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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5 | 연재 [문화저널]
담뱃대 제작에 바친 생애
윤희숙․본지 편집기자(2004-01-29 13:39:55)

오래지 않은 옛날 구수하고 텁텁한 냄새가 배어나는 할아버지의 사랑방에서 귀에 익은 기침소리와 함께 들려오던 묵직한 구리재털이에 울리던 곰방대의 쇳소리는 희미하지만 아직도 우리의 기억속에 어렴풋이 남아있다. 또한 서당에서 천자문을 외우다 잠깐 졸고 있는 아이의 머리위에 여지없이 떨어지던 훈장의 긴 담뱃대. 모내기를 하거나, 동네를 휘돌면서 헐렁한 삼베옷 등허리에 꽂힌 장죽 역시, 4․50년대를 배경으로 한 텔레비전 드라마나 활동사진에서 본 기억이 생생하게 남아있다. 이렇듯 우리에게 친숙한 담뱃대가 궐련의 등장으로 하나․둘 사라지고 이젠 가까운 주변에서는 거의 흔적을 찾을 수 없는 희귀한 물건이 되어 버렸다. 우리의 전통과 조상의 얼을 되새기며, 평생을 전통 담뱃대 제작에 몰두해 오다 지난 4월 17일 타계한 故 秋正烈 씨의 생은 그래서 더욱 큰 안타까움을 준다. 무형문화재 제65호로 ☆☆☆☆☆ 기능보유자인 故 秋正烈씨는1927년 남원군 덕과면 고정리에서 가난한 농부 秋起南씨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秋正烈씨가 열여덟살이 되던 해 일제의 탄압은 마지막 발악을 하는 상태에 이르렀고 그는 일본의 관리에 의해 거의 강제로 특공비행대원에 자원하게 됐다. 당시 친일 유지들은 입대를 부추겼지만 일단 모집시험에 응한 그의 마음은 그들과는 많이 달랐다. 결국 그는 일부러 낙방하였다. 그리고 이를 알게된 일본경찰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고, 그때 척추를 다쳐 평생 불구자가 됐다. 이런 시련이 그에게 오지 않았다면 아마도 秋正烈씨는 평범한 농부로써의 삶을 살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척추의 이상으로 농사일 등 막노동은 할 수가 없었다. 백방으로 일자리를 찾아 헤매던 중에 덕과면 장터에서 오동상감 연죽을 제작하는 그의 스승 朴相根씨를 만나게 된다. 朴相根씨에게 상감일을 전수받은 秋正烈씨는 스승이 세상을 떠난 후 임실로 자리를 옮겨 임실군 둔남면 오수리 유서깊은 마을에서 40여년 동안을 담뱃대 만드는 일에 전념하며 살아왔다. 궐련이 널리 보급되기 전인 5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담뱃대는 생활문화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어 그 수요가 많았다고 전해진다. 합금을 하기위한 숯을 피우는 양철통과 평평저울, 매화정, 태극정, 잔사리정, 조각정, 망치, 납판등 40여종류의 손때묻은 공구들로 가득 찬 작업장에서 그는 사랑방 주인과 훈장과 시골농부를 위하여 온갖 정성을 다해 담뱃대 제작에 일생을 바쳤다. 담뱃대를 기계로 만드는 방법도 있었으나 그는 전 과정을 손으로 만들기를 고집해 왔다. 그래서 연죽장 하나를 만들기 위해 3~4일 동안 꼬박 열정을 다 바쳐야 했다. 연죽장은 설담배(봉초)를 담는 대통과 목돌, 메뚜기, 설대, 무추리 등으로 이루어진다. 대통, 무추리 등의 금속성분은 백동으로써 구리, 아연, 니켈등을 합금해 사용하고, 설대는 지리산 등지에서 직접 채취한 烏竹(오죽)을 사용한다. 백동이 너무 두꺼우면 색이 안 나오고, 너무 얇으면 쉽게 닳아지는 어려움 때문에 합금된 백동을 늘리는 일에서부터 무늬를 새기고, 색깔을 내는 일게 이르기까지 하나의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1만번 이상의 손질이 필요하다. 