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호(4월호)에서 대체로 개항이후부터 해방직전까지의 대중가요의 사적(史的)흐름에 관해 살펴보았다. 원래 처음의 의도는 대중가요의 사회사라는 주제를 가지고 짤막한 글로 1회만 살펴볼 계획이었는데 대중가요의 정체를 명확히 인식하기 위해서는 한국사회의 역사적 전개과정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변화해 온 대중개요의 사적흐름을 이해하는 것이 도움이 되겠기에 문화저널의 귀한 지면을 빌어 굳이 대중가요의 사회사라는 주제를 2회에 걸쳐 살펴보고자 한다. 따라서 이번에는 지난호에 이어 해방직후부터 현재까지의 대중가요의 흐름을 한국사회의 역사적 사실들과 관련하여 대중가요가 어떤 모습으로 변화해 오고 있는지를 함께 생각해 보겠다. 먼저 해방이후 한국사회에서 대주가요에 큰 영향을 끼친 몇가지 역사적 사건들을 보면, 해방, 미군진주 및 GI문화의 등장, 한국전쟁, 한일수교, 월남파병, 포크송의 열풍,관주도의 건전가요 보급, 대마초 단속, 디스코를 시작으로 하는 댄스음악의 열풍, 댄스음악과 가수들의 등장, 유니섹스로 무장한 젊은 가수들의 등장, 일본으로부터의 가라오케 및 비디오케의 수입, 노래운동을 통한 민중가요의 등장 등 이외에도 크고 작은 많은 사건들이 있다. 이러한 역사적 사건들은 단순히 그 사건 자체만으로 대중가요에 영향을 주기도 하였지만 그러한 역사적 사건을 둘러싼 정치적, 사회적 환경에 의해서도 큰 영향을 받았다. 갑작스럽게 우리 민족에게 찾아 온 해방은 감격과 기쁨을 안겨 줌과 함께 오늘날까지 우리 민족의 가장 큰 한이 되어온 분단과 또다른 외세인 미군정실시를 동시에 안겨주었다. 이러한 상황은 대중개요에도 그대로 영향을 주어 해방의 감격보다는 미군입성을 환영하는 노래(사대문을 열어라)가 먼저 작곡되는 추태를 보이기도 하였다. 해방직후 유행한 노래로는 「감격시대」「가거리 삼팔선」「달도 하나 해도 하나」「귀국선」등이 있는데 이 노래들은 해방과 함께 주어진 남북분단 상황에 대한 울분과 해외동포들의 조국애등의 민족감정을 담고는 있으나 감상적인 면을 벗지 못하고 있다. 또한 미군의 진주는 전투력의 상륙과 함께 외래음악의 직접적인 전파를 함께 가져오게 되었는데 이로 인해 해방직후의 대중가요계는 리드미컬하고 이국적 향기가 풍기는 구미의 음악에 점차 종속되어가기 시작하였다. 이때 유행한 노래들이 「신라의 달밤」과 「슈샤인보이」라틴노래를 번안한 「베사메무쵸」등이었는데 이들 노래들은 국내에 이국풍가요가 만연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으며 더불어 외국음악에 대한 무비판적 수용이라는 대중가요의 고질적인 병폐를 함께 가져다 주었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전쟁기간중 외국군의 병력이 증가되면서 더욱 두드러지는 양상을 보이는데 가사에 외국어가 무분별하게 등장하고 외국문물에 대한 광적인 호기심과 동경심을 담은 노래들이 생산되었으며 외국인들이 부르는 팝송을 가사의 의미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그냥 따라부르는 등 츄잉껌과 쵸컬릿으로 대표되는 GI문화에 심하게 종속되는 현상을 보였다. 이 시기에 외래적 요소가 대중가요의 많은 부분에 침투하였지만 한편으로는 격동기를 살아가는 민중들의 모습과 감정을 표현하는 노래들도 많이 등장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노래들은 대체로 기존의 트로트양식을 탈피하지 못하고 있는 아쉬움에 가지고 있다. 대표적인 노래들로는 오늘날에도 주변에서 흔하게 들을 수 있는 「굳세어라 금순아」「이별의 부산정거장」「단장의 미아리고개」「전우여 잘자라」등이 있으며 「봄날은 간다」「고향초」「울고넘는 박달재」등과 같이 폐허속에서도 고향에 대한 우리 민족의 질긴 향수가 우리 민족의 전통적인 한으로 자리하고 있음을 표현하는 노래들이 많았다. 휴전이후 자유당에 의한 정치폭력의 남발은 사회각층에 걸쳐 정치에 대한 불신과 부패를 가져왔는데 이러한 것들이 대중가요에도 어김없이 그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이 시기에는 멜로디보다는 주로 리듬의 변화가 돋보이는데 이때에 유행한 리듬들이 「맘보」「차차차」「부기우기」등 라틴 계통의 리듬들이었다. 