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6 | [문화저널]
중기사지와 석등
한수영․전북대․박물관
(2004-01-29 13:57:08)
계절의 여왕이라는 5월이 가기 전에 일상적인 일들을 떠나 봄나들이라도 가고 싶은 날들이다. 특히 때이르게 다가든 더위와 더불어 아지랭이처럼 스멀거리는 나른함을 쫓기 위해 한줌 바람부는 들판으로라도 내닫고 싶은 날들이다. 이런 때면 사람들로 북적대는 관광지나 이름난 사찰이 아닌 이름 모를 사찰이나 그저 조는 듯 들어선 시골길을 거니는 여유에 잠기고도 싶은 것이다. 중기사지는 전북지방에서 이런 기분으로 찾을 수 있는 곳 중의 하나이다.
우리가 답답함을 느낄 때 절터를 찾는 것은 우리의 핏줄에 역사가 흐르고 있으며 우리 역사에서 불교가 차지하는 비중이 큰 탓이 아닌가 싶다. 종교를 떠나 절은 우리의 역사적 산물로 우리의 삶속에 자리하고 있는 탓일 것이다. 절에 들어서면 흔히 탑과 불상이 있고 법당이 있으며 보통 눈여겨보지 않는 것으로 탑의 주위에 석등이 있다. 여느 이름없는 사찰터와 마찬가지로 중기사지에도 여기저기 기와장이 뒹굴고 무너져 내린 석탑, 어색하게 들어선 법당이 있다. 다른 곳과 조금도 다름이 없는 모습이나 이 절터에 들어서면 주변이 잘 다듬어진 곳에 석등이 우리의 시선을 끈다.
1. 중기사지
중기사는 본디 통일신라 중엽에 창건되었으며 단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전설에 의하면 이 절의 규모는 매우 컸으며 한 때 천여명이 넘는 수도승이 있었다고 한다. 또 기록이 없어 이 절이 없어진 것도 임진왜란 때 불타서 없어졌다고도 하며 다른 말로는 정확한 시기를 알 수는 없으나 섬진강물이 엄청나게 불어나는 바람에 절과 승려가 모두 쓸려 내려가고 절이 망했다고도 한다. 어쨌든 남아있는 석등으로 미루어 매우 큰절이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터에는 최근에 지은 법당과 산신각만이 남아 절의 명맥을 잇고 있을 뿐이 다.
중기사는 행정구역상 임실군 신평면 용암리 73번지 일대에 속하며 그 범위는 명확하지 않으나 3천여평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절은 전주-남원간 도로를 따라 임실 관촌의 사선대를 지나 관촌역 앞에서 롯데우유공장이 있는 왼쪽편으로 꺾여서 이어지는 도로를 따라 6km 남짓한 곳에 자리하고 있다. 섬진강 줄기를 따라 이어지는 도로는 포장되지 않은 탓으로 온통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찾아든 절터는 여느 시골과 다름없는 동네에 자리하고 있다. 절로 칭하고 있는 법당도 지붕을 스레이트로 덮고 있어 일반 농가와 별다름이 없다. 다만 주위 곳곳에 탑에 사용되었던 부재와 건물의 기단석(토방돌)들이 뒹굴고 있어 이곳이 절터임을 말해주고 있다.
초라한 법당의 안에는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82호로 지정된 연화 좌대위에 석불과 철불이 자리하고 있다. 철불은 석가모니불이며 석불은 미륵불로 생각되고 있는데 이들 부처에는 석회를 덧발라서 원형이 훼손되었다. 부처가 있는 좌대는 양식상 그 수법이 석등과 같은 점에서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석불이 모셔져 있는 좌대는 상대, 중대, 하대가 모두 8각 평면을 이루며 중대에는 합장한 불상이 조각되어 있으며 하대석의 각면에도 역시무늬가 있다. 철불이 모셔진 좌대는 상대에 연꽃을 겹쳐서 시문하고 있으며 중대석은 8각으로 그중 4면에는 장방형으로 구멍이 파여 있어 본디는 석등의 부재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법당의 앞에는 3층의 탑 옥개석이 놓여있다. 옥개석에는 옥개받침이 뚜렷하며 탑의 상륜부를 받는 노반도 남아있으며 탑신석은 남아있지 않으며 주변에는 탑의 기단석도 남아있다. 이들 탑에 사용된 부재들에 의하면 본디의 탑은 2중 기단이었으며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2. 석등
중기사지 석등은 법당이 있는 대지보다 한단 낮은 대지위에 놓여있으며 법당이 있는 곳과의 사이에 계단이 남아있어 이를 통하여 석등 구역과 법당 구역이 이어 지고 있다.
