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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5 | 연재 [파랑새를 찾아서]
회문산 봄나들이를 다녀와서
이 종 민․주간(2004-01-29 13:38:08)

시인과의 봄나들이는 부담스러운면서도 즐겁다. 시인은 그 맑(밝)은 눈을 통해 무심코 지나쳐버리기 쉬운 강이며 산이며 풀이며 나무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실감할 수 있게 해준다. 그냥 들꽃이라 뭉뚱그릴 수많은 꽃들의 이름을 따로 새겨 그 세세한 아름다움을 꽃들의 이름을 따로 따로 새겨 그 세세한 아름다움을 전해주기도 한다. 그에게는 사월의 푸르름이 그냥 좋은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많은 이야기가 있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여유로운 ‘작은마을’들을 바라보면서도 “야! 좋다!”라는 탄성밖에 지르지 못하는 자신의 단순함이 안쓰럽기만 하다. 그 생기넘치는 한가로움을 잠시 투기의 대상으로 여기기조차 하는 자신이 속스러워 속이 상하기도 하는 것이다. 시인의 장황스런(?) 들풀이며 꽃에 대한 설명에 ‘식물도감이라고 보고 올 것을’ 하면서도 그로 인해 많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어 기쁘다. “우리가 지금 오르고 있는 산이 바로 많은 511고지중의 하나여. 저그 보이는 산이 회문산, 그 옆쪽으로 약간 비켜있는 것이 장군봉, 길가의 양지바른 곳이 환자트․․․” 끝없이 이어지는 얘기속에서 두눈 부릅뜨고 치열하게(좀 어려운 말로, 역사적으로) 살아간 사람들의 험난한 삶을 읽는다. “야 저 산들이 얼매나 이쁘냐 잉? 너울 너울 어깨동무허고 있는 모습이 정겹지야? 저그 지리산으로 이어갈라고 줄줄이 늘어서 있는 모습도 멋지쟈 잉? 듬성 듬성 마을을 이루며 흘러가는 섬진강은․․․ 지금은 멱을 깜을 수 없게 되었지만․․․” 한숨과 탄식으로 가끔가끔 끊어지다 가도 이어지는 삼과 들, 강에 대한 얘기를 들으며 방금 떠나온 도회지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아름다운 자연의 엄청난 생명력을 확인하게 된다. 그의 얘기를 듣고 있으면 세상이 금방 망해버렸으면 하던 막된 생각이 사그러진다. 극한 상황에서도 결코 절망할 줄 몰랐다는 전사들과 견주어 볼 때 이 정도에 자포자기하려는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초라한가? 저 건강한 자연의 복원력을 고려해볼 때 땅이, 세상이 곧 망해버릴 것 같다고 지레 겁을 먹는 것은 또 무슨 나약함인가? 저 산과 강 그리고 그곳에서 처절하게 살아간 사람들이 얘기를 새기며 맑은 마음과 눈을 간직하고 있는 시인과 비교 해 볼 때 내 땅 한평 없음에 의기소침하여 초조해 하는 나 자신의 모습은 또 얼마나 속물스러운가? 사실, 거대한 괴물로 급격하게 성장(?)해가는 도시가 생명의 땅을 투기의 대상으로 변형시켜 돈으로만 보이게 할 때, 그 도시로부터 쏟아져 나오는 각종 쓰레기 폐수 매연 등이 자연환경을 망가뜨리고, 이러한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먹히지 않기 위해 아니 더욱 많이 먹어치우기 위해 발버둥치는 인간들이 만들어내는 싸움 싸움 싸움의 아수라장을 보고 있을 때, 금방 땅이나 세상이 망해버릴 것 같은 위기감에 휩싸이게 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일 수도 있다. 쿠테타 군인들이 앗아갔다가 그들의 ‘착실한’ 후배들의 선심(?)으로 되찾은 ‘풀뿌리 민주주의’가 각종 졸부들의 잔치로 형편없이 망가지는 모습을 바라보며 맥풀려 하는 것도 이상할 것이 없다. 게다가 이 민주주의의 텃밭이 그 정신과는 가장 거리가 먼 각종 연고(緣故)의 끈에 의해 그 근본부터 망가뜨려질 때 흔들리지 않는 신념을 견지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이 연고의 파장짓기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님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그 절망의 도가 더 심해지는 것이다. 