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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6 | 연재 [문화저널]
전북의 실학자담헌 홍대용(2)
하우봉 전북대 교수, 사학(2004-01-29 14:01:55)

3. 호남파 실학자들과의 교류

다음으로 담헌의 호남파 실학과의 교류 내지 관계에 대해 살펴볼 차례이다. 그가 40대 후반 태인현감으로 활동하기도 하였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황윤석과 나경적과의 교류였다.
가. 이제 황윤석과의 교류
호남실학파의 기수인 이재 황윤석(1729~1791)과 담헌은 미호 김원행문하의 동문이었다. 이재는 31세 되던 1759년 정식으로 미호의 문하에 입문하여싿. 이 때 담헌의 나이는 29살때였으므로 이재가 담헌보다 2년 연상인 셈이다. 그런데 이재는 이미 3년전부터 미호를 찾아와 경서에 대한 의문점을 묻기 위해 석실서원을 방문하였으므로 두 사람의 최초의 만남은 1756년 경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두 사람의 만남은 한국과학사상 의미있는 사건이었다. 이들은 이미 서구과학사상을 수용한 한편 천문학과 이수(理藪)에 뜻을 두었고 ꡒ이수신편(理藪新便)ꡓ23권을 저술하였던 당대의 과학자였다. 일정한 사문(師門)이 없이 여러 가지 지식을 습득하였던 이재는 자연과학 쪽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서양의 근세 자연과학에 심취하였고, 그들이 주장하는바 지구자전설, 공전설, 지원설(地圓設)등을 모두 인정하였다. 역법에 대해서도 서양역법의 정확성에 감탄하면서 시헌력(時憲曆)의 도입에 적극적이었다. 그의 천문 역법에 관한 이해는 당시 조정에서도 모두 공인하는 바였고, 정조도 특별히 칭찬하였다 한다.
담헌과 이재의 교류를 알려주는 자료들은 많지 않지만 그들의 문집을 통해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이재가 미호의 문하에 입문하였던 1759년에는 담헌이 나경적을 만나 혼천의와 자명종 제작에 착수하였던 시기이다. 그것이 완성되었을 때 이재는 천원군의 농수각을 방문하였고, 돌아온 뒤 〈윤종기(輪鍾記)〉를 써서 상세히 소개하였다. 그 후에도 이재는 농수각에 들러 담헌과 같이 천문기기를 관찰하면서 천문, 역상, 수학 등 자연과학에 대한 관심과 지식을 나누었다. 영조 48년(1772)담헌과 이재는 스승 미호를 모시고 홍양으로 염영서가 만든 자명종을 같이 구경하러 가기도 하였다. 이보다 4년 뒤인 영조 52년(1776) 이재가 세자익사위 익찬(翊贊)으로 있을 때 당시 사헌부 감찰로 있었던 담헌을 찾아가 ꡐꡑ를 논하였다는 기사가 〈이재연보〉에 나온다. 또 정조 원년(1777)태인현감으로 나가 있던 담헌에게 이재가 ꡒ역상후편(曆象後編)을 빌려주신 것은 진실로 두터운 우정으로 압니다……형편이 허락하신다면 전편(前編)을 다시 빌려주시어 고구하는데 참고하도록 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ꡓ라는 내용의 답서를 보냈다고 한다.

