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헌(談軒)홍대용(洪大容;1731-1783)은 충남 천원군에서 출생하여 생애의 대부분을 충남과 서울에서 보낸 인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여기에서 소개하는 이유는 그의 행적과 사상이 이 지역과 깊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담헌은 그의 자연과학에 대한 관심과 실학사상이 무르익어 가던 젊은 시절 호남과 실학의 거인인 이재 황윤석과 석당 나경적을 만나 교류 하면서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다. 이 두 사람과의 만남은 담헌의 실학사상, 특히 천문, 수리 등 과학사상의 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다. 한편 담헌 또한 이재를 비롯한 호남실학의 형성과 발전에 일정한 영향을 주었다. 또 그는 정조 원년(1777, 47세)에 태인현감으로 부임하여 2년반동안 이 지역의 목민관으로서 생활하였다. 이 시기에 유명한 북학파 실학자의 한 사람인 이덕무를 불러 자기 밑에 근무하게 하기도 하였다. 이덕무와 호남지역의 학자들 사이의 교류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으나, 하여튼 홍대용을 매개로 하여 호남파 실학과 북학파 실학 사이에 일정한 연관을 맺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는 먼저 담헌이 한국실학사에서 가지는 의의를 간략히 살펴보고 호남실학과의 관련을 중심으로 알아보도록 하겠다. 1. 거문고의 명인이었던 대실학자 담헌은 영조 7년(1731) 충남 천원군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계는 고려시대 이래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명문중의 하나였던 남양 홍씨이다. 할아버지 용조(龍祚)는 충청도 관찰사를 지었고, 아버지 력(櫟)은 영천군수, 해주목사, 나주목사 등 주로 외직에 있었다. 그 덕분에 홍대용은 많은 여행을 할 수 있었다. 나중에 호남의 과학자 나경적을 만나게 된 것도 아버지가 나주목사로 있었던 시절이었다. 또 하나 재미있는 사실은 홍대용의 선조들이 대대로 관상감과 관계있는 벼슬을 많이 지냈다는 점이다. 관상감은 천문, 역수, 지리학, 각루, 측후 등의 사무와 천문의 교습을 담당하였던 곳인 만큼 이러한 집안의 천문학적 분위기가 홍대용에게 과학적 관심을 일찍부터 일깨워준 배경이 되었다고 보여진다. 담헌은 12살 되던 해에 미호(美糊) 김원행(金元行;1702-1772)의 문하에 입문하여 그가 운영하던 석실서원(石室書院)에 들어갔다. 김원행은 정통기호학파의 맥을 계승한 대유학자였으며, 경기도 양주군 석실리에 있었던 이 석실서원에서 100여명의 이름난 학자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석실서원은 특히 고문(古文)운동을 중심한 새로운 학풍과 시문풍(詩文風)으로 남인계의 성호학파(星糊學派)와 소론계의 강화학파(江華學派)와 더불어 영정조시대의 대표적인 학파를 건설하고 있었다. 담헌은 이러한 스승의 영향하에 일찍부터 과거학을 포기하고 경학연구에 몰두하였다. 그런데 24세이후 주자 성리학에 근본적인 회의를 느끼면서 학문적 방황을 하였던 것같다. 그는 고학(古學)과 양명학에 심취하는 한편 불교서적도 읽고 자연과학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스승인 미호와도 경학에 대한 해석을 둘러싸고 견해차이가 생겼다. 이 무렵 담헌은 석실서원에서 나와 가끔 방문하는 형식으로 배우게 되었다. 20대 후반이래 30대 전반까지 그는 자연과학에 심취하여 고향 천원군에 일종의 사설 천문대라고 할 수 있는 농수각을 설치하고연구에 몰두하였다. 한편 이 시기를 전후하여 철학적으로는 ‘실학’에 정착하게 되었다. 이무렵에 저술한 “소학문의(小學問疑)” “가례문의(家禮問疑)” “대학문의” “논어문의” “맹자문의” “중용문의” “시경변의(詩經辯疑)” “서전문의(書傳問疑)” “주역변의(周易辯疑)”등에서 그는 유교경전에 대해서 주자학과는 다른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였다. 그의 경학사상은 비록 다산 정약용만큼 주자 성리학에 대해 포괄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단계에 이르지는 못하였지만 주자성리학에 대해 회의하고 탈피하고자 하는 측면은 박지원, 이덕부, 박제가등 북학파의 후배 실학자보다 뛰어 나다. 35세 되던 해인 1965년 숙부 홍억(洪檍)을 따라 중국사행을 하게 되었다. 