것의 효용성도 읽는 독자에 따라 다를 수 있다. 문학적 관습에 익숙해져있는 사람들에게는 어지간한 형식적 실험도 '낯설게'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열차 시간표를 보면서 열차의 접속관계를 알아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 속에 현대생활의 속도와 복잡성에 대한 일반적인 성찰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는, 어떤 글이든 '시적으로' 읽을 수 있다는, 테리 이글턴의 주장은 이런 의미에서 심각한 비판이라 할 수 있다. 문학성을 특정 종류의 글들이 보여주는 어떤 내재적 성질로 보기보다는 사람들이 글에 '자신들을 관련시키는' 어떤 방식으로 보아야 할 것이 아닌가 하는 그의 반론은 의미심장한 지적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결국 러시아 형식주의 이론은 문학 외적인 것에서 작품의 의미를 찾으려던 주변적 접근방식에 심각한 문제를 제기하여 그러한 편향의 교정에 상당한 기여를 했지만 스스로 문학적 연구방법을 어느 한 부분에 한정시킴으로써 또 하나의 주변적 이론으로 귀결되고 만 셈이다. 낭만적 주관주의나 독단론을 피하기 위해 문학텍스트 자체의 물질적 실재 즉 작품 자체 혹은 그 기법을 분석의 대상으로 한정 시켰지만 그렇다고 해서 보다 객관적인 혹은 과학적인 평가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닌 것이다.
그러나 문학에 있어 언어의 중심적인 위치를 인식한 형식주의자들과, 언어를 유일한 '합법적 준거의 틀', 즉 그 궁극적 실재로 간주하여 진공상태 속에서 '기표들로 하여금 제식무(祭式舞)를 추게'하는 해체주의자들과 혼동하는 평가는 분명 잘못된 것이다. 그들이, 초월적인 심미적 가치에서 문학성의 원천을 찾으려 했던 종래의 문학개념을 거부하고 문학언어에 대한 자연과학적 분석을 통하여 보다 과학적인 문학이론을 정립하기 위해 노력한, 나름으로는 대단히 중요한 역사적 의의를 지니는 비평 흐름이라는 엄연한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렇듯 우리의 러시아 형식주의에 대한 평가는, 다른 것에서와 마찬가지로, 역사적이어야 한다. 그것이 탄생한 역사적 맥락에서 어떠한 의미를 지니며 또 어떤 한계를 노정시키고 있는가, 그리고 그것이 전반적인 문학 연구 혹은 이해에 있어 어떤 의의를 지니는가가 검토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우리의 러시아 형식주의에 대한 평가를, 빅토르 어얼리치처럼, 이 이론의 공정한 반대자인 에피모프의 의견으로 대신하는 것도 이런 의미에서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
"형식주의 학파가 우리[러시아] 문학연구에 공헌한 것은……그것이 문학연구의 근본적인 문제들, 특히 무엇보다도 그것의 대상의 특수성에 날카롭게 초점을 맞추고, 그것이 문학 작품에 대한우리의 개념을 수정하였으며, 또 문학작품을 그것의 구성요소들로 분석하고, 그것이 연구의 새로운 영역을 열어 주었으며, 문학적 기술에 관한 우리의 지식을 크게 풍부하게 해주고, 문학연구와 문학에 관한 우리 이론의 기준을 세웠으며…… 어떤 의미에서 우리의 문학 연구의 유럽화를 초래했다는 사실에 있다…… (이를 통하여)한때 자유 분방한 인상주의의 영역이었던 시학이 과학적 분석의 대상, 즉 문예학의 구체적인 문제가 된 것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