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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6 | 연재 [문화가 정보]
남원 월산리 가야 고분군
곽장근 전북대 박물관 조교(2004-01-29 13:56:45)

전북의 동남부에 위치한 남원지방은 1987년 전북대학교 박물관 주관으로 실시된 지표조사를 통해 전 지역의 곳곳에서 가야계 수혈식 돌덧널무덤 유적이 조사되어, 그 지역 토착세력집단의 문화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대상이 되고 있는 지역이다. 남원지방에 산재되어 있는 그 유적들 중에 지표조사뿐 아니라 정식 발굴조사를 실시하여 가야계 고분으로 입증된 유적으로는 지난번에 소개한 건지리 고분군외에도 월산리 고분군과 두략리 고분군이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정식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유적은 몇몇에 불과할 정도로 미진한 상태에 머물러 있어 이 지역 토착문화의 성격을 밝힐 수 없는 실정이다.
본고에서는 발굴조사를 통해 전북지방에서 처음으로 가야문화의 존재 사실을 제시하고, 더나아가 토착문화의 실체를 연구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던 것으로 평가되는 월산리 고분군의 발굴내용과 함께 그 유적의 성격을 간단하게 소개하고자 한다.
이 월산리 유적은 남원군과 장수군의 군계를 이루는 능선에서 동쪽으로 뻗어내린 험준한 지류들이 지교적 완만한 경사면을 형성하는 구릉지대에 자리하고 있으며 행정구역상으로는 남원군 아영면 월산리에 속한다. 이 유적은 ꡐ아영뜰ꡑ이라 불리는 들판을 사이에 두고 약 4km정도 떨어진 맞은 편에 있는 건지리 고분군이 한눈에 보이는 곳에 자리하고 있다. 이 지역 일대에는 봉분의 직경이 20m내외 되는 대형고분이 10여기 산재하고 있으며 그 중에서 4기의 대형고분이 발굴조사되었다.
이 발굴조사는 1981년 광주와 대구를 연결하는 이른바 ꡐ88올림픽고속도로ꡑ개설공사로 일부 고분이 설계된 도로상에 포함되어,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 주관으로 1982년 이른 봄에 한달 보름동안 실시되었다. 신설되는 도로상에 유적이 자리하고 있어 시간을 다투는 촉박함과 변덕스러운 날씨 등 여러 가지로 어려운 상황에서 실시된 발굴조사였음에도 불구하고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둔 발굴이었다. 또한 발굴조사를 마치고 곧바로 출토유물에 대한 복원작업과 보존처리작업을 완벽할 정도로 실시하여 유물의 원상을 과학적으로 완벽할 정도로 되살릴 수 있었던 것으로도 높이 평가될 수 있다. 그 결과 유적에서 출토된 대부분의 유물은 현재 국립 전주박물관 1층 전시실에 전시되어 있으며, 지금도 박물관을 찾는 많은 사람들에게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 고분군에서 조사된 고분은 크기와 성격에 따라서 크게 3가지 형식으로 나뉘어지는데, 이 형식구분에 따라 각 고분의 성격과 현상을 간단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제 Ⅰ형식
제 1형식의 고분은 길이 130~190cm내외이며, 폭 50cm, 높이 60cm정도 크기로 이 유적에서 조사된 많은 고분 중 그 규모 면에서 가장 소형에 속하는 것으로, 모두 4기가 조사되었다. 이 4기의 고분중에는 파괴 내지 도굴된 고분도 있었으나 본래 상태대로 보존되어 있었던 고분이 조사되어, 이를 중심으로 고분의 구조와 출토유물을 소개하고자 한다.
고분의 축조방법은 먼저 묘곽을 만들 수 있을 만큼 구덩이를 파낸 다음 그 안에 시신을 안치할 수 있는 묘곽을 돌을 이용하여 만들었다. 시신을 안치하는 묘곽의 측벽은 아래에 판자모양의 장방형 납작한 돌을 수직으로 세우고 그 위에다 크기가 일정하지 않은 다양한 깬 돌을 2-5단 정도 옆으로 눕혀서 축조하였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묘곽을 이루는 네벽 중 장벽은 3-5매의 장방형 돌을 잇대어 세웠으며, 양 단벽은 1매의 돌을 세워서 처리하였다. 그리고 측벽의 위에는 장방형의 깬 돌을 이용하여 묘곽을 덮었는데, 뚜껑돌이 없어진 예도 있었으나 보통 4-5매의 돌로 덮었던 것으로 보인다. 뚜껑돌과 뚜껑돌 사이에 틈이 생기는 부분은 아주 작은 깬 돌조각편을 이용하여 막았기 때문에 시신을 안치한 묘곽의 윗면이 완전히 덮이도록 축조되었다. 바닥면은 흙바닥을 그대로 이용한 것도 있으나, 일부 고분에서는 전면에 걸쳐 작은 깬 돌조각과 자갈돌을 깔아서 바닥 시설을 일부러 마련하기도 하였다.
