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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6 | 연재 [사람과사람]
목각의 장인, 김종연
이병천 소설가(2004-01-29 13:59:20)

나무에 대한 내 최초의 기억은 무엇이던가? 씁쓸하게 귀향하던 일가족, 마을 입구, 물가 아름드리의 정기나무, 그 위에 내 또래의 아이가 올라앉아 있다가 우리를 내려다보았던가? 그래서 나는 지금도 어떤 나무를 볼 때마다 그 나무에도 나처럼 눈빛이 있어 마주 응시한다고 믿어버리는가?
나무에 대한 나의 이 기억은 나로 하여금 모든 나무가 끓어 넘치는 생명이 잇다는 대단한 선언적 각성은 대단할래야 대단할 수 없는 상식에 지나지 않는 일이다. 그러나 나는 억울해진다. 나무들에 대한 오랜 사랑의 정염 때문에.
김종연의 목각 공예품들을 보아오면서부터 그러나 내 억울함은 가라앉는다. 그것은 사랑의 실패를 자인하는 내 쪽의 국종 따위가 아니라, 그의 목각이 주는 따뜻한 위로 때문이다. 나는 이제 그 고백을 한다.
고향마을의 그 정기나무는 나를 업어 키웠다. 나무위에 올라가 우리 가족을 내려다보던 모습이 부러웠기 때문에 나는 그들 나무의 잔등을 뻔질나게 오르내렸던 것이다. 그 행위는 어쩌면 마을과 내 또래의 아이들과 나무를 향한 내 나름대로의 동화(同化) 몸부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십여그루가 넘던 그 든든한 나무들은 어찌 되었던가! 동네 안길이 바뀌던 새마을 사업 때 단일고의 가치도 없이 톱날에 잘려 나가고 말았다. 나무토막들은 동네에 한두어 조각씩이라도 고루 나누어져 얼마쯤의 군불거리라도 됐던 가? 내가 지금 아주 맛있게 추억하는 그때의 호박죽은 사실 그 장작개비가 끓여주었던 것인가?
김종연의 가게 겸 좋은 작업실은 전주의 관통로 민정당사의 맞은편쪽에 있다. 내게는 평(坪)수 감각이 없긴 하지만 네 평쯤 될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가게 밖으로는 몇 개의 그날 잘려졌던 모양대로 통나무들이 세워져 있다. 만약 ꡐ미목(美木)공예사ꡑ라는 간판이 아니라면 새마을 사업을 기억하고 있는 이들마다 잘려진 통나무만으로도 가슴이 또 내려앉을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밝은 유리창을 통해 가게 안을 들여다보면 거기 한 젊은이가 등을 돌리고 앉아 아마 지금도 무엇인가에 열중하고 있을 것이다. 가게에 온통 들어차는 큰 목어(木魚) 한 마리를 깍고 있든지, 불감(佛龕)에 마지막 채색을 입히고 있든지, 조성이 끝난 미륵 보살상에 마지막 점안을 하고 있든지…….
무엇인가에 열중해 있는 모습은 참으로 아름답다는 사실을 나는 미목공예사의 유리창 밖에서 확인한다. 사실 앞쪽에서 보기로 한다면 작업에 열중해 있느라고 콧물이 흐르는 모습을 본의아니게 훔쳐 보게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래서 나는 그의 좁은 공간 때문에 달리 어쩔수도 없는 일이지만 앞쪽을 향해서 일하라고 결코 주문하지는 않는다. 실제로 번잡하고 어지러운 큰 도로쪽을 향하는 것보다 작업성과면에서도 낫겠지만, 세상의 명리와 물욕에 사로잡힌 사람이라면 굳이 구태여 밖을 향하여 앉으려 들 것이다.
우리들 대부분의 어린 시절이 그러했듯 나무조각과 칼질의 맨 처음 기억은 그 역시 고무지우개에 도장을 파는 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역시 나무에 관한 속담인데, 될성 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했다. 그는 연필 끝에 달려 있는 그 콩알만한 고무지우개에 남의 이름 석자를 썩 솜씨좋게 새겨주곤 했으니 졸업하면서는 담임선생님에게도 도장을 직접 파서 선물할 정도였다고 얘기한다.
