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5 | [특집]
누가 승리하였으며, 또 무엇이 승리하였는가
14대 총선이 남긴 지역정치의 과제
원도연․전북대 대학원․사회학과
(2004-01-29 13:45:15)
Ⅰ.
92년 신년의 벽두를 뜨겁게 달구었던 14대 국회의원 선거가 마침내 막을 내렸다. 한바탕 정치의 열풍이 지나고 난뒤, 다시금 일상 속에 외로이(?) 남겨진 우리들은 또다시 이번 선거가 우리 모두와 이 사회에 어떤 과제들로 남겨져 있는가를 곰곰 생각해 본다. 선거가 끝난 후 각 언론들과 자천타천의 정치평론가들은 선거의 결과들과 그것이 떨군 낙수들을 화제 삼아 민자당의 참패와 민주당의 약진, 그리고 국민당의 돌풍을 이야기하며 앞으로 전개될 정치에 대해 각각의 견해와 전망들을 어지러히 우리 앞에 내놓았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다시금 심각하게 되돌아봐야 할 하나의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이번 14대 총선에서 과연 누가 승리하였으며, 또 무엇이 승리하였는가 하는 것이다. 더우기 '지역'이라고 하는 지극히 복잡하고 난감한 우리 사회의 문제들을 직접적으로 맞부닥치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이번 선거가 한층 더한 무게로 다가오는 것이다.
Ⅱ.
여러 가지 의미와 필요에서 이번 선거는 사실 깊히 관찰해 볼만한 가치가 있었는데, 그것은 우선 개인적으로는 모처럼 한가한 시간적 여유를 안고 선거라는 대단히 매력적이고 극적인 요소를 안고 있는 정치적 게임에 대한 호기심이었으며, 좀더 거창한 의미들을 부여한다면 이번 선거가 90년대 우리사회와 전북지역의 정치지형에 관한 많은 것들을 이야기해 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우연찮은 기회를 얻어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서 이번 선거를 관찰하면서 필자가 받았던 첫 번째 느낌은 역시 전북지역 정치의 후진성과 그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정치문화의 부재였다.
전주의 양 선거구에 출사표를 던진 각 후보들의 어떤 선거캠프에서도 사실 팽팽한 긴장과 긴박한 승부의 의지가 번뜩이지는 못하였다. 마지못해 '떠밀려서 한판'으로 의무방어전(?)을 치르듯 하는 후보가 있었는가 하면 스스로 충분히 패배를 예견하면서도 불구하고 개인적인 한풀이로 선거판을 좌충우돌하는 후보도 있었으며, 도저히 수준미달의 후보들이 곳곳에서 난림하기도 했다. 전주시 양 선거구의 민주당후보들은 선거가 공고되기도 전에 이미 당선 안정권인 30% 가량의 고정표를 안고 출발했고, 민자당후보들은 10% 안팍의 고정표를 가지고 후반부터 지쳐있는 양상으로 선거전은 시작되었다. 그렇게 선거는 시작되었으되 선거전은 논쟁이 없는 선거가 되었으며, 각 후보간의 정치적 견해와 입장이 부딪치는 선진적 형태의 선거와는 애초부터 거리가 멀었다. 13대 국회를 겪으면서 전북지역 출신 국회의원 모두에게 끝없이 회의하고 그 자질에 대한 의심을 거두지 못했던 유권자들은 다시금 깊은 좌절속에 빠져들었고,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강요된 한표를 결심하였다.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독백들을 무수히 남기면서.
