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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7 | [문화칼럼]
문화척도와 굴뚝수의 관계, 그 문제는 의식에 있다
김남곤․전북일보 논설위원 (2004-01-29 14:18:45)
1. 어디선가 읽었다. 그 기억속에 오래도록 퇴색하지 않는 대목 하나가 있다. 정확하게 옮길 수 있는 능력이 없어서 유감이지만 대략 「문화라는 척도를 말할 때 이를 닦는 치약이나 어떤 공장의 굴뚝수가 많고 적음에 따라서 다루어질 수는 없는 것이다. 오직 착한 사람이 얼마나 있는지에 따라 재어져야 한다」라는 말이 그것이다. 그 구절을 만났을 때 나는 이 시대를 호흡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선․악에 대한 인식의 차이와 그에 따른 황금분할의 미감 같은 것을 그러면서 적잖이 공포를 가누지 못했다. 이 시대를 엮어가는 사람들을 문화라는 척도 밑에 구분 짓는다면 선과 악이 차지하는 질량은 과연 어느 쪽으로 저울대가 기울게 될 것인가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분명히 말해서 문화의 척도가 치약이나 공장의 굴뚝수가 아니라면 선․악 중 우리 주위에 택일해야할 사람은 어느 쪽이 란 말인가. 두 말할 나위도 없이 착한 사람 쪽이 아니겠는가. 그런 아름다운 구도의 등식을 원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착한 사람이 많은 우리 사회에서 아직도 문화의 척도를 꼭 치약이나 공장의 굴뚝수에 두고있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과도기적 현상이라고 보는 것인가. 그렇다면 악한 사람도 많다는 논리의 도착을 어떤 식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인지 군색해지고 만다. 이 시대가 문화의 가치를 가지는 척도는 있는가. 다만 우리가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치약이나 공장굴뚝이 설령 타지역에 비해 적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떨어져 있다해도 그 논리대로라면 선의 밀도가 악의 그것보다 훨씬 조밀하다는데 있다. 우리 전북은 검은 연기를 내뿜는 공장의 굴뚝수와는 아무런 관계없이 문화수준이 높다는 말을 주특기처럼 들어왔다 그런데, 실질적으로 도민들의 견해는 과연 그렇다고 인식하고 있는지 그것이 문제이다. 2. 「명색이 좋다」는 말이 있다. 실질적인데가 없고 이름만 번지르르 하다는 풀이일 것이다. 「예도전북」이 꼭 그 모양이다. 기관장들의 연설문 속에서나 반짝 빛나다가 다시 빛 바래지는 그런 대명사로 족하다. 필요하다고 느낄 때면 장소도 가리지 않고 때도 가리지 않은 채 전매특허처럼 입에 매단다. 그것이 유식하고 점잖은 척 외쳐대는 「예술의 고장」이라는 다섯 글자이다. 그것을 무슨 견장이나 훈장처럼 차고 다닌다고해서 누가 시비할 사람은 없다. 그처럼 아무에게도 세금이 매겨지지 않는다. 먼저 사용하는 사람이 주인이고 기득권을 주장할 수도 있는 일이지만 선후 관계없이 백이면 백, 서로 엇바뀌어도 동티가 나지 않는다. 그들의 입은 반질반질하게 다듬어져 있다. 그러나 아무리 크게 외쳐 은폐하려해도 한계는 극복되지 않는다. 그 비극적인 한계상황은 이 고장 예술의 전당인「전라북도예술회관」의 협소한 규모 하나가 에누리없이 일러주고 있다. 웬만하면 거기에서 크게 빠질 법도 한데 기죽거나 자극 받는 일도 없다. 무감각이다. 그러니까 문화예술행사에 대한 예산지원을 요구해도 기다렸다는 듯이 반갑게 찾아주는 일이 없이 언제나 들어가는 인상만 풍기는 틀이 되고 만다. 뜯고 뜯기는 편보다 주고받는 편이 훨씬 좋을텐데도 항상 예산타령꾼만 되고 마는게 우리들의 비참한 처지다. 누군가는 그랬다. 전북을 「예술의 고장」이라고 주장하기엔 이제 달밤의 비단옷이 되고 말았다고 말이다. 이미 전국의 각시․도가 평준화돼 있기 때문에 오히려 평가절하 될 우려마저 안고 있는게 전북의 실상이라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문화예술의 도시가 아닌 곳이 없고 교육의 도시, 아름다운 도시를 과시하지 않는 도시가 없다. 그들이 그들 자신의 것을 그처럼 풍성하게 가꿔 오는 동안 우리는 무엇을 했느냐는 반문을 누구에게 해야 하는가. 문화예술인 스스로에게도 책임이 없는 것은 아니다. 전북의 문화예술이라는 대명제를 놓고 한 깃발 아래에서 하나의 현안을 둘러싸고 그 성사를 위해서 고뇌한적이 얼마나 있는가. 각자는 치열하되 집단이나 단체는 오히려 이합집산하는 그런 국면은 없었는가 반성해 볼 일이다. 여러개의 싸릿대를 묶으면 광장을 쓸고도 남을 빗자루가 되고 여러 개의 통나무를 엮으면 몇 천리 강하를 굽이칠 뗏목이 된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3. 문제는 의식에 있다. 큰 것을 크게 볼 줄 모르는 눈과 큰 소리를 크게 들을 줄 모르는 귀와 큰 주장을 크게 외칠줄 모르는 입에 있다. 그 의식의 「없음」이 오늘의 「없음」을 있게한 주범이다. 우리에게는 큰 우러름이 있다 우리에게는 큰 함성이 있다. 우리에게는 큰 지킴이 있다. 「동학농민혁명백주년기념사업회」의 출범을 엄숙히 선언한다는 황토현의 민주 횃불이 그것이다. 정치적 폭풍 앞에서도 꺼지지 않은 그 불꽃은 고부의 들불이 아니라 이 나라의 어둠을 밝히는 수천억 측광으로 승화되어야 한다. 백제 유민의 마지막 항쟁지였던 주류성의 돌멩이에 스며있는 함성도 읽어야 한다. 동양의 최대 석탑이 치솟은 미륵사지의 허허 벌판은 그대로 바람의 통로로만 놔둘 수는 없는 것 아닌가. 그리고 동리 신재효는 모양성밑에 국악당이라도 앉혔지만 권삼득은 어쩔셈인가. 또 전북예술의 산실이 될 「전라북도 예술회관」은 언제 어디다가 지을 것인가. 이미 타지역에선 그런 작업들이 쉽게 끝났거나 진행중에 있다. 전북은 문화예술인이나 행정당국자들의 안대가 너무나 두껍다는 생각이 든다. 전북다운 소극이며 전북인다운 방관이라 한다면 지나친 자폐를 탓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실은 냉엄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현주소이기 때문이다. 전주 입성터에 동학혁명탑 하나가 곡창의 하늘을 높이 찔러야 한다. 거기 또 어디쯤에 국악의 발상지답게 합죽선을 손에 쥔 권삼득의 소리 모습도 저하늘이 쩌렁하게 울리도록 세워져야 한다. 전북이 그런 떳떳한 상징성을 내비치지 않고 이제 까지 무엇을 했는지 알 수가 없다. 항상 없고 눌려서 사는 사람이라고 해서 있는 「자랑」도 감추며 살아야 한다는 당위가 어디 있단 말인가. 제 것도 못 찾는 미력한 사람이나 제 것도 찾아주는 무력한 사람이 우리는 한사코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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