이는 당시에 사회적으로 큰 물의를 빚었던 비밀댄스홀의 전성리로서 사교춤의 확산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1960년대에 들어 대중가요는 보다 다양한 모습을 띠게 되는데 이는 50년대 후반 음악감상실의 급증과 AFKN방송을 통한 팝뮤직의 확산, 그리고 무엇보다도 KBS-TV 및 MBC라디오의 개국의 영향이었다. 대중가요가 어차피 자본에 의해 지배를 받는 상품이라는 점에서 볼 때 상업방송국의 개국은 대중가요계에 엄청난 영향을 주었고 스타나 히트곡 위주의 경쟁시대를 가능하게 하였다. 60년대의 첫 히트곡은 「노란샤쓰 입은 사나이」였는데 이는 미국 팝송의 영향을 직접 받은 것으로 트위스트 리듬의 춤을 일으켰다. 이후 「우리 애인은 올드미스」「키다리 미스타김」등 아류작을 생산하면서 오래 대중음악이 지배적인 문화형태로 정착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60년대에 있어서 또 하나의 변화는 대중가요 가수들의 세대교체가 이루어졌다는 점인데 이전의 꾀꼬리 같은 맑고 고운 목소리의 가수들에 비해 허스키하고 드라마틱한 가수들이 대거 등장하였다. 이들은 주로 미8군의 쇼무대에서 노래하던 가수들로서 이들은 기존 가수들과는 전혀 다른 창법을 가지고 있었으며 서구적인 세련성을 함께 지니고 있었고 그 당시 보기드문 학사출신가수도 포함되어 있어 국내 대중에게 새로움을 제공하기에 충분하였다. 60년대 중반 모든 사회여론의 강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한․일국교가 정상화되자 각 민간방송에서는 일본 방송국의 프로그램을 노골적으로 모방하기 시작했는데 이로인해 일본 대중가요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왜색가요들이 대거 등장하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의 기폭제가 된 것이 이미자의 「동백아가씨」인데 이외에도 문주란의 「동숙의 노래」남진의 「미워도 다시한번」「가슴아프게」등이 대 히트하면서 이들이 70년대까지 트로트계의 대표주자로 군림하게 되었고 왜색가요 역시 식자층의 많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 끈질긴 생명력을 보여주고 있다. 60년대를 대표하는 또 하나의 정치적 사건은 월남파병인데 이는 진중가요형의 대중가요를 양산하는 반면 우리나라 대중문화의 해외진출에 큰 영향을 주었다. 한국영화의 동남아 수출이나 월남으로 위문공연 다녀오던 연예인들이 동남아로 진출하여 정부의 후원과 함께 정식 외화획득 사업으로서 기업화되는 양상을 보이기도 하였다. 60년대의 후반에 이르러 각 민간방송국에서는 젊은 DJ들을 고용해 미국의 최신음악을 여과없이 그대로 소개하는 프로그램을 제작하여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이는 방송매체의 유행적 경쟁성향과 결합하여 외국음악의 동시 유행이라는 문화적 역현상을 야기하는 근본적인 요인이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60년대 미국의 청년문화의 대표적인 국면인 포크문화를 그대로 한국에 수용하는 현상을 야기하였다. 당시 미국에서 귀국한 한 대수를 시작으로 김민기, 송창식, 윤형주, 양희은, 김도향, 서유석등이 요란한 반주음악 대신 통기타 하나만으로 당시의 노래 분위기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연출하였다. 