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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5 | 칼럼·시평 [문화시평]
남궁산 판화전을 보고
정도상․소설가(2004-01-29 13:25:56)

두 개의 그림이 있다. 둘 다 여자의 얼굴이다. 하나는 천경자의 <미인도>고 하나는 남궁산의 <봄처녀>다. 천경자의 미인도는 최근에 가짜 시비를 불러 일으킬 만큼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남궁산의 봄처녀는 판화이면서도 화단에 널리 알려져 있지는 않다. 천경자의 <미인도>는 단 한점 뿐이지만 남궁산의 <봄처녀>는 여기저기에서 눈에 뜨인다. <미인도>를 보고 있으면, 물론 사진으로만 보았다. 저 멀리 아프리카의 잘 생긴 흑인여자를 보는 착각에 빠진다. 어쩌면 천경자의 늙은 얼굴을 닮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봄처녀>를 보고 있으면 우리가 오래토록 잊고 있던 조선처녀를 보는 느낌을 받는다. 실제로 존재하기만 한다면 사랑에 빠져도 좋으리라. 아무튼 천경자의 <미인도>는 환상적인 색처리와 얇고 가는 면과 선으로 이국(異國)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그래서 관능적이고 감각적인 여인의 얼굴이다. 하지만 남궁산의 <봄처녀>는 흰저고리에 검은 치마를 입고 환하게 웃고 있다. 두갈래로 땋아내린 머리며 통통한 얼굴이 영락없는 조선처녀다. 거리에서 마주치는 날씬하고 잘생긴 여자들은 <봄처녀>를 흉내낼 수가 없다. 아무리 비슷한 옷을 입고 분위기를 연출한다고 해도 남궁산의 그림에서 되살아난 조선의 딸이요, 고향의 딸인 봄처녀를 따라올 수 있을까? 나는 <봄처녀>를 보면서 비로소 남궁산이라고 하는 젊은 작가의 내면을 조금이라도 엿볼 수 있었다. 그전에 서울에서 몇 번 얼굴이 마주쳐서 서로 손을 내밀어 악수를 한적도 있지만 정작 그의 그림은 대한 곳은 전주의 “온다라 미술관”에서다. 남궁산을 흔히들 ‘민중판화 제2세대의 작가’라 부른다. 이 자리에서는 구구절절히 민중판화 제 1세대를 논할 필요는 없으리라. 오윤, 이철수, 김봉준, 홍성담, 김경주는 이미 유명한 미술평론가들이 숱하게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그저 그림을 보며 좋다 나쁘다, 혹은 감동적이다 아니다로만 평가를 하는 나는 그럴자격도 능력도 없다. 다만 남궁산의 판화를 보고 느낀 점만을 얘기하고 싶을 뿐이다. 일전에 김경주의 전시회를 보고 느낀 감정이 채 가라앉기도 전에 남궁산의 판화를 보니 내 마음이 절로 밝아지는 느낌이었다. <봄처녀>를 비롯하여 <희망찬 봄에> <백두산 호랑이 이야기> <철원풍경> <우리 노동자> <민들레>를 비롯한 꽃 연작에서 나는 전래동화를 읽는 명랑한 감동을 받았다. 남궁산의 판화에는 1세대가 보여준 어둡고 칙칙한 우리의 현실을 있는 그래도 보여주는 풍경이 보이진 않는다. 자칫하면 너무 단순하고 이뻐서 상업주의로 흐를 위험성마저 내포된 남궁산의 판화들은 그러나 작품마다 건강한 민중성을 투영시키고자 애쓴 작가의 정열이 보여 좋았다. 제비꽃이면 제비꽃대로 민들레면 민들레대로 혹은 국화는 국화대로 나름대로 꽃이파리 하나하나에 지나온 민중들의 삶과 역사와 투쟁을 표현하고자 아니 되살려내고자 고민했을 남궁산의 모습이 그대로 아로새겨져 있었다. ‘해마다 네 무덤가에 산제비꽃이 필 때’ 라는 싯귀절과 만난 보라색 제비꽃을 보노라면 나도 모르게 엄숙해진다. 명랑하게 그려진 그림이지만 꽃이 가지고 있는 역사성으로 인해 저절로 엄숙해지는 그림을 만드는 재주가 남궁산한테는 있는 모양이었다. 미술평론가 유홍준은 남궁산을 다음과 같이 평했다. -그의 판화의 특징은 하나디로 말해서 “인간의 건강한 정서에 부리를 둔 명랑성”이다. 그는 노동자 농민을 그릴 때도 어떤 이념성이나 투쟁의지보다 삶의 희망을 잃지 않는 꿋꿋한 자세를 강조하며 형식에서도 간결한 요약과 이미지의 압축, 그리고 선명한 채색을 구사하여 화면을 밝게 피어 오르게 하고 있다. 따라서 그의 그림에는 보는 이에게 어떤 부담도 주지 않으며 안온한 분위기를 돋우는 매력이 있다. 그러나 나는 남궁산의 예술이 여기에 머물러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가 추구한 ‘건강한 정서’는 반드시 사회적 현실 내지는 역사적 현실과 역기적으로 결합할 수 있을 때 더 큰 예술로 발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그가 겨냥한 “삶의 희망”이 막연한 희망이 아니라 구체적 방향과 연결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런 유홍준의 평가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남궁산의 그림을 찬찬히 바라보며 느낀 감정과 유홍준이 그의 그림을 평가한 내용과는 묘하게도 일치했다. 그렇다. 남궁산은 ‘소품’에 머물러서는 안된다. 사물의 여러 측면 중에서 지금처럼 ‘정서적으로만 명랑하게’ 포착해낸다면 <봄처녀>나 <솟대가 있는 마을>이나 <철원풍경>에서 보여주는 깊이 있는 배경에서 풍기는 강한 예술적 울림을 더 이상은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우리는 흔히 예술의 창작방법에 있어서 ‘민중적 내용에 민족적 형식’이라는 말을 즐겨 한다. 이 말은 그저 단순한 말이 아니다. ‘민중적 내용’이란 단지 민중들의 삶을 담아내려는 정도가 아니고 역사와 변혁과 통일과 만나는 민중의 삶을 담아내라는 말이다. ‘민족적 형식’도 마찬가지다. 이를테면 일본의 밥사발과 우리 나라의 밥사발을 비교해보자. 일본의 밥사발에는 온갖 꽃무늬가 아로 새겨져 있으며 빈공간이 없을 정도로 빽빽하게 채색이 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밥사발은 여백이 많다. 똑같은 밥사발을 만들어 내는 경우에도 ‘민족적 형식’은 민족마다 다르다. 다행히 남궁산의 그림이 보여주는 여러 형식들은 옛 민화에서 한발자국 진보된 형식이다. 나는 무엇보다도 남궁산의 그림이 보여주는 형식이 마음에 쏙 든다. 아직 내용을 든든하게 채워주는 줄거리로서는 미흡한 점이 없지도 않지만 남궁산은 고여 있는 작가가 아니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그런 믿음은 나 뿐만 아니라 남궁산을 아끼는 많은 사람들의 믿음이라고 생각하며 남궁산의 전진을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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