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6 | [교사일기]
나는 이 길을 간다
권오인․전교조 장수지회
(2004-01-29 14:03:38)
처음 교사 발령을 받던 날 내가 과연 아이들 앞에 설 자격이 있는가? 아니 가르칠 자격이 있는가? 등 이런 저런 생각이 들었지만 웬지 교단에 서서 아이들과 함께 생활할 수 있다는 것 그 자체로써 너무도 기뻤다.
차츰 학교에 적응하면서 한달, 두달, 동료교사들과도 아이들과도 어느 정도 정이 들어갈 찰나에 이게 웬일인가.
1989년 여름, 이 나라의 교육모순을 해결하고, 더이상 독재정권의 하수인이 되지 않겠다고 분연히 떨쳐 일어난 교사들이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일명 전교조)을 결성했다. 이 노조를 결성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나는 교단에서 쫓겨나야 했다. 그래서 독재정권이 나에게 잡아준 직장은 전교조 사무실이다. 처음 해직을 생각할 때에는 그저 무직자 흑은 실업자의 모습만이 떠올랐다. 그러나 정작 해직 이후의 생활은 상상도 못할 만큼 바쁜 나날의 연속이다.
월요일 사무실 정돈 및 한주간 계획수립, 화요일 집행부 회의, 목요일 풍물모임. 이런 일들로 보낸 시간은 무지한 나에게 많은 것들을 충전할 수 있게 해준 날들이었다. 새로운 것을 익힐 때마다 그래서 가르침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그 순간마다 곧 학교로 돌아가고픈 간절한 마음과 길길이 살아 날뛰는 그리움을 주체하기 어려웠지만 나는 오늘도 여기에 희망을 건다.
교단에서 쫓겨난지 4년!
경제적인 어려움도 있지만 더욱더 가슴을 아프게 하는 것은 빼앗긴 교단과 아이들에 대한 그리움에서 오는 마음의 병이다. 헤어지던 날 울며불며 매달리던 아이들. 출근투쟁때 교실복도 창가에 나와 손을 흔들어 힘을 주던 그들 그들은 힘들고 약해질 때, 생계에 대한 압박과 당장 눈앞에 잡히지 않는 복직에의 희미한 전망으로 어딘가 가슴 한구석이 조금씩 허물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때 기억으로 또는 실제로 달려와 해직의 의미를 곧추 세워주고 가는 나의 가장 든든하고도 훌륭한 기둥이다.
친구들은 가끔 이런 질문을 한다. "너 지금 후회하지 않느냐"고, 이런 질문을 받을 때 가장 기분이 나쁘다. 누가 떠밀어서 가는 길이 아니라 내 스스로 선택한 길이며 해직됨으로써 오히려 인생의 경험을 훨씬 많이 쌓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교육현장에 있었으면 난 그 학교 교사들 밖에 몰랐을 것이다. 해직됨으로 인해 자유스러운 몸을 이끌고 내가 가고픈 학교면 모든 학교를 갈 수 있지 않은가? 가서 몰랐던 교사들도 알게 되고 교육의 문제를 함께 토론도 할 수 있다. 그러한 일들은 내 삶의 경험을 높이 쌓는 토대가 된다. 학교방문을 하면 때론 교감선생님과 다투기도 한다. 가급적이면 충돌은 피하고 싶지만, 어절 수 없는 경우가 가끔 있다.
작년에 모중학교를 방문했을 때 현관에 교감 선생님이 계시기에 인사를 하고 교무실에서 항상 하던 방식대로 신문과 자료를 나누어주고 있었다. 그런데 교감선생님이 오자마자 누구의 허락도 없이 이렇게 하느냐며 따지는 것이다. 다른 때는 안그랬는데 왜 그러실까 하면서 현관에서 인사드리지 않았느냐고 하니까, 다짜고짜 고함을 치면서 허락을 하지 않았으니까 나누어주지 말라는 것이다. 그래서 교무실에서 큰소리가 몇 번 오갔지만 끌어오르는 분노를 가까스로 삭이며 선생님들께 소란을 끼쳐 죄송하다는 말을 하고 나오게 됐다. 나오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앞을 가리운다. 같은 교육동지인데. 교육의 모순을 더 잘 알 수 있는 분인데. 아 ! 말이 나오지 않는다.
지난 4년을 돌이켜보면 전교조 해직교사임이 후회스러운 적은 없지만 부끄러운 것은 많은 것 같다.
조직의 '조'자도 모르고 운동의 '운'자도 모른다. 그런데도 나는 선택했다. 그러나 해직교사로서의 삶이 이토록 무거운지를 어찌 알았겠는가 ?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해직에 따른 책임감은 무엇보다도 능동적이고 주체적으로 일하고 싶은 의욕을 부여해주지만 참으로 매순간 역량이 부족함을 확인하며 열등감과 위축감에 주눅이 들기도 한다. 자존심을 잃지 않고, 살기 위해서는 얼마만큼의 인품과 지성과 의지를 지녀야 하는 것인지. 매일 매일 그것이 나에겐 고민이며 고통인 것이다.
또한 고통은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것이다.
부모님이 계시는 정읍에 한 달에 한 두번씩 간다. 갈 때마다 부모님께서는 건강은 어떻냐? 일은 잘 풀리느냐? 하시면서 이것저것 물으신다. 그런데 여기까지는 좋은데 그 다음이 나의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여기까지 오느라 힘들었지? 너 돈 없겠다. 이거라도 차비에 보태써라" 하시며 만원 짜러 지폐를 쥐어 주신다. 그러나 난 이 돈을 받을 수가 없다. 그 돈은 부모님의 피와 땀과 눈물이 들어 있지 않은가! 부족한 내가 어떻게 받을 수 있단 말인가?"부모님 조금만 참으셔요. 걱정 마셔요. 꼭 은혜에 보답하겠어요" 이 말씀을 드리고 싶지만 말은 꺼내지도 못하고 집을 나선다. 집을 나오면서 어느덧 나의 두눈엔 눈물이 글썽거린다.
요즈음의 생활을 되새겨보면 크게 두 가지의 고민이 떠오르곤 한다.
하나는 '해직이 되었으므로 역할을 다했다기 보다는 해직을 당한후 해직자로서 우리의 교육발전에 기여하고 있는가'이고. '나의 활동이 현장교사들에게 큰 힘이 되고 있는가'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고민은 생계도 불안감도 아니다. (물론 현실적으로는 그런 문제들이 피부에 와닿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해직의 길을 선택한 이상 올바른 관점을 가지고 교육운동을 하고 있는가'하는 것이다.
이 고민을 해결하고 나의 삶의 터전인 학교로 당당한 모습을 하고 돌아가기 위해, 오늘도 신문과 각종 자료를 들고 학교로 달려간다.
아니 이 나라 교육모순이 있는 곳이면 어느 곳이나 달려가, 때론 쓰러지고 무너져도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나 참교육의 새순이 돋아나는 그 날까지 나는 이 길을 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