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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2 | 인터뷰 [아름다운 당신]
내 그림이 치유의 통로가 된다면
천인갈채상 받은 서양화가 이일순
이세영 기자(2014-02-05 10:00:32)

1천명이 1만원씩 모아 상금을 주는 ‘천인갈채상’. 천년전주사랑모임이 한 해 동안 활동이 두드러진 문화예술인 두 명에게 주는 상이다. 올해 천명의 박수를 받으며 후원금을 받게 된 서양화가 이일순 씨. 수상소식이 전해진지 며칠이 지났지만 그는 여전히 사실인지 싶다.

“수많은 예술인 중에서도 부족하고 내세울 게 없는 제가 후보가 됐다고 해서 깜짝 놀랐어요. 추천만 받아도 좋았는데 수상했다는 전화를 받고 지금도 얼떨떨하기만 해요. 수상할 거라는 생각도 못했는데 제 작업을 의미있게 평가한 분들에게 감사할 뿐이죠.” 천명의 사람이 모아 상금을 주고 투표를 통해 상이 결정되는 거라 그에게는 더 의미가 크다고 했다. 앞으로 작업을 하는데 천인갈채상이 큰 힘이 될 것이라며 기뻐하는 그와 마주 앉았다. 동화적 상상력이 넘치는 그의 그림이야기는 또 다른 그의 인생이야기이기도 했다.

 

 

색과 형의 단순함,  그리고 그 진화형

 

그의 작품 성향이 대학시절부터 시작된 것은 아니었다. 생각하는 것보다 즉흥적인 작품을 만드는데 매료가 됐던 그의 초기 작품은 다분히 표현주의적이었다. 오브제나 표현주의가 성행하던 시대적 흐름에 의심없이 그런 작업들을 했었다. “지도교수님은 제 작업을 보고, 하고 싶은 게 뭔데 그렇게 난리를 치냐고 했어요. 장편소설은 쓸 수 있을지 몰라도 시는 쓸 수 없을 거라고 했으니 제 작업이 성공적이지는 않았나 봐요.

그런 그의 그림은 92년 전북미술대전 우수상, 94년 전북미술대전 특선, 95년 대한민국미술대전 특선을 받으며 ‘신예작가’의 타이틀을 따게 했다. 하지만 첫 개인전을 앞에 두고 그의 고민은 깊어만 갔다. 과거의 의심들에 대한 답을 구하고자 했고 그만의 그림세계를 구축하도 싶었다. 그가 내린 결론은 “불필요한 것을 없애자”였다. 그동안의 작업들에서 군더더기를 하나 둘 빼자 어느 날, 그림이 단순해졌다. 그가 하고자 했던 이야기의 정수만 담겨 있는 것 같아 보기 좋았다. 그의 첫 개인전에 사람들은 ‘그림이 변했다’며 의아한 시선을 보내기도 했다. “저는 단순한 삶을 원했어요. 관계가 자꾸 삶을 엉클어 놓지만 단순하게 바라보고 단순하게 사는 것이 목표였죠. 제 작품도 그런 삶의 연장선이었어요. 현실에서는 여러 관계 속에서 단순할 수 없는 삶을 그림으로 실현하고 싶다고 할까요. 

그의 그림스타일이 된, 단색의 배경에 단순화된 형으로 사물들이 그려진 그림은 일러스트적인 요소가 강하다. 조목조목 뜯어보면 질감이 보이지만 강렬한 색채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첫 번째 개인전부터 그가 화두로 삼고 있는 ‘단순함’의 진화형이다. 현실을 비껴나 있는 단순한 형과 색은 모차르트의 작은별 변주곡처럼 재미를 주는 요소가 된다. “반짝 반짝 작은별”이 주는 밝고 명랑한 곡의 분위기는 어쩐지 그의 작품과도 닮아 있다. 단순한 가락이 화려한 변주곡이 되듯, 그의 단순한 형과 색은 넉넉한 여백으로 풍부한 상상력을 자극한다.

그림에 담긴 이야기는 그 의심을 더욱 명확하게 해준다. 현실적 형과 색을 벗어낸 그의 그림은 동화적 상상력으로 소소한 일상을 담아낸다. 그리고 그 그림으로부터 상상과 현실의 경계를 넘나들며 팍팍한 일상을 벗어날 수 있는 순간을 만들어낸다. “사물을 제 나름대로의 규칙으로 표현하다보니 색감이나 형태가 사실감을 벗어나고, 내가 원하고자 하는 형을 집어넣기 때문에 현실적이지 않고, 마치 이야기를 위한 그림으로 변화돼 보여요. 그 이야기들은 매일 만나는 거리의 풍경과 사람들이지만 과거의 시절로 돌아가기도 하고 이야기책에서 봤던 내용과 결합되면서 새로운 문을 열게 된다고 할까요, 일상이 상상으로 또 상상은 현실이 되기도 하죠.