이처럼 특징없는 후보들 사이에서 졸전을 거듭하던 전북지역의 선거전은 중반에 돌입하면서 세가지 논쟁축이 부상되었는데 소위 '전북 홀로서기'와 '지역개발론' 그리고 '인물론'이 바로 그것이었다. 이 가운데 이번 선전전의 백미는 이른바 '전북 홀로서기'를 둘러싼 논쟁이었는데, 그것은 지역분할에 근거한 현 집권 블록이 호남지역에 교두보 구축을 위해 준비한 이데올로기적 공세의 성격을 떤 것이라는 점에서 그에 대한 야권후보들의 대응에 그 관심이 모였다. 더우기 '전북 홀로서기'의 문제는 지역개발론 및 인물론과 밀접한 관련을 지니면서 이번 선거가 지니는 지역주의의 문제를 가름할 수 있는 중요한 척도가 된다는 의미를 동시에 지니고 있었다. 역시 예상했던 대로 야권후보들은 '전북 홀로서기'의 주장이 갖는 지역분열적 음모를 적시하면서 역공을 가했고, 아울러 지역개발론에 대해서는 13대 야권의원들의 치적(?)들을 나열하면서 야권후보들도 충분히 지역개발에 기여할 수 있다는 점들을 집중 홍보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치열한 선전전에도 불구하고 각 후보들간에 지역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사회과학적인 인식이나 그에 대한 구조적 해결의 전망들은 여전히 안개속을 헤매이듯 했다. 이처럼 안개속을 헤매는 듯한 각 후보들의 지역 문제를 바라보는 정치적 철학은 결국 선거공약의 형태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는데, 기실 중요한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요컨대 지역문제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그리고 지역문제의 해결에 정치는 어떤 역할을 담당 할 수 있는가하는 점에 대한 각 후보들의 발상은 여전히 피상적인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으며, 지역문제에 대한 여야의 정치적 선전전이 주요한 대립축을 형성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각 후보들의 선거공약에서만은 여야를 구분하기 어려운 선심성 공약들이 남발되었던 것이다. 결국 여야 각 후보들간의 공약에서 나타나는 주요한 대립점은 누구의 공약이 더욱 구체적 인것이냐, 그리고 누가 더 생활 속에 파고드는 공약을 내 놓았느냐가 그 비교의 척도가 되었다. 각 후보들의 관심은 2000년대의 전북에 무엇이 생길 것인가에 그 관심이 집중되었을 뿐 전북을 어떻게 만들어갈 것인가에 대한 관심은 최소한 그들의 선전 속에 나타나있지 않았다. 선거전의 세가지 요소인 후보, 정당, 정책에 있어서 전북지역은 시종일관 특징없는 후보, 안일한 정당, 전혀 준비되지 않은 정책들로 졸전을 거듭했으며, 이는 이번 선거를 관찰하면서 지역정치의 미래를 한없이 회의하게끔 하는 요소로 작용하였다.
Ⅲ.
이제 이번 선거를 통해 나타난 전북지역 유권자들의 태도와 의식을 보자. 애초부터 이미 기울어진 승부에 대해 관전자들은 그다지 흥미를 느끼지 않지만 전북지역의 경우 관전자들의 흥미를 자극할 수 있는 몇 가지 요소들이 있었는데, 그것은 우선 이 지역출신 13대 국회의원들의 자질에 대한 유권자들의 분노에 가까운 회의가 곳곳에서 자리하고 있었고, 그같은 자질시비가 민주당의 공천과정에서 충분히 걸러지지 않았다는 점, 전북지역 최초로 재야출신의 후보가 민주당 공천으로 총선에 출마했다는 점, 전주․이리․군산의 3시에 전북의 정치적 균형을 깨뜨리고자 출마를 불사한 민중후보들의 선전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 것인가, 그리고 중앙 관계에서 전북을 대표하던 소위 거물급 인사의 출마와 그들에 대한 중앙의 막대한 지원이 얼마나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점 등등을 꼽을 수 있었다.