북경에 체류하던 기간중 그는 중국문사들과 교류하였고, 천주교 성당을 방문하고 그들의 천문기술을 직접 보고 대화를 나누면서 자신의 학문과 세계관 형성에 크나큰 전기를 맞게 되었다. 이 때의 일을 기록한 "을병연행록“은 박지원의 ”열하일기“ 박제가의 ”북학의“와 함께 연행문학의 백미이면서 그것들의 모델이 되었다. 그는 중국사행후 양명학에 더욱 관심을 보였고, 자연과학에 대해서도 깊이를 더해갔다. 40세이후 서울에서 거주하게 되는데 그의 대부분의 저작이 이 시기에 이루어졌다. 또 그는 ‘실심실학(實心實學)’과 ‘실사실학(實事實學)’을 중심으로 하는 자신의 실학사상을 체계화시켰다. 일종의 철학소설이기도 한 “의산문답(醫山問答)”에는 그의 실학사상이 체계화 되어 있으며, ‘화이일야(華夷一也)’의 주체적이며 개방적인 세계관과 그에 따른 북학론(北學論)이 피력되어 있다. 평생 과거학을 버리고 관계에 뜻을 두지 않았던 담헌이었지만 44세이후 죽기전 해인 53세까지 음직으로 관계에 진출하여 관직생활을 하였다. 그는 당시 동궁인 정조를 가르치는 시강(侍講)으로 재직하면서 연행시의 견문과 실학적 사상을 강의함으로써 정조의 사상형성에 일익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시강을 제외하고는 태인현감, 영천군수등 주로 지방관으로 근무하였다. 10년간의 관직생활중 담헌은 책을 보지 못한 점을 아쉽게 생각하고 결국 어머님 병간호를 핑계삼아 귀향하였지만 “임하경륜(林下經綸)” “계방일기(桂坊日記)”등은 관직생활과 시강을 지내면서 얻은 경험과 경륜을 서술한 저작물이다. 담헌의 저작물은 매우 방대하지만 위에서 언급한 것 되에 중요한 것으로는 과학관계서적으로서 ”주해수용(鑄解需用)“이 있다. 담헌은 정조 7년(1783) 10월 관직생활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온 그해 10월 53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이제 그의 인품과 행적에 대해 간단히 알아보자 담헌은 어릴 적부터 병약하였고, 초상화에서 보는 것처럼 깡말랐던 체질로서 성격이 까다로웠고 학문적 논쟁이 붙으면 결코 양보하지 않았다고 한다. 때로는 지나치게 고집을 부리는 일 때문에 실수하는 일도 적지 않았다고 스스로 반성하기도 하였다. 한편 선비로서 그의 태도는 엄격하였던 것 같다. 평생 검소하게 지내면서도 두루마기를 입지 않고 외출한 적이 없었다고 하며 집안에 있을때도 엄숙하고 숙연했다고 한다. 심지어 부부가 동침하는 사이에도 ‘도로써 욕심을 잊으면 동침하여 즐기되 미혹하지 않고, 혹심으로 도를 잊으면 미혹하되 즐겁지 않다’ (自警說)고 말하는 엄격한 남편이었다. 그러나 어머니에 대해서는 각별한 효자였다. 북경에 연행사로 다녀온 후에는 어머니를 위해 한글로 된 방대한 연행록을 따로 지어 바치기도 하였다. 그러나 어머니의 병환을 걱정하여 귀향한 담헌은 어머니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는 불효를 저지르기도 하였다. 연암 박지원이 홍대용의 사는 모습을 다음과 같이 그렸다. “그가 일찍이 스스로 과거학(科擧學)과 명리(名利)에 뜻을 끊고 한가히 앉아 향을 태우고 거문고와 비파를 두드리며 ‘나는 장차 아무욕심없이 고요히 스스로 즐거워하며 마음을 세속밖에 놀겠노라’고 하였다” (박지원, 洪德保墓地銘) 연암이 밝혔듯이 담헌은 처사적 생활을 하였다. 육예(六藝)중시를 강조한 자신의 말을 실천하듯이 거문고를 잘 탔으며 그 수준이 명인급에 달하였다는 낭만주의자이기도 하였다. 그는 거문고를 가리켜, ‘티끌세상의 생각을 씻어내고 우울한 기분을 풀어버리는 데는 효과가 시나 술보다 낫다’고 하였다. 그는 세속적인 낙을 버리면서, 한때는 학문적 회읠 하여 스승과도 다소 어색해지기도 했을 때 거문고에 몰두하였다. 그래서 그를 비판하는 자들은 담헌을 보고 ‘거문고를 켜는 광대’라고 욕하기까지 할 정도로 거문고에 심취하였다. 국내에서 여행할 때뿐만 아니라 북경에 사행갔을때도 그 무거운 거문고를 가지고 갔을 정도였다. 그는 또 북경의 서양천주당에 있었던 파이프오르간을 즉석에서 연주하여 서양인 선교사를 놀라게 하기도 하였다. 그들에게 바로 오르간의 원리와 구조를 설명하였으며, 귀국한 뒤 나라에서 이것을 만들라고 명한다면 바로 만들 수 있다고 자신했다고 한다. 그만큼 그는 음악을 좋아했고 조예또한 깊었다. 2. 