이 형식에 속하는 고분에서 출토된 유물로는 토기류와 철기류가 있으며, 출토된 유물의 양은 과히 많지 않지만 대체로 토기류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 중에서 토기류로는 가야토기의 대표적인 문양으로 인식되고 있는 물결무늬가 시문된 목긴 항아리와 항아리, 뚜껑접시 등이 출토되었다. 그리고 철기류는 쇠낫과 쇠손칼 등 2점이 수습되었다. 고분 속에 부장된 유물의 배치상태는 머리와 발치쪽에 토기류를 부장하고, 일부 고분에서는 한쪽에만 철기류를 부장하였다.
제 Ⅱ형식
월산리 고분군에서 발굴조사된 많은 고분 중에서 이 형식에 속하는 고분에는 MI-E호,MI-G호와 M2호 그리고 M3호 고분 등 모두 4기가 있다. 이들 고분은 위에서 설명한 제 Ⅰ형보다 그 규모와 구조 등 여러 가지 면에서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으며, 특히 시신을 안치한 묘곽 위에 뚜껑돌을 시설하지 않은 무개선식 고분이라는 점에서 더욱 뚜렷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 형식에 속하는 고분은 길이 370-475㎝, 깊이 80㎝내외 크기로 위에서 언급한 제 Ⅰ형 고분보다 규모면에서 대형화된 양상을 보인다. 또한 묘곽을 형성하는 양 단벽부분의 폭은 55-74㎝이나 묘곽의 중간부분은 폭이 85-104㎝정도로 넓어져 배부른 보트형을 이루고 있다. 다시말해서 시신을 안치한 묘곽의 중앙부분 폭이 양쪽 단벽의 폭보다 약간 넓어지는 양상을 보이고 있어 마치 보트와 유사한 모양을 이루고 있다.
묘곽을 이루는 네 측벽은 아래에서부터 위에까지 크기가 일정하지 않은 깬 돌이나 냇돌을 이용하여 가로 또는 모로 쌓는 방법을 혼용하여 축조하였다. 다만 M1-E호 고분은 네 측벽의 하단에 비교적 큰 돌을 이용하여 쌓고 그 위에 그보다 작은 돌을 올려 놓아 제 Ⅰ형에 속하는 고분의 측벽 축조방법과 다소간 유사성을 보이고 있다. 조사된 고분 4기의 바닥면은 모두 아무런 시설을 하지 않고 흙바닥을 그대로 이용하였다.
고분 안에 부장된 유물은 제 Ⅰ형 고분보다 다양해지면서 많아지는 양상을 보이고 있으며, 토기류와 철기류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먼저 토기류는 항아리, 목긴항아리, 받침있는 목긴 항아리, 손잡이 달린 잔 그리고 그릇받침 등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이 중에서 목긴 항아리는 전체적으로 제 Ⅰ형 고분 단계에서 출토된 것보다 모양과 종류면에서 발전된 양상을 보이며, 목부분에는 물결무늬가 전면에 걸쳐 시문되어 있다. 유사한 기형을 보이는 항아리는 모두 3점이 출토되었으며, 항아리의 몸체 부분에 돗자리무늬가 시문된 경우도 1점이 출토되었다. 제Ⅱ형에 속하는 고분에서 출토된 토기류 가운데서 가장 특징적인 토기는 그릇을 올려 놓는데 사용된 그릇받침(器臺)을 들 수잇다. 이 토기는 제 Ⅰ형 고분 단계에서 보이지 않은 유물로 모두 5점이 출토되었다.
다음으로 철기류는 쇠손칼, 쇠낫과 함께 제 Ⅰ형 고분 단계에서 출토되지 않았던 쇠도끼, 쇠창, 쇠화살촉, 쇠칼 등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고분내에 부장된 유물의 배치상태는 대체로 토기류와 철기류를 한쪽에만 부장하였다. 다만 M1-E호에서는 토기류를 머리와 발치 양쪽에, 또 철기류가 다량으로 출토된 M3호에서는 긴쇠칼과 쇠손칼을 묘곽의 중앙, 즉 허리부분에 부장하고 있었다.

제 Ⅲ 형식

이 형식에 속하는 고분은 위에서 소개한 고분들과는 달리 고분의 규모가 현저하게 대형화되고, 출토된 유물의 종류와 수량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아지는 양상을 보이고 잇다. 월산리 M1-A호와 M4호 고분이 이 형식에 속하며, 일부 파괴된 부분도 있으나 대체로 잘 보존되어 있었기 때문에 발굴조사에서 많은 유물이 출토되어 귀중한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다. 다만 아쉬운 점이라면 M1-A호 고분은 정식 발굴조사가 실시되었으나, M4호 고분은 파괴된 고분에 대한 정리조사 차원에서 조사가 이루어진 점을 들 수 있다.