일단 이번 선거전에서 나타난 전북지역 유권자들의 태도와 의식은 다분히 이중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유권자들의 정치의식의 기저에 흐르는 한국정치 전반에 걸친 정치적 피해의식과 한편으로는 전북지역의 발전을 위한 현실적 대안이 무엇인가를 고민하는 두 가지 상반되는 태도로 나타났다. 이같은 상반된 태도들은 선거 공고전에 치러진 한 후보진영의 여론조사 결과에서도 그대로 확인되었는데 유권자들의 가장 커다란 관심은 지역개발의 문제로 나타났고 이를 위해서는 여권후보의 당선이 바람직하다는 견해를 보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투표행위는 민주당을 선택하는 것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실제로 선거전이 종반에 접어들면서 유권자들은 민주당에 대한 자신의 지지의사를 상당히 적극적으로 표명해왔으나, 다른 한편으로 지역개발에 대한 강한 미련을 여전히 안고 있었던 것으로 보여졌다. 이 같은 조건은 실제 선거의 결과를 통해서도 여실히 확인되었으며, 여당이 의도했던 바 지역개발에 관한 당위적 주장은 이 지역유권자들의 정치적 피해의식을 끝내 극복하지 못한 것으로 평가되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이번 선거과정에서 나타난 유권자들의 정치의식은 대단히 긍정적인 측면을 보여주었다. 88년의 13대 총선 이후 사회전체에 급속도로 번져나갔던 정치적 무관심과 냉소주의는 이번 선거를 경과하면서 오히려 정치가 주는 대중최면과 막연한 기대로부터 스스로를 차단하며, 정치를 보다 객관적인 위치에서 바라보는 힘으로 작용하였다. 무엇보다도 유세장에서 보여지는 유권자들의 태도는 대단히 진지했으며, 각 후보들 사이에서 오고 가는 인신공격이나 상호비방에 대해서는 상당히 단호한 태도를 보였다. 물론 이같은 유세장 분위 기는 지지후보에 대한 연호나 야유가 금지된 유세장의 강화된 규칙 때문이기도 했으나, 반드시 그 때문이라고만 볼 수 없는 각 후보들에 대한 인물평이나 정견에 대한 진지한 평가가 곳곳에서 연출되기도 하였다.
Ⅳ.
전북지역의 14대 총선결과는 외형적으로 결정적인 변화를 보여주지는 않고 있다. 위의 몇가지 표를 통해서 확인되고 있는 이 지역 유권자들의 투표성향은 여전히 일관된 경향성을 보여주고 있으며, 그 가장 중요한 특징이라고 볼 수 있는 민주당에 대한 지지도는 87년 대통령선거 이후 지속적으로 감소되고 있는 경향을 보여주지만 여전히 대단한 위력 발휘했고, 이와 함께 민자당의 지지도는 87년의 대통령선거 및 88년의 13대 선거에 비해서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루었다. 결과적으로 민주당의 아성으로 표현되는 전북지역에서 민주당은 지난 광역선거에 비해서 3.6%의 지지율 하락과 두석의 이탈을 감수해야 했지만 이마저도 사실상 교묘하게 의도되거나 예정되었던 패배라는 점에서 민자당과 민주당은 피차 그다지 커다란 불만이 없는 선거를 치른 셈이었다. 더우기 전국적으로 돌풍을 일으킨 국민당의 선전이 적어도 전북지역을 비롯한 호남지역에서 만큼은 전혀 그 힘을 발휘하지 못했으며, 이 같은 현상은 또 다른 의미에서 지역구조의 특수성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양적인 지표들이 보여 주는 전북지역의 정치적 형세는 단지 약간의 지지율 하락과 두석의 이탈을 통한 민주당의 외형적 축소라는 간단한 분석만으로 그치는 것인가. 이번 선거를 주의깊게 지켜보았던 많은 사람들의 반응을 종합할 때 이 같은 양적인 분석은 중요한 문제들을 간과할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즉 선거를 통한 정치의식의 평가에는 단순한 투표행위 그 자체만이 아니라 투표를 결정하게 되는 과정이 보다 구체적으로 검토되어야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대중의 정치적 정서를 표현하는 저변의 투표행위들을 엄격한 기준으로 볼때 민주당에 대한 59.2%의 지지율이 온전히 민주당에 대한 지지를 표현하는 것인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보다 깊이 있는 분석이 필요하다는 점에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예컨데 위의 <그림 3>을 통해서 나타난 민주당의 눈에 띄는 지지율 하락은 대단히 의미심장한 것이었으며, 이 같은 현상은 사실상 전북지역의 거의 모든 지역에서 나타났다. 즉 민주당에 대한 선택이 한국정치의 진정한 대안적 정치세력이라는 평가에서 라기 보다는 전북지역의 지역적 불평등과 정치적 피해의식으로부터 출발하는 상대적 선택의 의미가 더욱 컸다는 것이다.