북학파 실학의 철학적 기초를 마련한 선구자 현실에 대한 변화와 개혁을 도모하였던 실학파의 학문에 있어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특징의 하나가 백과전서파적인 성향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그들의 실용적, 이용후생적인 학문적 지향과 직결될 뿐만 아니라 박학성(博學性) 그 자체로서 이미 그러한 것을 경시하였던 당시의 정통주의적 학문경향에 대한 적극적 대응의 형태를 지니고 있다. 백과전서파라고 할때 그 전형은 18세기 프랑스의 사상가인 도니 디드로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계몽사상의 한 특징으로 이해되지만, 대체로 자연과학의 연구에서 훌륭한 업적을 낸 철학자를 백과전서파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17,8세기 동아시아에 있어서도 자연과학에 깊은 관심을 가진 철학자들이 있었다. 중국의 방이지, 왕선산, 대동원, 한국의 홍대용, 일본의 미우라 바이엔 같은 이가 그 대표적인 보기들이다. 한국 과학사 내지 실학사를 통해 볼 때 상당수의 실학자들은 자연과학에 관심을 표하였다. 여기에는 청으로부터 전래되었던 서양의 자연과학서적과 물건들이 외부적 자극으로 기능하였다. 한국실학사에 있어서 서양과학에 대한 본격적 연구는 성호이익 (1682-1764)에서 시작하여 혜강 최한기(1803-1879)에 이르러 결정을 이루었다. 그런데 그 가운데 과학사적으로 가장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인물이 홍대용이다. 한국화학사상에서 그의 중요성은 서양과학의 체계적 이해와 함께, 자연사상의 독특한 체계화에 근거한다. 특히 그는 17세기 김석문(金錫文)의 학설을 이어받아 지전설(地轉說)을 체계화하였고, 과학적인 천문관(天文觀)의 바탕아래 동아시아 세계에서 처음으로 우주무한론(宇宙無限論)을 전개한 대과학자였다. 그가 한국과학사상 남긴 업적은 실로 지대하다. 그 자신 사설천문대라고 할 수 있는 농수각을 만들어 혼천의를 제작하였고, 자명종을 만들어 보기도 하였으며, 지구의 자전설과 공전설을 증명해 보이는 등 많은 과학적 업적을 남겼다. 그런데 그보다 중요한 것은 과학에 대한 철학을 제시한 점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종래 유학자들이 과학을 끝되고 잡된 기술이라 하여 천시하였던 경향에 대해 ‘어찌 말기라 이르겠느냐 정신의 극치이다’라고 선언하여 과학의 가치에 대해 근본적인 인식의 전환을 촉구하였다. 그러면서 새로운 물론(物論)과 자연관을 제시하였다. 그는 정통 기호학파(畿湖學派)에 속하면서도 인물성동이론(人物性同異論)을 둘러싼 18세기의 이른바 호락논쟁중 인물성동론을 주장하였던 낙론(洛論)의 입장에 서서 도덕적 윤리의 세계로부터 물리(物理)의 세계로 확대해 나가는 쪽으로 그의 실학사상을 발전시켜나갔다. 황윤석, 박지원등과 함께 체계화한 이러한 새로운 자연관과 독자적인 물론은 이후 북학파 실학의 철학적 바탕이 되었다. 이러한 철학 위에서 서구의 자연과학에 대한 깊은 연구와 이용후생의 개혁안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담헌은 북학파 실학의 철학적 기초를 세운 인물이라 할 수 있다. 담헌의 실학사상의 요체는 ‘실심실학’ 과 ‘실사실학’으로 정리 할 수 있다. 이것은 그의 고학, 양명학 및 자연과학에 대한 연구와 조예를 바탕으로 한 것으로 강한 실천성과 실용성을 표방하고 있다. 실사실학의 구체적인 내용은 당시 중인들이나 서민의 학문으로 천시되었던 ‘육예(六藝 ; 禮 樂 射 御 書 數)’를 중시하는 실용적이고 기술적인 학문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그는 당시 현실에 어두웠거나 초연하고자 했던 조선의 관료 및 지식인들의 형태에 대해. “왕왕 사정을 모르고 소탈함으로써 놓은 운치로 삼고 일반행정을 모르면서 비속한 것으로 여긴다. 옛군자는 비록 한 분야에만 치우쳐 익히지 않는다라고 했지만 한가지의 재주와 기술에 어찌 무능한 군자가 있었던가? 이것이 세상에 도움되는 가가 없고 속배(俗輩)들의 웃음거리가 되는 까닭이다.” 라고 하여 공론에 치우치는 그들의 허학적 경향에 대해 비판하고 실질적인 학문과 기술의 결합을 강조한 그의 주장은 학문의 충실화는 물론 나아가 당시 모순된 양반 지배체제 사회속에서 계층적 결합과 직업관의 변화를 뜻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는 실제 사농공상(士農工商)으로 대표되는 직업의 귀천을 무시하고 신분적 차등질서에서 직능별 분업화로 나아가야 하며, 인재등용도 능력에 따라 적재적소에 배치해야 할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