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킵 네비게이션


분야별보기

트위터

페이스북

1991.6 | 칼럼·시평 [문화시평]
홍성담 오월민중항쟁 판화전을 보고
송만규 겨레미술연구소 대표(2004-01-29 13:50:09)

씻기워지지 않을 5월을 열한번째 맞는 올해는 그 어느때 보다 더욱 무겁고 가슴 답답함을 느끼게 한다. 그때의 피빛이 오늘 다시 여기저기 투영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조국 산하의 찢겨진 땅덩어리를 걸머지고 하나됨을 향하여 행진하는 권력과 자본에 의해 삶으로부터 소외 당하고 착취에서의 해방을 선포하고 인간으로서 인간다움을 부르짓음에 국가보안법, 안기부법, 집시법등 반민주악법을 동원한 공안통치 구조 속에서 백주에 맞아죽고, 잿더미와 검은 연기속으로 사라져가는 젊은 넋들이 있기에 또한 평화동 철창 안에 갇혀 있는 나의 벗 홍성담이 있기에 더욱 그러할 것이다.
그는 민족민중미술운동전국연합(이하 민미련) 공동의장으로서 남북한 자주적 미술교류를 이룩하고자 평양에서 개최됐던 세계 청년 학생 축전에 대하 걸개그림 ꡐ민족해방운동사ꡑ의 슬라이드를 재미교포를 통해 평양에 보냈다. 그리고 길이가 77cm나 되는 이 그림은 한양대에서 전시도중 경찰에 의해 무참히 짓밝히고, 찢기고, 불태워져 흔적도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북한의 미술가들은 이 그림을 그대로 복원해 북한전역에 걸쳐 순회전을 했다고 한다. 이러한 혐의로 사람을 때려죽인 정권, 폭력, 폭행, 고문정권은 간첩죄를 적용해 15년까지 구형했었으나 홍성담의 가열찬 옥중투쟁과 동지들의 석방투쟁으로 대법원에서 간첩죄는 파기되고, 3년의 선고를 받고 현재 전주교도소에서 철창살이를 하고 있다.
홍성담은 지난 시기 민족민중미술운동의 가장 탁월한 작가이다. 드높은 사상성과 예술성을 한몸에 틀어쥔 그의 창작품은 「광주민중항쟁」연작판화에 집약되어 있지만 그것만으로 그를 이해하기는 대단히 부족하다.
장르구분이 명확하지 않았던 70년대 나의 민주화운동을 80년 이후 미술운동부문으로 정리하기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만났던 벗, 동지가 바로 그이다. 그는 광주민중항쟁의 생생한 현실을 두눈을 부릅뜨고 바라 보았으며 우리는 왜 자주적이며 민중적이어야 하는가를 명확히 깨닫고 있었다. 그러기에 그는 자신의 활동력과 실천력을 풍부하고 폭넓게 전개해 왔다.
같은 조직내에서 활동하는 동지로서 그에 대한 예술세계를 살펴보는 것도 괜찮을 듯 싶어 할애된 지면내에서 소개한다.
1955년 육지에서 멀고 먼 절해고도인 하의도에서 태어난 그는 목포와 광주에서 성장하다가 1977년 겨울, 목포교외에 있는 한산촌이라는 요양소에서 투병생활을 하게 된다.
투병과 한산촌이라는 곳은 그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는 계기로 작용된다. 당시의 한산촌이라는 곳은 유신체제하에서 저항하다 도피해온 민주인사들의 요양과 은신처이기도 하였는데 이때 홍성담은 윤한봉등과 만나면서 이전까지 가지고 잇던 개인의 공동의식을 새로운 저항의지로 일으켜 세우며 자신을 변화시키는 계기를 갖는다.
또한 해남에 와 있던 황석영을 만나게 되면서, 그는 그들을 통하여 생활과 투쟁, 예술의 새로운 시대를 열게 된다. 1979년 다시 광주로 돌아와서 대학가를 중심으로 하는 탈춤, 마당극이나 진보적인 몇몇 문학인들이 이끌어오던 문화운동의 현황속에서 미술부문에 관한 것을 운동력으로 전화시킬 것에 대하여 고민하고 준비하다가 그해 9월에 광주자유미술인협의회를 출범시키게 된다.
이어 일과놀이(1983), 광주민중문화운동협의회(1984), 시각매체연구소(1984), 민족미술협의회(1985)의 창립에 주도적으로 기여했으며, 특히 새로운 사회에의 전망을 통해 오늘의 현실을 민중적, 민족자주적 관점에서 올바르게 반영하고, 또한 작가로서 민중과 연대하면서 구체적으로 지지와 지원 및 교육선전하는 이데올로기 투쟁전선의 조직활동을 추진하면서 전국단위의 현장미술패 연합체인 지금의 민미련 건설에 주도적으로 나서게 되었다.
이렇게 문예조직활동을 하면서도 350점에 이르는 판화작업과 걸개그림 및 회화 작업을 해온 것을 보면 창작에 대한 집념이 얼마나 강하고 문예에 대한 열정과 순정 그리고 조국과 민중에 대한 애정 또한 얼마나 진한지 짐작코도 남음이 있다. 그는 반민주악법으로 통치하려 하는 현정권으로서는 대단히 곤욕스러운 미술가이며 역사상 미술탄압에서 가장 악랄하고 폭력적인 탄압을 받아온 작가다.
그러나 그는 작품에서 엿볼 수 있듯이 혁명적 낙관론자이다.
작품 〈대동세상〉을 보면 역동적이고 밝은 조명이 지니는 위력은 억압과 고통으로부터의 해방과 지배세력을 향해 거세게 타오르는 투쟁의 불길을 내지르는 힘이 있었으며, 새롭게 떨쳐 일어나는 민중들의 모습니다. 이러한 현실을 생생하게 담아낸 〈대동세상〉은 연작판화중 변혁운동세력에게 가장 광범위하게 보급되어 알려진 작품이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민중적 내용을 담아내는 민족적 형식의 원리를 구현하는 민중적 사실주의의 창작방법에서 구사된 것이다.
현실을 표현하는 방법에서 지배세력에 의해 탄압받는 인물의 형상을 중심으로 일그러진 표정과 왜곡된 조형방식은 칙칙하고 어두운 것들이 일반적이었다.
때문에 이에 대한 민중주체적 관점, 투쟁승리의 관점에서 민중의 건강한 모습의 형상화가 요구되었다.
그 내용은 고통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굳건하게 생활하는 것으로서 노동자와 농민들의 일하는 모습, 투쟁하는 모습, 놀이하는 모습 등이다. 표현 방식은 밝고 명랑한 색채에 힘에 넘치는 섬묘가 첨가되기도 하는 것이다.
변혁에 나서는 모든 계급계층의 긍정적 인물들을 표현하며 고통에 사로잡신 인물이라 할지라도 그가 긍정적인 인물이라며 희망의 빛으로 열렬하게 돌파하는 전망이 깃들어 있고, 좌절과 절망조차도 생동하는 투지와 결합되어 있는 것을 그의 그림에서 볼 수 있다.
홍성담의 옥중 서신중에 이런 내용이 있다.
나의 작업 하나하나가 현실의 극복을 절대 가치로 했다는 것, 그리고 궁극적인 민중의 승리를 낙관할 수 있는 힘으로 그려 나왔다는 것, 지금까지 내 인생의 모든 것을 부끄럼없이 내비칠 수 있는 용기가 나에겐 아직도 펄펄 살아 넘쳐난다는 것이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