대체로 이러한 노래들은 가사의 서정성이나 문학적 형상화, 음악 수준의 향상, 당시 지배문화에 대한 강한 반발등으로 젊은 층을 중심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모았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한국사회에서 포크송의 시작은 미국 포크송에 대한 모방에서 출발하였고, 그나마 미국의 경우 포크송운동이 매카시즘에 대항하는 반전운동, 흑인민권운동, 학생운동, 진보적 사회운동등과 연결되어 전통민요를 계승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하는 반면 한국의 경우 확고한 정신적, 조직적 세력없이 피상적인 모방에서 출발하여 결국 포크송 가수들의 대중적 인기상승이 포크음악에 상업적 가치를 전이시켜 통속적인 사랑이나 근거없는 젊음의 정열을 노래하는 것으로 변질되고 말았다. 70년대를 거치면서 대중가요의 영역은 매우 다양화되는데 가장 큰 변화는 노래반주의 발전이라고 할수 있겠다. 60년대의 노래반주는 트로트계 노래에 주로 쓰이는 기타, 베이스, 드럼, 섹스폰 등이었으나 70년대에 이르러서는 관현악 반주가 뒷받침되었다. 또 다른 변화는 가요양식의 다양화인데 기존의 트로트와 포크송외에 전자음악을 이용한 그룹사운드가 등장하였고 민요조의 가요(잘했군 잘했어, 새타령, 강원도 아리랑 등)가 등장하는 등 대중가요가 타 영역의 음악양식까지 포괄할 정도로 기능적 확산을 이룩하였다. 그러나 70년대 후반 정부의 대마초 단속과 가요규제, 방송금지조치 등은 대중가요게에 전격적인 질서개편을 가져와 한동안 개중가요의 뚜렷한 침체를 가져왔는데 이 무렵 기존의 트로트계 멜로디를 기반으로 하면서 거기에 록음악의 고고리듬을 결합하여 트로트의 애상적인 분위기도 아니고 신민요풍의 유락적인 분위기도 아닌 모호한 성격의 가요가 대량 생산 되었다. 대표적인 곡들은 「오동잎」「나를 두고 아리랑」「사랑만은 않겠어요」「돌아와요 부산항」등인데 이러한 노래들은 당시의 대중가요계의 음악적 진행과정에서 볼 때 뚜렷이 트로트로의 복귀를 선언하는 시대착오적인 복고적 풍토조성에 기여하는 역기능을 가져왔다. 80년대 들어 「토요일 밤의 열기」라는 미국의 영화가 한국에서 상영되면서 일기 시작한 70년대의 대표적 리듬인 고고리듬의 퇴색과 함께 디스코 리듬의 선풍은 국내의 대중가요계에 혜은이의 「제3한강교」를 시작으로 디스코 리듬의 급속한 확장과 함께 국내 대중가요의 음악적 구조에서 외국의 댄스리듬이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또한 70년대 말 MBC방송국에서 처음 시작한 대학가요제는 80년대에 들어서 모든 방송국에서 경쟁적으로 실시하였는데 초기의 참신하고 순수한 모습을 끝까지 간직하지 못하고 방송국과 음반제작사의 상업적 필요성에 의해 새로운 스타를 탄생시키기 위한 요식행위로 전락하는 등 그 순수성을 상실하고 말았다. 이러한 대학가요제를 통한 신인 가수들이 예상외로 폭발적인 인기를 얻자 비슷한 유형의 신인가수들이 대거 등장하였는데 이들은 대개 일본 청소녀들의 모습을 그대로 흉내낸 제스추어와 옷차림으로 유니섹스의 첨병역할을 함으로써 문화에 있어서의 종속현상을 음악뿐만 아니라 새로운 부문으로까지 확대 심화시키게 하였다. 80년대에 이르러 일본문화에의 종속현상은 도처에서 발견되는데 일부 가정에서는 일본의 TV프로그램을 인공위성 안테나를 이용하여 직접 시청하고, 청소년들은 밀수입된 일본의 불법 음반을 들으며 일본의 잡지를 구독하고, 중장년층들은 가라오케와 비디오케를 통해서 왜색가요를 목청껏 불러대는 등 왜색문화에 대한 일말의 경각심도 찾아볼 수 없는 실정에 이르렀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우리의 문화를 회복하고 대중가요의 건강성을 되찾기 위한 노력이 노래운동이라는 모습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노래운동 역시 아직 그 성과를 얘기하기는 이르지만 아직까지는 동기의 순수성이나 정당서에도 불구하고 대중성과 일상성의 확보라는 면에서 큰 성과를 올리고 있지는 못하고 있다. 이상으로 사적개관을 통해 대중가요의 전개과정을 평면적으로 살펴보았는데 대체로 우리나라 대중가요의 전개과정에서 가장 큰 문제는 외국음악에 대한 여과없는 무분별한 모방․수용과 대중가요 초창기에 자리잡은 근거없는 민족정서(恨), 그리고 상업적 자본에 의한 대중문화매체의 반민족적 운영이라고 생각된다. 아울러 한국 문화 전반에 걸쳐 공히 지적될 문제인 일본 제국주의 침략으로 인해 자발적인 전승․발전을 이루지 못한 한국 사회의 문화적 구조의 파행적 전개가 대중가요의 생산․소비구조 전반에 아직까지도 큰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