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7 | [문화시평]
건강한 공동체 문화의 회복을 위한 의식의 전환
- 전북지역연극, 활성화 방안을 생각한다 -
김정수․연극인
(2004-01-29 14:17:42)
지역간의 갈등, 우월감과 열등감
지난 봄, 한국연극협회에 작은 사건 하나가 발생했다. 생각하기 따라서는 사건 같지도 않은 사건이었고 각 신문의 문화면에 다뤄지긴 했지만 특별히 관심을 두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그저 스쳐지나갈만한 일 이었다.
한국연극협회 부산지회는 2월 한국연극협회와 서울의 각 단에 보낸 공문을 통해 서울 극단의 부산공연에 있어 사실상 규제안을 전달했다. 내용은 건전한 공연물 유치와 부산 지역 극단과 마찰을 피하고 상호 신뢰 협조 아래 건전한 공연문화 풍토를 조성해나가기 위해 타지역 극단의 공연에 대한 내부규정안을 마련했다는 것이다. 타지역 극단의 모든 공연은 공연일 15일 전에 지회에 신고하여야 하며 소정의 수수료를 납부, 지회 기금조성에 협조해야한다는 것이 그 주된 내용이다. 그러나 공문에 드러나지 않은 사실상의 의도는 서울 소재 극단의 부산공연에 제동을 걸고 유명배우를 앞세워 관객을 빼앗아 가는 폐해를 최대한 막아보자는 자구책에 근거한 것이었다.
이같은 부산지회의 발상은 3월 초 한국연극협회가 발송한 회신공문에 의해 일거에 묵살된다. 공연신고접수는 행정기관의 고유 권한이고, 기금모금을 빙자한 기부금 징수는 기부금지법 위반이며, 그 누구도 공연자의 자유로운 공연 활동을 규제하거나 통제할 권한이 없다는 요지였다.
협회 내부의 해프닝으로 비쳐진 이 사건은 단순히 서울협회와 지방협회의 갈등 정도에 그치지 않고 숙고해야 할 많은 문제점들을 던져준다. 협회의 관료적 단순함, 서울 연극의 막연한 우월감과 지방연극의 열등감, 한탕주의의 상업연극과 그 오염, 연극인들의 배타적이며 이기적인 연극의식, 무엇보다 관객에 대한 애정 결핍 등의 함축은 뒤로하고도 우리 연극이 안고 있는 당면 문제와 활로를 생각해 볼 연결고리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지방연극과 열악한 환경의 관계
연극은 관객을 위해 존재한다. 구태여 전통적 연극의 본질이니 관중의 자발적 참여를 끌어대지 않고서도 연극은 분명 보여지기 위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연극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가 늘 문제가 되며 여기서부터 하나의 예술로서 연극의 사회적 기능을 생각하는 출발점이 된다. 또한 그 전형을 가늠해보는 토대가 된다. 그렇다 하더라도 관객을 위해 그들이 원하는 연극, 그들을 위로하는 연극을 제공한답시고 상업주의 첨병역을 자원하여 감수하는 일부 서울연극이 그 해답은 아니며, 연극은 대단히 고상한 작업이며 그 맥은 반드시 이어져야한다는 소박한 고집의 일부 지방연극도 그 대안이 될 수 없다.
신극 80린 동안 서양연극 흉내내기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했던 부러움을 갖고 있는 한국 연극은 출발부터 우리의 전통 연희 속에 내재되어 있는 현장성, 놀이성, 집단 신명 등 연극의 전통적 의의 상실과 그 이전까지 연행예술을 담당해왔던 계급과의 단절을 심화시켜 점차 기층민중의 오락과 교양의 기능으로부터 이탈되어 공허한 지향점을 향해 달려왔던 것이다. 다행히 70년대 대학을 중심으로 일기 시작한 이 문제에 관한 각성은 80년대의 정치적 상황과 사회과학적 인식의 전환을 통해 우리의 극을 새롭게 의식하는 관점의 토대를 마련했다. 그러나 한국적 연극을 창조하고자 하는 민족극 운동 계열의 꾸준한 시도와 제도권 연극 내에서의 산발적이나마 일고 있는 개혁의 열정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그 전형을 획득해내지 못하고 예술론, 극형식론의 차원에서 머물고 있는 것이 실정이다. 물론 이 문제는 결코 이론이 해결해 줄 수 없는 부분이 존재한다. 따라서 꾸준한 방향설정에의 고심과 모색, 공연을 통해서 획득해나가야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사람'을 위하고 '사람이 사는 곳'을 사랑하는 기반위에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상황하에서의 전복연극은 어디쯤에 위치할까? 열린 연극을 향한 선도적 위치를 확보하지 못하고 아직도 서울과 지방이라는 양분적 사고의 희생자나 변명의 방편으로 삼는 방관자 입장에 서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볼 일이다.