 

 

일상의 풍경으로 그려내는 희망의 세계

 

이런 초현실적인 작품 분위기는 그의 작품 전반을 지배한다. 그렇다고 그의 이야기가 상상 속에 존재하는 것만은 아니다. 현실에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기에 곱씹어 내 일상을 되돌아 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어린 시절부터 하늘의 별보기를 좋아했다. 도시에서 살다보니 하늘은 보통 암갈색일 때가 많았는데 가끔 검고 푸른 하늘을 보면 신비로우면서도 스르륵 소름이 돋기도 했었다. ‘내가 무슨 죄를 지었나? 왜 하늘이 무섭지?’ 이 작품은 지난 2001년에 유성우를 보고 행복했던 기억을 옮겨보았다. 멋지죠!! 누구든 이런 날을 만날 거예요!!!

<초대>를 설명하는 그의 글처럼 그림을 과거와 현재, 현실과 허구를 잇는 이야기책으로 만들어 낸다. 그의 작품에 대해 미학박사 손청문이 “자신을 둘러싼 존재 일반의 사태를 관조적 시각으로 응시하여 그 단상들을 지극히 압축적이고 정형적인 조형체계로 재구축하는 것”이라며 “작가에게 기억된 일상은 단순한 과거가 아니라 현재를 환기하는 과거이자 현실을 통해 바라보는 미래로 자리매김하고 있다”고 적은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일 것.

이렇게 그의 그림은 하나하나 사연을 담아낸다. 2005년부터 치유라는 주제로 작업을 했던 것도 그의 생활에 대한 비상구였을지 모른다. 이사한 집의 이웃과 마찰을 빚으며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들이 힘들어했다. 갈등은 커지고 마음은 피폐해졌다. 그의 생활도 빡빡하게 돌아갔다. 육아를 하면서 미술학원을 하는 것은 몸과 마음을 지치게 했다. 학원, 육아, 집안일의 일상이 쳇바퀴 돌 듯 했다. 그런 생활은 2006년까지도 계속되었고 완성하지 못한 그림은 방안 가득 쌓여가기만 했다. “학원에 갇혀서 계절이 지나는 것만 바라봐야하는 생활이었어요. 돈벌이와 집안살림을 하면서 그림을 그리다보니 그림이 재대로 그려지지도 않았죠. 그리다 세워놓고, 생각나면 다시 그리는 일들이 반복됐을 뿐 완성된 그림을 그릴 수 없었죠.

그해까지 그는 슬럼프를 겪었다. 그저 쉬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탈출 시도는 그림으로부터였다. ‘내 상태에 대해 그림을 그려보자’ 생각했다. 홀로 웅크려 괴로워하는 인간에게 말을 거는 동물로 그의 심경이 표현됐다. 이 그림은 2008 <위로>의 바탕그림이 됐다. “그렇게 웅크려 있지만 말고 꽃피는 좋은 세상에 나와 봐라 하는 생각을 그려냈어요. 그림을 다 그렸다는 것에 만족했고, 손도 풀리고 마음도 열려 작업을 다시 할 수 있었죠.

그래서 그에게 그림은 고마운 존재다. 아니 그림을 그리는 행위 자체가 그에게는 큰 의미다. 2010년 무렵 그려내기 시작한 <> 시리즈도 비슷한 경우다. 그와 가까운 사람이 힘든 일을 당했는데 가진 것 없는 그가 해줄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의 재능은 하나, 그림이었고 삶이 힘든 사람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고민하다 그려낸 것이 <>이다.

그렇게 그림 안에 자신과 주변의 이야기들을 집어넣으면서 마음의 갈증을 해소할 수 있었다. 어떤 작가는 자신을 닮은 작품을 그린다는데 그는 작품을 닮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도 그림에 그의 이상향을 담는 때문이다. “도시에서 살다보면 잡다한 스트레스와 상처가 많잖아요. 그러다보니 여행과 산책을 하며 일상을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많이 들더군요. 그림을 보면서 낯선 공간으로 여행을 간 느낌, 즐겁고 아름다운 추억을 되살리며 쉴 수 있는 순간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었죠. 그림을 내어 놓기도 전에 그림을 그리며 제 마음이 치유됐어요.

 

 

치유의 기쁨 주는 그림을 그리는 꿈

 

침체기를 거쳐 새로운 작업실도 내고 작업을 한지 3년여. 그의 그림이 주는 메시지처럼, 그림 그리는 행위가 그를 치유하고 있었던 것일까. 기쁜 소식들이 날아들었다. 지난해 서울과 전주를 넘나들며 세 번의 개인전과 초대전 등 10여회 전시 기회가 찾아왔다. 기운이 쏙 빠지게 했던 8월의 한여름 서울 전시 등 매달 전시를 치러내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3년의 성과를 보일 수 있다는 것은 기쁜 일이었다. 그리고 지난해 새롭게 내놓은 작품은 또 다른 느낌의 그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제 작품 스타일상 다작을 할 수는 없어요. 캔버스를 두껍게 칠하기 위해 한 번 그리고 묵혀두고 다시 꺼내 그림을 그리는 것을 반복해야 하죠. 지난 해 전시는 그간의 작업과 새롭게 시도하고 있는 작업들을 비교할 수 있는 시간들이 됐다고 생각해요.