훈요십조의 지연 중시, 조선조 양반타령의 가연 중시, 일제 식민통치자들의 악명높은 '조센징은 어쩔 수 없어‘식의 확장된 의미의 연고주의(역설스럽게도 그들은 이를 우리의 어쩔 수 없는 민족성이라 강조하며 자신들의 강압적 통치를 정당화했다). 우리의 군사정권은 이들의 통치절략을 그대로 이어받아 이를 훨씬 더 조장 강화시켜 특정지역의 기득권을 보호하는데 총력을 다했다. 더욱 가증스러운 것은 이런 각종 인연의 끈을 교묘하게 이용하면서도 각종 단체의 자치권을 억제하며 그 단체장의 임용제를 고집하면서 내세운 것도 바로 이 연고주의의 병폐였다는 사실이다. 87년 이후 각 종 자치단체장이 자율적 선거에 의해 선출되면서, 이 군사정권 담당자들이 염려했던(?) 것이 사실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러한 현상은 가장 진보적인 곳으로 간주되는 대학에서조차 예외일 수 없었다. 총학생장 선거에 고등학교 동문이 위세를 떨치더니 총학장을 선출하는데도 동문모임의 영향력이 거세기 이를 데 없다. 심지어는 신임교수를 임용하는 데에도 동문 비동문이 주요 변수가 되고 있는 실정이다. ‘아직 전주말 하나 익히지 못한 사람이 무슨 말이 많으냐’라든가 ‘동문선배만이 참스승이 될 수 있다’는 망발이 대학사회에서 조차 용남되고 있는 것이다. 전라도 푸대접에 울화를 삭이지 못하던 우리들이, TK의 횡포에 치를 떨던 우리들이 똑같은 죄악을 이 학대받은 땅에서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절망스럽지 않은가? 지연, 학연 등을 중시하는 풍토의 사회사적 의미를 몰라서 하는 얘기가 아니다. 산업화로 인해 우리의 공동체적 삶의 양식이 와해되면서 개개인들이 겪게 되는 소속감의 상실, 이를 보상하기 위해 조그만 인연의 끄나풀이라도 붙잡으려 하는 것을 탓할 수는 없다. 향우회든 동창회든 종친회든 어떤 인연의 끈을 공유하고 있는 사람들끼리 만나 파편화된 사회에서 상처받은 스스로를 위무하려 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기조차 하다. 그러나 이것이 파당이 되어 개개인의 자발적인 선택에 의해 결정되어야 할 사항에 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은 민주주의의 기본 정신에 위배되는 것이다. 지방의회를 구성하는데 어느 가문 출신이라는 것이 무슨 의미를 갖는다는 말인가? ‘연고’를 강조하는 저의는 흔히 기득권의 확보와 그것의 유지에 있다. 이런 집단 이기주의는 불가피하게 배타적이다. 우리는 그 심각한 폐해를 각 지역 소위 명문고등학교 동창끼리의 담합에서 확인할 수 있다. 못지 않게 심각한 폐해는 이거이 모임 내부에서조차 자유로운 토론의 분위기를 용납하지 않는다는 데서 비롯된다. 여기에서는 개인의 창의적 능력보다는 선후배나 학력의 위계적 권위가 더 존중된다. 자유분방함보다는 일사분란함이 중시된다. 그래서 그것은 획일적 보수주의, 아니 반동의 온상이 되는 것이다. 시인을 따라 회문산 자락을 오르면서, ‘니꺼내꺼’없는 푸르름의 봄들녘을 바라보면서, 이와는 너무도 대조적인, 페놀보다도 더 심각하게 우리를 좀먹고 있는 연고주의를 실망스럽게 떠올린다. 그러나 해맑은 시인이 가만 놔두지 않는다. “식물도감에도 없는 풀에/어둠을 끌어다 죽이며/그을린 이마 훤하게 꽃등”을 달아주는 “전라고 실핏줄 같은 섬진강”을 가리키며 조용히 외치는 것이다. “저무는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어디 몇몇 애비없는 후레자식들이/퍼잔다고 마를 ”강물인가를”!! ‘통일주체국민회의의 재판“이라는 이번 선거에 대한 평가에 동조하면서도, ’풀뿌리 민주주의‘를 ’뿔뿔이‘풀어헤친 연고주의의 파당짓기에 어이없어 하면서도, 절망이 아직 때이르다고 하는 것은, 그러나, 이러한 시인의 고집을 본받아서만이 아니다. 푸릇한 봄기운에 취해서만도 아니다. 어둠이 깊을수록 새벽이 가까이 와있음을 믿기 때문이다. 가장 허약한 고리가 변혁의 터전이었음을 역사가 증명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연고주의를 염려함은 새벽이 오는 것처럼 그냥 기다리고 있다고 해서 변혁이 찾아오는 게 아님을 알고 있기 때문이며 극한적 파국만은 피해야겠다는 염려 때문이기도 하다. 편협한 연고주의가 봄철 아지랑이처럼 그렇게 덧없이 사라졌으면 하는 바램을 가는 봄을 아쉬워하며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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