서울연극이 그 어느 지방연극 보다 극작이나 연출, 기획, 연기에서 우위에 있는 것은 사실이다. 서울의 문화적 영향을 받는 수도권의 인구가 전체 인구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것으로만도 비교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지향해야 할 연극의 전형은 그것과는 다른 차원의 것이라는 점을 전제하면 지방연극이 서울연극을 언제까지나 눈치보며 견제할 아무런 이유가 없음을 알게 된다. 오히려 서울의 난삽하고 대형화된 문화양상에 비해 지방의 전통의식을 기반으로 한 독창적이고 활발한 극문화가 건설될 수 있는 좋은 조건을 구비하고 있다는 가정이 성립 될 수 있다.
지방연극을 말할 때 전세낸 듯 쓰이는 '열악한 환경'이란 표현은 대안, 혹은 자기반성 없이 어느 때는 행정기관의 무관심, 어느 때는 극장을 찾지 않는 다수의 잠재관객을 향해 그 칼날이 돌러졌다. 또한 그 배면에는 열악하지 않은 환경, 열악하지 않은 연극으로 은근히 서울연극을 한자락 깔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서울연극이 지향해야 할 대안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그리고 그 대안이 서울연극이니 지방연극이니 하는 세련미 경쟁 위주의 예술성을 담보로 하는 형식상의 문제가 아니고 내면적이고 본질적인 문제라고 생각한다면 그러한 부담으로부터 멀찌기 물러나 있을 필요가 있다. 더불어 '우리 농산물 애용 운동'과 같은 지방연극 활성화방안도 수정되어야 한다.
좋은 연극만들기의 초석, 전북의 좋은 관객
전북 지역에 정기적인 공연활동이 시작된 지 30년이 흘렀지만 외형적 상황은 30년 전이나 별반 달라진 모습이 없어 보인다. 그동안 몇 개의 소극장이 운영되었으며 기획면에서의 다소 조직적인 변모가 변화이긴 하지만 사명감을 가진 몇몇의 헌신적인 희생을 제물 삼아 유지되어오는 극단 성격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사실 전북연극을 담당하는 연극인층은 두텁지 못하다. 관이나 기업의 지원 역시 활발하지 않다. 전북일원에서 정기적인 공연을 통해 활동하는 몇 개의 극단에서 갓 입단한 신입단원이나 작품에 직접 투입될 수 없는 주변단원을 제외한, 최소한 4~5년의 경력을 갖춘 단원은 모두 합해봐도 30명을 넘지 못한다. 또 이들 중에는 상당수의 대학생들도 끼어 있어 아마추어의 벽을 뛰어넘는데 적지 않은 장애가 생긴다
여기에는 무시 못할 경제적 문제가 결부되어 있다. 일찍 극단에 뛰어들어 어느 정도 수련기를 거친 후 능력을 발휘할만 하면 개인적인 경제고를 해결할 수 없어 극단을 떠날 수 밖에 없게 된다. 30대 연기자가 불과 손에 꼽을만하고 대부분 30대 연기자가 중심인 전북 극단의 상황은 이를 대변한다. 그만큼 연기의 폭과 깊이를 기대하기 힘들어지는 것이다.
적은 인원과 빈약한 경제력을 가지고 작품을 제작해야 한다는 것 이외에도 눈에 보이지 않는 부담은 많다. 연기나 연출, 극작, 공연행정을 이론적으로 강의하는 대학이 전무한 가운데 극단 자체에서 해결해야 한다는 것도 그중 하나다. 공연 기획도 하고 자체내 소극장을 가진 극단은 소극장 관리 운영의 문제를 안고 있다. 이들을 분리해서 담당한다면 절대적인 인력난과 경제난을 드러낼 것이고 이들을 보듬고 나가자니 한계가 노출된다.
이 뿐만 아니다. 요즘 들어 부적 늘어나고 있는 서울소재 극단의 지방 공연도 지방소재 극단의 사기를 저하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그것도 예술적 성실함이 돋보이거나 극적 기능이 긍정적으로 작용하는 작품 같으면 좋은 일이지만 지명도 높은 탈랜트를 앞세운 흥행위주의 공연이 휩쓸고 지나갔을 때는 더욱 그렇다.