내 주위에는 역시 나무와 관련된 또한 그런 친구가 있다. 내가 절에 있던 그해 가을, 한 겨울내내 군불때기 위해 미리 소나무․오리봉나무․참나무들을 잔뜩 베어다 말리고 있을 즈음 그 친구는 왔었다. 그리고는 마냥 신세지는 일이 염치가 없었던지 장작 패주기를 자청하고 나섰다. 녀석은 그날로부터 꼬박 나흘동안 나무들을 알맞은 크기로 잘라가며 장작패기를 했다. 그가 애써 만든 장작은 내가 서둘러 하산하는 바람에 마차 한 대 분량이 고스란히 남의 것이 돼버렸지만 정작 녀석자신에게는 큰 소득이 되어 주었다. 장작패기를 끝내고나서 그가 얘기했던 것이다. 쪼개지고 갈라지던 숱한 나무토막들을 보면서 결심한게 있으니 자기는 이제 목수(木手)가 되어야 하겠다는 것이다. 얼마전까지 문화저널의 사무실 담벼락에 잔뜩 목재를 쌓아놓고는 전기톱이며 전기대패등의 최신공구로 책상이며 책꽂이를 짜던 그가 바로 그다.
나는 그가 소목이든 대목이든 우리 시대의 성실한 한 장인이 되기를 기대한다. 장작패던 날의 결정이 나와 함께 연유했기 때문이다. 나는 물론 김종연이라는 목각의 장인과 고무지우개를 파던 날로부터 인연을 맺어왔던 것은 아니지만 예술혼의 완성을 똑같은 심정으로 고대하고 있다. 그가 쓸쓸하고 어렵게 지내던 때로부터 알고 지내왔기 때문이다. 그때 그는 농한기의 마을 주민들을 모아 그들의 부업거리가 될 만한 무슨 나무 기르기며 조각품 따위 일을 가르쳐주고 있었다. 나는 천성이 나무(李)인지라 그 나무의 장인들만을 참꾼이라고 여겨와서인지 그와는 쉽게 벗해버리고 말았다. 나보다 다섯 살 어린 지금 서른 하나라고 하니까 5년을 볕에서 자란 나무 차이가 어떻게 되든 내 상관하지 않고…….
어쩌면 김종연이 했던 작업중에 가장 큰일은 금산사 대적광전의 나무 조각품들일 것이다. 금산사 대적광전이 한줌 재로 변해버린 뒤 그 중창의 작업에 그가 참여했던 것이다. 그는 그곳에서 다른 일과 함께 특히는 삼존불상을 조성하는 일을 했으며 각고의 노력 끝에 세분의 목불을 탄생시켰다. 지금 금산사 새롭게 지어진 대적광전 안의 삼존불은 이제 다시 화마에 휩싸이지 않는다면 저 선대의 장인들이 그러했듯 이름 없는 채 그의 작품으로 남을 것이다.
고무지우개로 비롯된 그의 작업은 나이가 들면서도 계속됐으니 참 행복한 일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는 아예 학교를 때려치우고 한 목각의 장인을 찾아갔다. 그런데 그 장인은 한사코 받아주려고 하질 않더라는 것이다. 전도유망한 한 젊은이를 도대체 배고프기만한 일거리로 어떻게 끌어들일 수 있느냐는 이유였다. 예로부터 얼마나 많은 장인들이 그렇게 외롭고 배고팠으며 스스로의 길을 잘라버렸을는지……. 그러나 그는 그 앞에 무릎을 꿇고 간절하게 거듭 애원하여 뜻을 이룰 수 있었다고 한다. 이 장면의 상황은 다분히 불교적이고 성불(成佛)적이기도 한데, 그 때문에라도 그는 불교미술품에 오랫동안 심취했을 것이다. 그는 전국의 웬만한 사찰들을 거의 모두 다녀왔으며 공부했다. 그러다가 만난 송광사의 불감과 칠불암의 조각은 그의 예술적 정열에 마지막 기름을 부어놓았다. 나도 저렇게 해야지! 내 뼈에 칼질을 함께 해간다면 해낼 수 있으리! 그는 그 조각품들 앞에서 가슴을 움켜 쥐고 앉아 그렇게 다짐을 했다고 한다. 그렇다!