이상의 기사로 볼 때 두 사람은 20대 후반 처음 만난 이래 거의 평생을 두고 교류하면서 자연과학에 공동관심사를 논의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특히 천문역상과 수학에 관해 깊이있게 토론하면서 영향을 주고 받았고, 자명종에 대해서도 같이 흥미를 가지며 각기 제작하였다. 이재의 〈윤종기〉에 보면 그가 시계에 대하여 고대로부터 당시 서양에서 나온 자명종에 이르기까지 체계적으로 연구하였음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은 담헌의 자명종 연구와 깉은 관계가 있다. 또 이재의 ꡒ이수신편ꡓ의 〈산학입문(算學入門)〉〈산학문답(算學問答)〉등 수학에 관한 저술에는 담헌의 ꡒ주해수용(籌解需用)ꡓ과 비슷한 내용이 많이 있는 것으로 보아 서로 활발한 의견교환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자연과학 전반에 관한 체계화에 있어서는 담헌이 위라고 할 수 있으나 역상과 수학, 시계 등에 대해서는 이재가 담헌보다 깊이있게 연구하였으며, 담헌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나. 석당 나경적과의 교류
1759년 담헌이 이재와 교류하고 있었던 그 당시에 담헌은 그이 생애의 방향에 큰 영향을 준 또 한사람의 귀한 과학자를 만났다. 이해 봄 그는 나주목사로 있었던 부친을 만나러 나주에 갔었다. 그는 아버지의 권유에 따라 화순군의 동복에 살고 있었던 숨은 과학자 나경적을 방문하였다.
당시 나경적은 나이 70세였지만 그의 서재인 물염정(勿染亭)의 책상위에는 자신이 직접 만든 자명종이 있었고, 혼천의를 제작하고 있었다. 또 나경적은 용미기(龍尾器)를 설치하여 높은 데로 물을 끌어 올리고 있었고 절로 굴러가는 맷돌을 만들어 사용하는 등 그 기술이 지극히 묘한 경지에 달해 있었다. 이 밖에도 그는 항승(恒升), 자용침(自舂砧), 자전수차(自轉水車) 등 연구하지 않은 바가 없이 모두 그 묘법을 깨쳤다고 한다. () 담헌은 나경적을 만나면서 그의 인품과 학문적 열정에 매료됨은 물론 자신의 자연과학에 대한 관심과 정열이 활짝 나래를 펴는 계기가 되었다. 29살의 젊은 실학자와 70이 넘은 시골의 과학자는 금새 오래된 지기처럼 서로를 알아보았고 친해졌으며 스승과 제자로서 학문을 토론하였다. 그는 나경적을ꡐ 기이한 선비ꡑ라고 칭송했으며 마음으로 감복하여 ꡐ문하에 다닌 것이 비록 늦었으나 서로 마음이 통합은 오래된 것과 같았다.ꡑ고 고백하였다. 두 사람은 천문관측기구인 혼천의(渾天儀)에 대해 토론하였다. 나경적은 고금의 혼천의제도를 논하고 이어 자신이 여러 해동안 연구하여 그 제작방법을 이루어 놓았으나 가난하여 뜻을 이룰 수 없다고 한탄하였다. 이에 담헌은 관아로 돌아와 아버지와 상의한 후 자금지원을 받기로 하고 다음 해 여름 나경적을 나주로 모셔 곧 의기제작에 착수하였다. 기술지도는 나경적이 맡고 실제제작은 제자인 안처인(安處人)과 몇몇 장인들이 담당하였다. 2년이 넘는 대단한 작업이었으며 제작비만도 4-5만문이 들었다고 한다.(황윤석, 윤종기)
그러나 이 때 만들어진 혼천의에 담헌은 만족할 수가 없었다. 기계가 너무 컸고 도수가 맞지 않기도 하여 천체관측에 불편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두 사람은 편지교환을 하면서 개량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 결과 1년 뒤에 만들어진 ꡐ기계혼천의ꡑ는 크기가 작아지고 톱니바퀴의 회전속도와 천문관측간의 관계를 맞추기 위해서 고도의 정확한 계산을 동원했다는 점에서 과학적으로도 아주 뛰어난 작품이라고 한다.

이처럼 담헌과 석당의 교류는 두 사람에게 뿐만 아니라 한국과학사상 귀중한 역사적인 만남이었다. 청나라 선비인 육비(陸飛)가 이들의 만남을 기려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ꡒ 동국의 홍처사 담헌은 서적에 궁구치 않은 바가 없고 육예(六藝)와 술업(術業)에 각각 미묘한 바를 얻었다. 그 나라에 나경적이란 사람이 있어 동복땅에 숨어 살면서 천문도수를 깊이 알았고, 그 문하생 안처인은 스승의 전함을 얻어 공교한 생각이 짝이 없으니 두 사람은 기이한 선비이다. 담헌이 찾아가서 강론하여 옛제도를 변통하고 장인들을 모아 3년이 지나매 혼천의 하나를 만들었는 바 농수각 가운데 감추어 두고 아침 저녁 구경을 삼으니 진실로 두 아름다움이 하나로 합한 것이다. 구하기를 부지런히 하고 다스리기를 이같이 오로지하고도 오래게 함이라.ꡓ(육비, 농수각기)