석등은 상륜부가 일부 없어졌을 뿐 비교적 양호하게 남아 있다. 8각의 지대석을 놓고 그위에 역시 8각의 하대석이 놓여있다. 하대석은 2매의 돌로 이루어졌으며 하대석의 측면에는 가늘고 긴 안상이 조각되어 있다. 하대석 위에는 8잎의 연꽃무의가 조각되어 있으며 귀에는 귀꽃이 달려있다. 연꽃대좌위에는 둥근 기둥모양의 간주석이 있는데 간주석은 중앙부분이 북모양으로 불룩하며 연꽃을 조각하여 장식하였다. 간주석 위에 있는 상대석에는 연끝이 8잎 조각되었으며 그 위로 8각 화사 석 이 놓여 있다. 화사석 에는 8면에 모두 장방형의 화창(딘)이 마련되었으며 화사적의 위에는 8각의 옥개석이 덮혀있다. 옥개석의 추녀는 귀부분이 위로 치켜지는 반전을 이루고 있으며 귀에는 큼직한 귀꽃이 장식되었다.
이 석등에는 2가지의 얘기가 구전되고 있다. 하나는 이 석등에 불을 켜면 당시의 서울이었던 경주에까지 불빛이 비쳤다는 것이다. 이는 이 석등이 현재 남아있는 높이가 5.18미터로 우리나라 석등 중 구례 화엄사 각황전 앞의 석등(국보 12호, 높이 6.36미터)에 버금하는 큰 규모라는 점에서 비롯된 것으로 여겨진다. 다른 하나는 일본인들이 일제강점시기에 이 석등을 일본으로 가져가려고 하대석 주변을 깨뜨리자 맑던 하늘에 석등을 중심으로 검은 구름이 몰려들고 소나기가 내리고 천둥, 번개가 치는 바람에 포기했다고 한다. 이 얘기는 일본인들이 우리나라에서 적잖은 문화재를 반출해갔다는 점에서 이 석등의 반출을 꾀했을 가능성이 없지 않으며 그럼에도 남아 있게된. 이유를 극화한것으로 생각된다.
이 중기사 석등은 전체적인 형식에 의하여 9세기를 전후한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이에 따라서 중기사도 9세기를 전후하여 창건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같은 석등으로는 남윈 실상사 석등, 전남 담양 개선사지 석등, 그리고 구례 화엄사 각황전 앞 석등 등이 있다. 이들 석등은 간주석에 북모양의 볼록한 부분이 있으며 그곳에 연꽃등을 장식한 공통점을 가지고 있으며 이는 이 지역의 특징으로 꼽을 수 있다. 즉 지리산을 중심으로 한지역의 특징적인 양식이 간주석에 북모양의 볼록한 면을 갖추도록 한 점이다. 중기사 석등도 이 같은 지리산 주변의 지역적 특성을 간직하고 있는 점에서 더욱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3. 석등의 의미
석등은 말 그대로 불을 밝히기 위한 시설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그 불은 인간이 자연에 순응하여 살아가던 때에는 신만이 다스리는 것으로 인식되던 불을 인간이 스스로 관리하게 되면서 문명의 빛을 밝히게 되었다. 즉 등은 인류 문명의 상징성을 지니게 되었으며 더 나아가 어둠을 비추어 밝힌다는 점에서 종교적 진리의 상징물로 등장하게 되었다. 즉 어둠을 악마의 영역이라고 할 경우 불은 악마의 영역을 축소하는 것이며 모든 어둠 속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악을 물리치는 힘을 부여받게 된 것이다. 또 인간의 선을 추구하는 종교에서 악을 물리칠 수 있는 불은 진리의 상징으로서 의미를 가지게 되며 이에 따라 선(善)을 상징하는 것이 되었다. 불교에서 석등은 단순한 조명시설로서 만이 아니라 암흑에서 헤매이는 일체 중생들을 광명으로 인도하는 불타의 진리를 상징하는 것이란 점에서 더욱 중요성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또 불을 보고 불나비들이 모여들듯 진리의 상징체인 석등을 향하여 몽매한 중생들이 모여들고 어둠 속에서 불안하고 공포에 떨던 마음을 안정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역사에 묻혀 그 폐망시기와 이유조차 명확하지 않은 채 남아있는 중기사지에서 이 석등은 찬란했던 시기를 몸으로 말하고 있는 듯하다. 또 비록 폐허에 가깝게 변한 속에서도 불법은 멸하지 않으며 영원히 을 발한다는 것을 보여 주는 듯도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