지금으로부터 오래 전의 일이지만 우리나라 사람으로써는 최초로 국제기능올림픽 석공(石工)부문에서 금메달을 딴 이가 이런 내용의 얘기를 한 적이 있다.
그가 맨처음 석공일을 배우기 위해 입문했을 때, 장인은 그에게 1년동안 돌을 직면으로 깍는 훈련만을 시켰다고 한다. 그리고 그것이 됐다싶자 이번에는 곡선으로, 그것을 마치자 또 몇 년간 이번에는 둥글게 만들어내는 일만을 죽어라고 한사코 시키더라는 것이다. 그렇게 몇 년을 지낸 뒤 그는 이제 돌이라면 떡을 반죽하듯 해낼 수 있으리라고 자신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우연히 경주 석굴암을 구경한 일이 있는데 그는 석굴암 앞에 서는 순간 체면도 없이 그냥 주저앉아 엉엉 울었다는 것이다. 자만하던 날들이 부끄러웠으며 석굴암을 이뤄낸 옛 장인들의 솜씨가 고맙도록 찬란해서였다고 한다. 석굴암의 조각품이 그토록 위대한가? 어쨌거나 그는 그뒤로 다시 돌공장에 돌아와 미친 듯이 돌을 깍기 시작했고 급기야 우리나라 최초의 기능올림픽 석공부문 금메달을 따게 됐다는 이야기다.
나는 김종연이 말한 송광사 불감을 유감스럽게도 아직 구경한 적은 없다. 다만 그 자신의 불감은 여러 차례, 지금은 눈에 선하도록 구경하였다. 불감! 그것은 반원형이나 타원형, 또는 장방형의 통나무안에 부처와 보살 등을 안치시키는 불교 예술이다. 큰 것은 몇 평에 해당하기도 하지만 작은 것은 인룡주자라 해서 손톱만한 크기도 있다고 한다. 그러니까 크기야 어찌됐든 나무 안을 파서 그곳에 입체로 부처를 모시고 소나무를 심고 바위 등등을 한자리에 새기는 것이다. 그 정교함이며 정성을 어디에 비길 수 있으랴! 공중에 떠 있는 구름 한 조각이라도 밖에서 만들어 붙이는게 아니라 그 안에서 떼어지지 않게 조각해내야 하는 것이다.
그가 목어를 만드는 모습을 나는 본적이 있다. 목어라면 아다시피 사찰에서 쓰는 물속의 중생들을 제도하기 위해 두드린다는 잉어모양의 북이다. 그런데 그 잉어가 여의주를 물고 있어 대부분의 조각가들은 여의주를 밖에서 깍아 입안에 밀어넣는 방식을 취한다. 그럴려면 입안보다 훨씬 작은 크기의 여의주를 물게할 수 밖에 없어서 도대체 잉어가 여의주를 물고 있는 것인지 눈깔사탕 하나 혀 위에 올려놓고 굴리고 잇는지 알 수 없게 되고마는 것이다. 그래서 실제로 우리 나라 사찰의 목어들은 그 여의주가 뒹굴어다니다가 모두 빠져버려서 오늘날에는 대부분 여의주가 보이지 않게 된 것이다. 그러나 김종연은 그렇게 안일하게 제작하지는 않는다. 그게 그의 조각 태도의 한 단면이 될는지 모르는데, 그는 입안을 깍아내면서 그 안에서 함께 여의주도 만들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제도받지 못한 중생이 홧김에 잉어아가리를 부셔버리지 않는 한 여의주도 더러운 땅바닥에 떨어지지 않게 되는 것이니 이런 작업들은 물론 말처럼 쉽지 않은 일이다. 나와 내 친구의 장작패기 추억이 깃든 그절에는 한 게으른 승려가 있었다. 도대체 자기 먹을 양식만큼의 농사일도 하지 않으려고 할뿐더러 기껏 일을 하려한들 내 농사일의 반절에 미치지 못하고 먼산 바래기였다. 