비록 불구의 몸이긴 해도 풀무질과 망치질에 임하는 그의 몸놀림 하나하나에는 어느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강렬한 힘과 정신이 배어 있었다. 설담배가 궐련이나 여송연으로 바뀌어 버리자 담뱃대를 찾는 이도 드물어졌다. 빠른 속도의 산업화와 편리를 추구하는 서구문화는 풍류와 여유로움을 간직한 곰방대문화를 통채로 후비쓸어 가버렸다. 이제 담뱃대는 생활용품이라기보다는 관상용이나 기념품으로 탈바꿈하여 우리 생활로부터 점차 멀어져 갔다. 이처럼 잘 팔리지도 않는 기념품을 만들어야 하는 秋正烈씨의 마음은 착잡했으나 그의 잡업에 임하는 장인정신만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렇듯 정성을 기울인 제품의 가격은 고급품이 1개당 50만원, 모통인 경우가 10~20만원대여서 최근 몇 년 동안 대부분이 주문생산으로 외국인들이 관광기념품으로 사가거나 서울 문화재 전수원과 민속촌 등에 한달에 2~3개 팔리는게 고작이어서, 그의 작업은 더 이상 생계의 수단이 될 수 없었다. 다행인 것은 그의 소중한 작업이 인정받아 중요 무형문화재로 지정을 받고 월 48만원씩의 지원금을 받을 수 있었던 사실이다. 열아홉살에 부인 金順南씨와 결혼한 秋正烈씨는 8남매의 자식을 두어 세끼니를 걱정해야 할 지경에까지 이른적도 있었다. 그래서 호구지책으로 비녀, 목걸이, 은방울등 장신구를 만들기도 했지만 계속된 생활의 어려움 속에서도 결코 담뱃대 만드는 일만은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러한 집념이 결실을 맺기 시작한 때는 70년대 후반에 들어서였다. 77년 제2회 무형문화재 공에작품 전시회에 시험삼아 백동연죽을 출품한 그는 최우수작품상인 문공부장관상을 수상했고, 이어 79년 한국농가공산품 개발본부가 주최한 제9회 관광민예품 경진대회에서도 ☆☆상감연죽으로 우수상, 같은해 제4회 전국문화재 공예전에서 특별상을 연이어 수상하면서 그의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80년 8월과 9월에 열린 제3회, 제5회 전승공예전에서도 그의 ☆☆연죽은 진가를 발휘하게 되어 모두 10여차례의 공예전을 휩쓸면서 마침내 80년 11월 인간문화재로 지정됐다. 1천개가 훨씬 넘는 숫자의 담뱃대를 일생동안 제작해 온 秋正烈씨는 타계하기 이전의 몇해 동안 일선에서 물러나 아들 ☆根씨에게 그의 기능을 전수하는 일에 주력했었다. 秋씨는 자신의 일이 아들에게 전수되는 것을 민족예술의 계승을 위한다는 의미에서 다행스럽게 생각했다. 秋正烈씨의 작업중 금․은․동․아연등의 합금처리는 전문적인 기술을 필요로 하고 그 기술을 연마하기 위해서는 5년이상의 세월이 소요되기 때문에 처음에 전국적으로 1백여명이 담뱃대 만드는 일에 종사해왔으나 지금은 5~6명 정도가 남아 그 명맥을 유지해 오고 있다. 문화저널 대규모 기계공업의 발달로 쏟아져 나오는 공산품의 홍수속에 잠겨버린 것은 비단 담뱃대 뿐만은 아니다. 더욱 우리를 안타깝게 하는 것은 우리민족의 정신조차 그 홍수속에서 헤매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秋正烈씨의 한평생을 일관해 온 작업이 지금의 우리에게 더욱 소중한 작업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물론 담뱃대를 보고 그 옛날의 향수를 생각하는 감상에 젖어 보자는 것은 아니다. 일생을 한 작업에 몰두해 온 秋正烈씨를 통해 각박한 세상살이 속에서 조상의 얼을 되살려 보고, 온고이지신을 삼는 좋은 계기를 만들어 보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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