선거가 끝난후 14대 총선 평가를 위해서 전북연합에서 열린 비공식정책 간담회에서는 참석자들로부터 민주당에 대한 선택적 지지가 갖는 대중설득력의 한계들이 주요하게 토로되었고, 심지어 민주당 후보에 대한 지지가 '차악의 선택'이라는 용어로 표현되기도 하였다.
<그림 1> 87년~92년 전북지역 유권자들의 투표동향
(%)
90
70
50
민주당
40
민자당
20
기권
0
민중당
87년대선 13대총선 91광역 14대총선
<그림 2> 87년~92년 전북 전주시 완산구 유권자들의 투표동향
(%)
90
70
민주당
50
40
기권
20
민자당
0
민중회의
87년대선 13대총선 91광역 14대총선
<그림 3> 87년~92년 전주시 덕진구 유권자들의 투표동향
(%)
90
70
50
민주당
40
기권
20
민자당
0
민중당
87년대선 13대총선 91광역 14대총선
*자료 : 전라북도 선거관리위원회
주: 1) 민주당의 87년 대선․13대 총선. 자료는 평민당, 91년 광역자료는 신민당의 득표율로 간주
2) 민자당의 87년 대선 및 13대 총선 자료는 민정당의 득표율로 간주
3) 기권은 전체 선거인수 대비, 나머지 각 당 득표율은 유표투표수 대비
전북지역에 출마했던 후보 및 정당이 갖는 결정적인 취약점은 바로 정책개발능력에 관한 것이었다. 이는 실제로 전북지역의 경우 후보자나 정당이 갖는 정책적 능력보다는 후보자들이 유귄자의 어떤 정치적 정서를 대변하는가 하는 정당의 문제가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기 때문에 어쩌면 이같은 결과는 필연적인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러한 조건은 전주 지역의 개표결과 각 투표구마다 일반적인 지역적 조건이 반영되지 않는 거의 유사한 투표성향을 보였다는 점을 통해서도 확인되고 있다. 요컨데 70년대 이후 전북지역의 유권자들이 지녀온 '상대적 진보성'은 사실상 지역의 정치적 정서에 맞물려 있을 부산이나 경남의 그것과 거의 차이가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점과 바로 이 점이 전북지역에서 보다 진보적인 정치역량의 출현을 가로막는 중대한 질곡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는 점에 우리는 주목해야 하는 것이다.
V.
누가 승리하였으며, 그리고 무엇이 승리하였는가? 이제 14대 총선의 막연했던 기대를 거 두면서 우리는 이번 선거가 이 지역과 지역의 정치에 남긴 과제들을 정리해야 한다. 전북지역에서 민주당은 과연 승리하였는가 라는 물음에 대해서 우리는 비교적 단호하게 부정형의 단문으로 응답할 수 있다. 그렇다면 현명한 유권자들의 선택이 빚어낸 민중의 승리인가. 안타깝게도 그에 대해서도 우리는 부정형의 답변들을 준비 할 수밖에 없다. 이번 선거가 한국 사회의 미래에 많은 것들을 이야기해주고 있지만 적어도 지역문제와 그것에 대한 근본적인 대책에 가장 근접한 책임집단으로서 이 지역의 정치문화는 지극히 기대이하의 것이었으며, 구조적인 문제를 안고 있는 한국사회의 정치질서는 전북지역 정치적 후진성을 강제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점이 거듭 확인되었다.
지역정치에 대한 우리의 절박한 안타까움을 넘어서 이제 우리는 무엇으로부터 시작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고민들의 주체는 한표 한표의 주인인 우리들 모두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당연하게 그 정치적 문화에 대한 일차적인 요구의 대상이 되는 정치집단에 대해 우리 모두는 그 권리를 주장해야 한다. 그러나 그 같은 권리를 주장할만한 가치를 지닌 대상조차도 없다는 전북지역의 현실은 대단히 암담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견고한 지역주의의 기초가 흔들리고 있다는 점은 이번 선거에서 우리 모두가 얻은 가장 큰 수확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우리는 당연히 그 멀지 않은 미래를 조직하고, 건강한 정치 문화의 출발을 준비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