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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6 | 특집 [특집]
6월 항쟁을 다시 생각하면서
원도연 전북대 대학원, 사회학과(2004-01-29 14:04:41)

웬지모를 답답함이 우리에게 있다. 광주민중항쟁 11주년을 맞이하고 87년 6월 항쟁을 4년째 맞이하면서, 다시금 무능하고 억압적인 정권에 대해 극단적인 저항이 잇따르고 전국민적 분노가 곳곳에서 촉발되고 있지만 여전히 우리는 답답하다. 오늘의 이 비상한 시국을 적극적으로 주도해가는 운동주체의 입장에서도 그리고 부릅뜬 눈으로 소위 ꡐ공공의 안녕과 질서ꡑ를 운운하는 권력의 입장에서도 다같이 시간의 흐름속에서 나타나는 국면의 변화를 가장 민감하게 주목하고 있다. 요컨대 오늘의 이 비상한 국면이 내포한 일정한 계기성의 한계와 그 한계가 어떻게 명실상부한 계급운동의 성격으로써 극복되고 진전될 수 있겠는가 하는 점이 오늘 이 국면의 가장 중요한 문제로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계급운동의 문제에 앞서서 우리를 더욱 답답하게 하는 것은 이른바 정치 허무주의와 냉소주의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요컨대 87년 6월 항쟁 이후 6․29선언을 정점으로한 권력의 적극적인 공세가 거둔 최대의 성과는 바로 각계각층에 만연한 정치 허무주의와 냉소주의로 나타났다고 할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오늘 운동주체의 치열한 공세속에서도 못내 일말의 불안과 아쉬움으로 남겨져 있다. 오늘 4년전의 6월 항쟁을 다시 생각해보는 것도 6월 항쟁의 의의를 오늘에 되살려 봄과 더불어 오늘 우리가 안고 있는 가장 중요한 문제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기 위함이다.

2.
11년 전의 세월속으로 지나가버린 5월 광주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5월 광주는 87년의 이한열을 통해서 되살아 났고, 6월 항쟁을 통해서 되살아 났으며, 다시금 강경대를 통해서 부활하고 있다. 역사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우리는 이러한 죽음과 부활의 과정들을 눈여겨 보아야 한다. 즉 하나의 사건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우리는 그 사건사건이 갖는 역사성과 사회성을 간과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87년 6월 항쟁 역시도 아직 끝나지 않은 싸움이라는 점에 우리는 주목한다.
87년 초반부터 박종철군 고문치사건과 개헌용구에 대한 4․13호헌 조치 등으로 인해 시작된 6월 항쟁은 직선제개헌 쟁취와 군부독재타도를 주된 슬로건으로 하여 6월 10일의 범국민대회 그리고 6월 26일의 국민평화대행진 등의 범국민적 항쟁을 통해서 군부독재정권을 국민앞에 굴복시킴으로써 6․29선언을 끌어낸 한국민중운동사에 유래없는 범국민운동으로 기록되어졌다. 즉 한국전쟁 이후 한국사회 최초의 민중적 승리로써 6월 항쟁은 단순히 하나의 시기적인 승리뿐만 아니라 한국전쟁 이후 철저히 파괴되었던 민중운동역량이 70년대를 거쳐오면서 87년에 이르러 민중의 힘에 의해 복원되는 정치적 사건으로서의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은 87년 6월 항쟁 이후 부분적이나마 열린 공간속에서 7,8월의 노동자 대투쟁을 통해서 그 의미가 더욱 부각되었다. 87년 7,8월 이후 폭발적으로 증가한 노동운동의 광범한 진출은 6월 항쟁이 단기적으로 마무리되는 것이었으며, 또한 민족운동의 중심으로 통일운동이 적극적으로 제기되기 시작하는 힘이 제공되었던 것이다. 바로 이 시기로부터 한국사회는 강력한 기간조직과 민족적 민중적 요구를 대중적으로 형성한 민족민중운동과 독점자본과 국가권력 그리고 해방이후 끝없이 한국사회에 영향력을 관철시켜온 제국주의 세력과의 본격적인 대치 전선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6월 항쟁의 이러한 힘은 이후 한국사회 전반에 걸쳐서 광범위한 전선을 형성하였다. 계급운동의 본격적인 진출과 더불어 사무전문직 노동운동이 교원노조운동을 중심으로 하여 곳곳에서 활발하게 진행되었으며, 언론, 학술 등의 분야에까지 그 영향력을 확대해 갔다. 요컨대 6월 항쟁의 대중적 힘은 이제 우리 사회 각 분야에서 계급계층운동의 성격으로 발전해 왔던 것이다.
3.
그러나 6월 항쟁은 한편으로 권력으로부터 변화된 공간에 대한 변화된 형식과 내용의 대응을 초래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6․29선언을 기점으로 한 권력의 공세는 87년 말의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정부수립에 실패함으로써 본격화되었다. 이러한 결과는 권력과 자본 그리고 제국주의세력의 철저한 음모 속에서 운동의 진전을 끝없이 가로막는 것이었다. 즉 6․29선언은 일견 국민적 항쟁에 대한 굴복으로 인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내용들에 있어서는 민중의 생존권 보장 및 한국사회의 모순구조에 대한 본질적인 대안들이 전혀 제시되지 않은 기만적이고 허구적인 것이었다. 이는 역설적으로 권력측의 음모가 갖는 탄력성과 힘을 보여주는 것이었으며, 동시에 6월 항쟁이 결코 끝나지 않은 싸움이라는 점을 말해 주는 것이었다.
이러한 6․29선언의 기만적 조치는 그해 말의 대통령선거를 통해서 민주정부수립이 좌절되면서 급기야 정치 허무주의와 냉소주의로 표현되는 패배적 감상을 우리사회에 만연시켰다. 이러한 패배주의가 가장 극명하게 노출된 것은 바로 지난 3월의 지방자치제 ꡐ기초의회 선거ꡑ를 통해서 나타났다. 90년 초의 3당 야합과 그 뒤를 이은 정부의 각종 강경책들과 정치권의 난맥은 국민 모두에게 정치에 대한 심각한 회의를 안겨주었고, 그것은 곧바로 선거불참률 45%의 압도적인 무관심과 냉소로 나타난 것이었다.

4.
정치 허무주의와 냉소주의는 6월 항쟁의 사생아인가, 그렇지 않다. 6월 항쟁 4주년을 맞이하면서 우리는 또다시 중대한 역사의 기로에 서있다. 오늘의 이 투쟁을 어떻게 이어갈 것인가.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우리는 먼저 오늘의 이 상황이 갖는 역사적 사회적 의미를 엄격하게 되돌아 보아야 한다. 6월 항쟁은 분명 끝나지 않은 싸움이며 6월 항쟁의 정신은 다시 오늘에 이어져 있다. 6․29로부터 시작되는 권력측의 집요한 공작은 정치 허무주의와 냉소주의를 배태해 왔다. 그것을 결코 6월 항쟁이 그리고 눈물겨운 우리의 운동사가 낳은 것이 아니다.
오늘의 이 엄중한 시기는 우리 모두에게 바른 눈과 바른 생각을 갖도록 요구한다. 운동의 역사는 언제나 승리해왔으며 심지어 그 잔혹한 죽음 조차도 승리의 또 다른 모습이다. 긴긴 투쟁의 역사 속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실패는 결코 두려운 적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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