M1-A호 고분은 바닥길이 860㎝, 폭 136㎝, 높이 185㎝ 크기이고, M4호는 길이 825㎝, 폭 100㎝, 높이 145㎝ 정도 크기로 대형고분이다.
고분의 축조방법은 먼저 흙을 파내어 묘곽을 만든 다음 그 안에 돌을 이용하여 시신을 안치할 수 있는 대형묘곽을 만들었다. 묘곽을 이루는 측벽은 크기가 일정하지 않은 깬돌이나 냇돌을 이용하여 가로 또는 모로 번갈아 가면서 쌓았으며, 주로 가로로 쌓는 방법을 많이 사용하였다. 그런데 위에서 소개한 제 Ⅰ,Ⅱ 형식 고분과는 달리 측벽석사이에 진흙을 발랐던 흔적이 일부 남아 있으며, 본래는 측벽의 전면에 걸쳐 진흙을 발랐던 것으로 보인다.
묘곽의 네벽 위에는 길쭈한 돌, 즉 천정석을 이용하여 시신을 안치한 묘곽을 덮고 있었다. M1-A호 고분에는 14매의 천정석이 덮여 있었고, 천정석 사이의 틈에는 비교적 작은 깬돌편으로 그 틈새를 막았다. 묘곽을 덮고 있는 천장석이 일부 무너져 내린 부분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천정석이 본래래 상태대로 양호하게 남아 있는 점에 비추어 볼 때 이 고분은 도굴의 피해를 입지않은 것으로 생각된다.
M1-A호 고분의 바닥은 진흙으로 바닥을 다진 다음 비교적 평평한 냇돌을 깔았는데, 남벽에서 150cm지점부터 약 300cm사이에는 돌을 깔지 않았다.
M1-A호 고분의 유물은 양족에 부장된 것으로 묘곽의 남쪽에서는 쇠화살촉, 쇠창, 그리고 말에 장식한 마구류가 놓여 있었고, 남벽에서 약 300cm지점에서는 동벽과 인접하여 환두대도 2점, 쇠손칼 1점이 출토되었다. 북쪽에서는 말을 탈 때 쓰던 발걸이 1쌍, 쇠토기, 쇠낫 그리고 몸을 보호하는데 사용된 갑옷 등의 철기류와 20여점 이상되는 다량의 토기류가 출토되었다.

유적의 시기와 성격
지금까지 월산리 유적에서 조사된 많은 고분에 대하여 고분의 구조와 규모 그리고 유물의 성격을 근거로 3가지 형식으로 구분하여 살펴보았다.
그 결과 제 Ⅰ식에 속하는 고분은 천장석을 덮고 있는 소형고분으로, 부장품도 적색토기와 와질계통 토기류와 쇠도끼, 쇠낫 등 철기류가 출토되었으나, 대체로 빈약한 편이었다. 이 형식에 속하는 고분에서 출토된 토기는 원삼국시대에 주류를 이룬 김해식토기에서 그 다음에 등장하는 경질토기로 이행하는 과도기적인 단계에 있는 것들이다. 이들 토기에서 보이는 속성에 근거하여 이 제 Ⅰ형식 고분이 축조된 시기는 대체로 5세기 전반경으로 추정되고 있다.
제Ⅱ형식에 해당하는 고분에서는 제 Ⅰ형식 고분에서보다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으나, 제Ⅲ형식 고분단계에서 보이는 마구류와 같은 말 갖춤새는 아직까지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이들 고분에서 출토된 유물은 그 종류에 따라서 다소간 시기적인 선후관계를 보이는 것도 있으나, 고분이 조성된 시기는 부장된 유물의 성격에 의해 대체로 5세기 중반경으로 보고 있다. 또한 이 형식에 속하는 고분과 유사한 형식과 성격을 보이는 고분이 가야문화권에 속하는 김해 예안리, 함양 상백리에서 조사된 예가 있다.
위에서 소개한 제 Ⅰ,Ⅱ형식 고분들과 여러 가지 면에서 현저한 차이를 보이는 제 Ⅲ형식 고분이 등장하는 단계에 이르면 고분의 규모는 대형화 되고, 또한 부장유물의 종류 및 수량은 전단계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해지고 많아지는 양상을 보인다. 특히 마구류가 다량으로 출토된 점에 근거하여 이 형식의 고분은, 기마민족계의 성격을 지니고 있으면서 그 규모 면에서 대가야 왕릉으로 알려진 고령 지산동 유적의 대형고분과 동일한 범주에 포함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월산리 유적에 산재되어 있는 대형고분, 즉 제 Ⅲ형식에 속하는 고분들은 6세기를 전후로 한 시기에 축조된 것으로 보이며, 그리고 그 대형고분을 축조한 집단은 가야문화를 토대로 성장 발전한 토착세력 집단으로 생각된다. 또한 이 지역 일대에는 위계질서가 확립된 토착 세력 집단이 성장 발전하였을 것이며, 인접지역과 구분되는 정치적 영역을 가진 집단, 즉 독자적인 소국(小國)집단이 존재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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