그의 작품이 변화를 겪게 된 데는 외부의 힘이 작용했다. “너무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 아니냐”는 평에 그는 많은 고민을 했다. 조금씩이지만 작품에 변화를 주고 있었고, 아직 더 할 이야기가 남았다고 생각했다. 여전히 그의 작품이 완성되지 못했는데 왜 그런 이야기들이 들리는지 불만을 가지기도 했다. “이미지가 강하다보니 작은 변화들이 눈에 띄지 못했던 것 같아요. 밖에서 들리는 소리에 화가 났지만 변화를 추구해야 할 때를 찾고는 있었죠. 그 고민의 끈을 놓지 않고, 환경도 변화면서 어느 순간 이렇게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가 새롭게 시도하고 있는 작품들은 <>에서 보이는 것처럼 색을 배재하는 것들이다. 단색에 가깝게 초록으로 배경과 나무들이 칠해져 있다. 형태의 단순함을 넘어 색의 단순함으로 생각을 표현해내고자 하는 그의 시도다. “기존의 작품들에는 원색과 파스텔톤을 섞어 원색의 강렬함이 있었어요. 색은 공간을 장악하기도 하고 메시지를 주기도 하는데 색을 단순하게 함으로써 단순함의 미학을 추구하고 싶었어요. 아직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 고민하며 요렇게 저렇게 하고 있는 상황이죠.” 그의 새로운 시도는 드로잉적인 요소를 어떻게 살릴 것인가에 대해 고민이기도 하다. 그간의 작품이 색감의 중요성에 대해서 인식하게 해줬다면 톤의 단순함도 좋은 것을 줄 수 있음을 여러 사람에게 알려주고 싶다고 했다.

형태의 단순함으로 메시지를 전달해 온 그가 색의 단순함을 통해 들려주는 이야기는, 같으나 다른 이일순의 삶을 만들어가는 새로운 여정이다. 그의 작업이 어떤 성과를 낼지, 어떤 평을 듣게 될지는 아직 미지수다. 그가 만족하고, 밖에 보이고, 반응이 돌아오는데 몇 년의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러나 그게 예전만큼 두렵지는 않다. 팍팍한 전업작가의 생활을 뛰어넘을 그림이 그에게는 있다. 그리고 그 그림을 그리게 하는 응원들이 존재한다. “예전에는 그림 그려야 하는데 하면서 한눈파는 것을 안했는데 요즘은 할 만한 일들을 찾아요. 작가가 뭐 그러냐 할 수도 있지만 여유를 찾은 느낌이랄까요. 지치고 힘들 때 작품이 팔린다거나 우연히 전시 기회가 생긴다거나 소소하지만 작업을 계속할 수 있는 힘들이 생기더라고요. 이번 천인갈채상도 마찬가지예요. 이만한 상을 받았으니 또 힘을 내서 작업을 해야겠죠.

그의 그림이 미술사적으로 남을만한 작품은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대중과 더 가깝게 갈 수 있는 작품들에 대한 욕심은 많다. 그림을 통해 치유되고 기쁨을 느낄 수 있는 사람들이 늘어갈 수만 있다면 그는 만족한다. 순수예술을 지향하더라도 더 많은 사람들과 공감할 수 있는 방법들을 모색하는 것도 그 이유다. 카페전이나 인터넷, 잡지 표지 등에 그의 작품들이 실길 길을 찾으며 대중과의 연계고리를 넓혀갈 생각이다. 다양한 미디어를 통한 작품의 확장성도 생각한다. “지난해 예술인 기획에 대한 교육을 받았어요. 화실에서 그림만 그리고 있다 보면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은데 많은 도움이 됐죠. 그리는 행위로만 미술활동을 하는 것에서 벗어나 제 작품을 통해 원하는 소통의 방식들을 만들 필요가 있다고 봐요. 새로운 미디어를 활용한 작업을 위해 공부하고 연구할 필요가 있어 보여요.

사람대신 동물, 나무, 물건들로 대치되어 그림에 나타나듯, 그는 ‘방콕’을 지향한다. 자신을 드러내는 것도, 상업적인 것도 꺼려하지만 그 길이 그림의 외연을 확장하는 길이라면 갈 것이다. 청량한 숲을 거닐고 유성우 쏟아지는 구름을 밟으며 푸른 들판에서 편히 쉴 수만 있다면 그럴 것이다. 그것은 그의 꿈이자, 모두의 꿈이기에 그는 상상을 그려낼 것이다. 모두의 ‘치유’를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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