그렇다고 경전을 읽는 것도, 참선을 하는 것도 아니어서 절집에서는 적지않게 미움을 받기도 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이 스님은 누군가가 잘라간 은행나무 그루터기를 마저 잘라 지장보살을 조상해야겠다고 법석이었다. 나는 천상이 나무라고 했던가? 그날부터 나는 스님의 곁에 앉아 그 모습보기에 열중하게 되었다. 그가 빼빠를 주면서 광을 내라고 하면 나는 그것이 무슨 절을 세우는 일이나 되는 것처럼 공덕을 다했다. 그가 새벽에 조금 늦게 일어나기라도 하면 나는 내가 대신 아침 공양과 예불을 끝내고 그에게 가서 어서 일을 시작하자고 조르기도 했다. 그때 그 지장의 크기가 얼마나 됐던가? 좀 잘 자란 늙은 호박만이나 했었는지, 어쨌거나 우리는 그 하나에 한 계절을 송두리째 보내고 말았다. 작업이 끝나자 스님은 나에게도 주먹만한 관음상을 조상해주기까지 하였다.그 지장보살은 지금도 금구의 봉황사에 안치돼 있는지, 관음상은 아직도 나에게 있다. 들여다볼수록 균형이 맞지 않던, 한쪽이 남아서 조금 칼질을 하다 보면 끝내 모자라게 되고말던 그 불상의 기억을 통해 나는 도저히 미치지 못할뿐더러 상상조차 되지 않는 김종연의 작품세계를 이해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김종연이 무슨 무슨 상을 타내는 양을 좋아하지 않았다. 아주 최근 올해 들어서야 그는 몇몇 작품전에 출품했던 모양으로 ꡐ 한국예술대전ꡑ에서 대상을 받기도 했다. 서울의 큰 백화점에서 주관한 호남풍물전에 초대되어 그 솜씨 자랑을 마음껏 하기도 했다. 나는 그가 이제 세상 밖으로 서서이 나감(出世)을 감지한다. 천성이 제 그늘 아래 남을 두려고 할 뿐이지 남의 그늘 아래 깃들기는 싫어하는 게 또 나무던가? 그래서 내가 섭섭해지는지도 모를 일이다.
알고보니까 그는 이 고장 전주 바닥에서 예술혼으로 가슴이 미어터지는 젊은 작가들-화가․조각가․도예가․섬유공예가 등과 예심회(藝心會)를 조직해서 함께 활동하고도 있었다. 열 다섯명 그들은 이제 곧 그룹전시회를 계획하고 있다고 하니까 가까운 날에 우리는 그들의 모습을 볼 수도 있으리라.
그는 이제 서서이 전통공예에서 나아가 비구상계열의 작품에 흥미를 갖고 실제적인 작업도 하기 시작했다. 말하자면 대학에서 제도적인 교육을 받고 서양식 용어로 제목을 붙이는 그런 조각들 말이다. 나는 그것이 섭섭하기도 하다. 그는 지금 이른바 세계정신으로 전기대패와 전기톱을 007가방에 챙겨넣고 여객기를 타고 가려는 것인가?
그는 나에게 검은 빛으로 채색한 관음보살상을 깍아준 적이 있다. 그 구도며 잔잔한 미소, 기껏 손바닥 크기지만 한없이 넉넉하던 손길이며 가슴! 나는 그 조각품을 내 분신이듯 떼어내 다른 이에게 선물하였다. 선물하면서도 모자라던 마음이 있었다면 그것은 김종연의 탓이 아니라 사람을 향한 내 자신의 갈증때문이었거니 나는 지금도 그 불상이 한없이 그리워진다.

 나무,  목각,  장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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