이런 환경들 속에서 극단을 운영해나가는 것이 대부된 지방 극단의 현실이지만 그렇게 비관적인 것만은 아니다. 최근 들어 공연되는 각 지방극단의 작품수준이 서울 극단에 비해 뒤지지 않는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특히 전북의 관객 수준은 타 지역에 비해 월등히 높다. 관객의 높은 관심은 좋은 연극 만들기의 초석이 된다. 불리함을 강점으로 활용하는 지혜와 주변의 관심이 계속된다면 몇 년 지나지 않아 전북연극은 명실상부한 지역연극으로서 당당하고 의연하게 독창적인 연극문화를 창출해 낼 수 있을 것이다.
전북연극 위상 정립과 명칭 변경
최근 연극협회 전북지회 집행부의 변동이 있었다. 사사로운 내부의 문제가 끊임없이 제기되더니 급기야 일괄사퇴와 재구성의 단계를 거쳤다. 새출발을 기해 그 명칭도 기존의 '한국연극협회 전라북도지회'에서 '전라북도 연극협회'로 변경했다. 전북 연극의 독자적인 활동 영역의 선포와 그 실행이라는 측면에서 고무적인 발상이었다.
물론 명칭의 변경만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명실상부한 전북연극의 위상 정립이 앞으로의 과제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기실 협회란 극단이 모여 구성되는 협의체가 되어야하며 극단과 괴리된 독립된 활동은 생각하기 힘들기에 철저히 극단 활동을 지원하고 활성화시키는 방향에서 모든 사업을 추진해나가야 한다.
각 극단의 대표들을 빠짐없이 참여시켜 극단끼리의 유기적 협조 체제를 공고히 하고 타 시, 도와의 정기적인 교류와 정보, 공연 교환 등 극단 단독으로 실행하기 벅찬 문제를 측면 지원하는 것도 바람직할 것이다.
행정관서의 지원도 시급한 일이다. 유명무실한 시립극단 활성화 방안이 이제는 구체성을 띠고 논의되어야 하며 구호와 전시만의 문화도시 건설이 아닌 장기적이고 정책적인 입안이 극예술 실무자들의 의견을 충분히 수렴하여 세워져야 한다.
아직은 시작 단계이어서 영세성을 면치 못하고 있지만 각종 공연기획 대행업체들도 눈앞의 이익에 급급함을 떠나 흥행성보다 작품에 비중을 두어 외지작품을 초청하고, 지방극을 활용할 수 있는 기획행사 추진도 생각해 볼만하다. 또한 허울좋은 문화사업을 내세워 영리를 추구하는 일부 언론사, 문화단체들도 진솔한 입장에서 지원을 고려해야 한다.
대학도 예외는 아니다. 수급의 난점으로 연극학과 신설 등은 어렵다 할지라도 대학의 상당수 국어국문학과에서 단 한강좌의 희곡론도 강의하지 않는 세태는 쉽게 납득할 수 없는 부분이다. 희곡은 문학의 한쟝르이면서 현대연극에 있어서는 극의 완성을 좌우하는 핵심이다. 희곡문학에 관심을 가진 학생들을 배출할 때 장기적으로 연극의 발전은 뒤따를 것이다.
연극, 증합예술로서의 그힘은 유효하다
우리의 대중 문화는 소외감에서 오는 무기력을 극복하고 건강한 공동체 문화의 회복과 개인 의식을 지향하기보다는 그 소외감을 오히려 증폭시켜 자아상실과 사회적 무감각을 조장하는 문화였다. 비디오와 노래방으로 대변되는 문화가 손쉽게 인정되어서는 안된다.
이런 시대에 연극의 위상은 끊임없이 위협받고 회유 받는다. 그러나 아직도 종합예술로서의 그 힘은 유효하다. 아니 유효할 뿐만 아니라 왜곡되고 단절된 사회에서의 유일한 출구의 역할도 기대할 수 있다. 최근 사회적 문제를 강하게 제기했던 김부남 사건, 환경 문제에 관심을 불타 오르게 TDI사건, 교육문제를 반성하게 했던 입시생의 투신 자살사건 등은 바로 우리 이웃에서 일어난 우리들의 문제였다. 결코 우리는 '사랑이 뭐길래'류의 마비된 의식 속에서 살아갈 수 없다.
여기에는 서울연극 지방연극이 있을 수 없다. 동등한 입장에서, 각자의 지역에서 활동하는 지역극단으로서의 역할 인식과 과정이 필요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