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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4 | 특집 [특집]
대중가요 어떻게 수용할 것인가 2대중가요의 사회사
문윤걸 전북대 대학원 ․사회학(2004-01-29 12:17:24)

문화인류학자들은 흔히 문화를 그 사회 성원들이 공유하고 있는 행위, 지식, 가치, 신념, 태도 등의 총체로서 규정하고 있다. 여기서 어떤 하나의 행위가 공유되었다는 것은 그 사회의 많은 성원들에게서 그 행위가 지속적으로 반복되어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러한 지속성과 반복성에 의해 문화가 성립된다고 할 수있다. 그런데 이러한 지속성과 반복성은 결코 무의미하게 생겨나지는 않으며 거기에는 분명히 작용하고 있는 사회적인 힘이 있다. 이처럼 문화를 가능하게 해주는 사회적 힘이 무엇인지에 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을 수 있으나 대체로 우리가 문화라고 말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 그것이 발생한 당시의 사회와 어떤 형태로 관계하고 있는 지를 검토해 봄으로써 그 구체적인 모습을 다소나마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따라서 필자가 이 글에서 논의하고자 하는 것은 대중가요라는 괴물이 이 땅에 출현한 이후 여러차례에 걸쳐 모양을 달리 하면서 우리의 정서에 깊이 관여하고 있는데 이를 당시의 시대적 모습과 관련지어서 이해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개항이후 갑자기 밀려들어온 외래문물의 홍수 속에서 외래음악이 가져다준 충격은 매우 컸다. 전통적으로 민중들에 의해 생산과 소비가 공유되어 온 민요는 외래문화의 충격과 함께 재창조 기능이 약화되기 시작하였고 그와 동시에 새로이 자리잡은 것이 창가(唱歌)였다. 우리 민중이 향유하던 노래가 민요에서 창가 그리고 유행가로 바뀌어 가는 과정은 전통과 충격의 변증법적 발전이 아닌 전통의 일방적 쇠퇴와 새로운 양식에의 대체라는 비극적 성격으로 시작되었다. 이러한 비극은 우리나라 근대사 전반에 걸친 현상으로 이로 인해 한국문화 전반에 걸친 비극적 운명이 시작된 것이다.
창가는 1880년대 중반부터 급속히 퍼지기 시작한 찬송각의 영향에서 시작되었는데 이러한 찬송가의 형태적 충격이 개화를 찬양하는 근대적 감각과 결합하면서 애국독립가류의 노래를 양산하게 된다. 애국독립가류의 노래들은 주로 사학(私學)과교회등을 통해 퍼져나갔으며 문명개화를 통한 애국, 독립등 관념적인 구호들이 주된 주제였다. 이러한 애국독립가류의 노래들이 한국에서 서양음악에 의한 최초의 노래형태였는데 이는 민요가 민중들의 삶속에서 구비전승되며 공동창작된 것인 반면 애국독립가류의 노래들은 개인창작품으로서 노래자체가 민중들의 삶과 점차 유리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후 창가라는 명칭이 보편화 된 것은 1906년경부터인데 이 명칭 자체도 일본에서 수입한 것으로 대체로 일본의 9.5조 율조를 기반으로 하여 일본 창가의 수입 내지는 모방의 산물에 불과하였다. 따라서 진보적, 개혁적 내용보다는 국수적, 보수적 창가들은 본격적인 식민지 지배를 받으면서 일제의 탄압을 받게 되어 사라져 갔고, 자연예찬, 소시민적 생활, 권학과 근면등을 주제로 한 관인 교육창가만이 불려지게 되었다. 즉 이때부터 노래는 통치의 도구로 사용되기 시작하였고 완전히 정치적 지배원리의 규정하에 놓이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관인 교육창가들은 대체로 일본 번안창가들이었는데 우리의 전통음악이 대체로 3박자 계열인데 반해 이들 창가들은 대부분 3박자 계열의 음악이었으며 일본식 5음계의 보급에 의한 우리 민족의 감수성 변화를 강제하였으며 이것이 현재에 이르러서도 일본풍 노래(뽕짝)를 전통가요라고 부르는 등 잘못된 향수를 갖게 하고 있다.