ꡒ대개 나경적과 안처인이 담헌을 얻지 못했으면 그 특이한 재주를 베풀지 못했을 것이요. 담헌이 두사람을 얻지 못했으면 마침내 큰 제도를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실로 천하의 기특한 일이 드러나지 않음이 없고 썩지 않는 사업은 멀리 전하니, 한갖 두 사람이 담헌과 만나게 됨을 다행히 여길 뿐 아니라 나 또한 세 사람에게 마찬가지로 한이 없도다.ꡓ(을병연행록)

혼천의의 제작이 끝나고 얼마 되지 않아 석당은 생명이 다하였다. 사람들은 그가 혼천의에 자신의 생명을 쏟고 홀연히 세상을 떠났다고 하였다 한다. 담헌은 석당의 영전에 슬피 울며 제문을 지어 바쳤다. 거기서 그는 석당의 덕을 칭송하며 ꡐ천리를 달려와서 충심에서 우러나는 글로써 아뢰매 영혼이 어둡지 않을진대 거울처럼 밝게 이르로 보시라ꡑ고 조문하였다.

4. 홍대용과 호남실학
기계혼천의를 만들기 위한 담헌의 집념은 나경적의 도움을 받아 3년여의 노력 끝에 이루어졌다. 29세에서 32세까지의 일이었다. 그 사이 그는 고향 천원군 수촌에 농수각을 만들었다. 그는 2층으로 된 다락과각을 지었는데, 다락을 담헌이라고 하였고, 각을 농수각이라고 이름지었다. 농수각에는 각종 천문의기를 두어 천문을 관측하였다. 나경적과 함께 만든 기계혼천의도 이곳으로 옮겨 설치하였다. 그의 친구 김이안은 이 기계혼천의에 대해 ꡐ혼천의는 옛 제도를 토대로 하고 서양의 설을 참고하여 활용한 것인데, 사람의 솜씨가 이에 이르리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울 만큼 놀라운 것이다.ꡑ(김이안, 농수각기)라고 평하였다. 이 농수각은 그 후 담헌이 중국에 사행가서 소개하여 중국에서도 유명해졌다.
20대 초반 주자학적 경학게 회의하면서부터 20대 후반 농수각의 설치에 이르기까지의 담헌의 청년시대는 벌써 과학적, 실학적 사고가 거의 확실하게 정립하였음을 말해준다. 그의 학문적 방향이 이렇게 과학적, 실학적 세계로 나아가게 된데는 나경적, 황윤석 등의 영향이 결코 적지 않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가 북경사행을 떠나기 이전에 이미 사설천문대를 설치하고 천문학등 자연과학에 상당한 경지에 이르렀다는 점에서 더욱 주목된다. 북경사행시 서양선교사들의 영향이나 천문대를 보고 자극을 받아 과학에 본격적인 관심을 가지고 이러한 업적을 남겼다는 일부의 잘못된 견해는 마땅히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홍대용의 자연과학에 대한 관심의 자취는 세 가지 갈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 싹은 석실서원의 실학적 분위기에서 시작하였으며, 다음은 정철조, 황윤석과의 교류를 통해 봉오리를 맺었고, 나경적과의 만남을 통하여 꽃피었다고 말할 수 있다.
당대의 과학자이자 실학자였던 홍대용이 스승으로 모신 호남의 숨은 과학자 나경적은 당시나 지금이나 별로 알려지지 않았던 인물이지만 그는 본래 이조참판을 지낸 나림(羅淋)의 9세손으로 학식을 쌓았고 실학적 견식이 높은 이로 호남지역에서는 소문이 났었다.(동복읍지) 그리고 향리의 큰 선비인 하영청(河永淸;1697-1771) 등과 함께 강회(講會)를 개설해 실학운동을 이끈 숨은 선비였다고 한다. 그런데 그가 어떤 경로로 서양과학사상을 접하였는지, 그의 제자 안처인 등에게로 이어진 그의 학통은 그 후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알 수 없다. 그러나 당시 호남지역의 과학사 내지 실학사를 이해하는데 있어 나경적은 매우 중요한 인물이며 그의 활동과 업적은 당시 호남실학운동의 일면을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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