1920년대 이르러 3․1운동 후의 민족적 비애와 절망감에 사로잡힌 한국사회에 당시 일본에서 유행하던 퇴영적 유행가의 감상은 너무 잘 어울리는 것이었다. 또한 유행창가의 가장 중요한 매체였던 신극운동이 일본 신파극의 영향아래 출발함으로써 갖가지 일본 유행가들이 번안되어 불리우게 되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이주일과 심순애」인데 당시에 극과 노래가 굉장한 인기를 누렸다. 요즘에도 야유회에서의 촌극에 이극이 자주 등장하는 것을 보면 일제 식민문화의 망령이 아직도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들 신파극의 주된 테마는 이룰 수 없는 애정과 이별의 슬품, 삶의 비애와 저랑, 그리고 소시민적 향락의 추구 등으로 대별되는데 이러한 내용들은 오늘날 대중가요에서도 변하지 않는 주된 테마들이 되고 있다. 이는 1920년대 유행창가의 정서가 한국대중가요의 원형으로 자리잡은 것이라 생각된다.
이 시기에 대중가요에 있어서 큰 두 가지 사건을 맞게 되는데 첫째가 레코드산업의 등장이고, 둘째가 라디오 방송의 시작이다. 대중가요가 기본적으로 상품으로서의 문화이며 애초부터 경제적 원리의 지배를 받는다고 볼 때 레코드와 라디오는 필수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최초의 레코드회사는 빅토 레코드사(1927)와 콜롬비아 레코드사(1928)인데 이들은 모두 일본인 회사로서 식민지배의 경제적 수탈과정에 직접적으로 봉사하면서 시작된 것이었다.
최초로 취입된 대중가요는 1926년 윤심덕의 「사의 찬미」였는데 윤심덕의 정사사건이 센세이션을 일으킴으로 인하여 이 레코드가 큰 인기를 모았으며 이로 인해 레코드 산업의 가능성이 인정되었다. 이후 1927년 출반된 「황성옛터」역시 큰 인기를 모았으며 이해에 라디오 방송이 개국하였다.
「황성옛터」는 우리나라 사람에 의해 작사, 작곡된 우리나라 유행가의 초기적 작품이라 할 수 있는데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이 곡조는 흔히 우리 민족적 정서의 표현이라고들 이야기한다. 5음계로 된 이러한 곡풍은 트로트 리듬을 타고 일제시대 가요의 대부분을 이루고 있으며 오늘날까지도 막대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일제시대 대중가요의 초창기(대략1930년경까지)에 유행했던 노래들은 「사의찬미」「황성옛터」「강남제비」「낙화유수」등인데 이들의 공통점은 가사에 있어서 대중가요의 상투적 주제로 자리잡은 이별, 그리움등을 주제로 하고 있으며 비탄조의 곡조로 되어 있다. 이는 일제의 문화통치정책과 밀접히 관련된 것으로 강한 검열을 통해서 우리 민족의 저항정신과 힘찬 독립에의 의지를 거세하고 눈물과 비탄에 젖어 현실의 모순에 대한 극복을 포기하고 자포지기의 수준에 이르게 하려는 정책의 결과로 보여진다.
1930년대에 이르러서는 보다 강한 트로트 리듬으로 만들어진 곡들이 등장하는데 「애수의 소야곡」「눈물젖은 두만강」「알뜰한 당신」「홍도야 울지마라」「번지없는 주막」「목포의 눈물」「나그네설움」등이 당시의 인기곡들이었다. 이러한 노래들은 초기의 3박자가 갖는 특유의 서정성마저도 사라지게 하고 향락적이고 소비적인 박진감을 갖게 하는 경쾌한 트로트 리듬을 사용하여 통속화의 길을 걷고 있다. 1940년대 이후에는 전시체제로 돌입하면서 경쾌하고도 군가풍이며 노골적으로 친일색채를 띤 가요들이 대거 등장하게 되었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우리나라에 있어서 대중가요의 출현 경로는 민중들사이에 구전되어 오면서 자연스럽게 재창조되던 노래가 급격한 외래문물과 제국주의의 침략, 자본과 정치적인 논리에 좌우되는 대중매체의 유입등으로 인해 그 영향력이 축소되고 노래 문화의 주도권은 일제에 의해 지원 받는 대중가요에 의해 장악되고 말았다. 이에 따라 전통적 음계를 간직하며 민중들의 소박한 삶의 반영이었던 민요는 사라지고 일본식 5음계의 유행가, 트로트 리듬의 정책, 소모적이면서 향락적이기까지 한 비참한 현실적인 삶과는 전혀 무고나한 근거없는 환희로 가득하게 되었으며 이는 오늘날 대중가요의 잘못된 원형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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