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7 | [서평]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
(고정희, 창작과 비평사, 1992)
조명원․편집위원
(2004-01-29 14:22:14)
고정희 시인이 지리산 계곡에서 불행한 사고로 우리 곁을 떠난 지도 벌써 한해가 지났다. 그의 기일인 6월 9일에 맞춰 창작과 비평사에서 유고시집을 내놓았다. 사고나기 한 주일 전쯤에 시인 자신이 정리해 놓았다는 원고가 대부분인 만큼 이미 예정되어 있던 출간이지만, 뜻밖에 머리에 '유고'라는 수식어가 붙게 되어 시를 읽어가는 행.간에 어쩌면 불필요할지도 모르는 감상 조각들이 끼어드는 걸 어찌할 수 없다.
더우기 맨 끝에 도마뱀 보리처럼 붙어 들어간 두 편의 시(「사십대」와 「독신자」)가 그런 감상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만든다. 그러나 '죽음의 예감' 운운하는 것은 적어도 고정회의 삶과 시세계를 들여다보는데 있어서 신경 거슬리는 요소가 될 것이 분명하다. 그만큼 그의 삶은 역동적이었고, 그의 시는 해방으로 열려 있는 건강성 그 자체라 말해도 좋을 것이다.
필자가 고정희 시인을 알게 된 것은 불과 몇 해 전의 일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또 하나의 문화'라는 여성운동 단체와 『여성해방 출사표』라는 그의 아홉번째 시집을 통해서였다. 그 이후 간간이 들러 오는 그의 활동상(필리핀까지 날아가 '탈식민지 시와 음악 워크샵'에 참석했네, 『가족법 개정 운동사』를 만들어 냈네, 하는 것들)을 두고 그저 "참으로 부지런하고 씩씩한 여자구나!", 감탄하는 정도였다. 그러나 그 감탄은 이제 탄식으로, 주제넘은 그리움으로 바뀌어 간다. 그가 남겨 놓은 여백이 그만큼 크다는 얘기다.
그렇다 해도 우리는 그 여백이 무엇으로든 메꾸어지길 기다리고 있음을 안다. 그것은 시인이 짧은 시간동안 이 땅에서 열심히 심고 가꾸었던 여성해방, 인간해방의 꽃과 열매를 거두는 일이 될 것이다.
사실, 이 시집의 제목이 「여백」으로 선정된 것은 전혀 시인의 뜻이 아닌 듯하다. 그가 붙이고 싶어한 제목은 이보다 훨씬 힘있고 투쟁적인 것들(『밥과 자본주의』, 『밥노래』, 『아시아의 아이에게』)이었다 한다. 여기 실린 시들의 내용 역시 대자본주의 투쟁, 여성억압폭로, 통일에의 꿈 등에 무게가 실려 있다.
고정희에게 '밥'은 '가난한 백성의 쇠사슬'이자 '민중을 후려치는 채찍'이며, '죄없는 목숨을 묶는 오랏줄' 나아가서는 '영혼을 죽이는 총칼' 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녀와 주인님이 사는 이 땅 위에서'만 그럴 뿐, '그 나라'가 오면 밥은 곧 '평등', '평화', '해방'이며 '함께 나누는 사람'이 될 것이다(「민중의 밥」).
그가 꿈꾸는 나라는 하느님이 평등으로 점지해 준 땅이다. 그러나 그 하느님은 언제부터인지 '행방불명'되어 출소장을 받고도 쉬이 나타나지 않는 무정한 하느님이다. '반평생을 뼈빠지게 일한자나 일년을 혼빠지게 일한 자나 똑같이 임금을 체불당한 채 밀린 품삯 받으러 일본으로 미국으로 다국적기업 뒤꽁무니 쫓아간 우리 딸들이 임금 대신 똥물을 뒤집어쓰고 울부짖을 때' 침묵만 지켰던 하느님에게 '당신은 지금…… 세상이 너무 재미없어 쟈니 윤의 쇼프로그램에서 미국식 웃는 법을 익히고 계십니까'라는 불경스런(?) 질책을 서슴없이 뱉어내고, 그것도 모자라 이제는 '교회로 돌아와', '너무 많은 재물'과 '너무 많은 거짓'과 '빼앗긴 백성들이 갖지 못한 것을 다'갖고 있는 '교회의 창고부터 열'라고 명령하기까지가 신학대학을 나온 고정희의 신학이다(「행방불명되신 하느님에게 보내는 출소장」).
고정희는 자본의 논리를 '밥'으로 풀어내는 비상한 재주를 가진 이야기꾼이다. 이 때 밥은 곧 돈이요, 이윤의 동의어미다. '불원간 밥으로 환산되지 않는 것들은 이 지상에서 사라질 것'이라는 경고문은 모든 것이 사물화된 '이십세기 자본주의 칸추리의 신종전염병균'을 추출해 내는 의사의 메스처럼 차갑고 날카롭다. 그러니 이 밥은 '허튼밥'일 수 밖에 없다. 여기에서 고정희는 매춘여성이란 첨예한 소재를 가지고 밥과 자본주의를 한 가닥으로 꿰어올린다. 정작 '허튼밥'은 '구멍 팔아 밥을 사는 여자'의 것이 아니라 '횐 밥을 검은 밥으로 바뀌 놓고/그른 밥을 옳은 밥으로 우격질하는/천하지본허튼자본님'의 것이라는 얘기다. 이러한 '악령의 시대'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휘몰이 장단에 칼춤 추며 던지는 시인의 당부는 지엄하신 고승의 죽비처럼 우리 등에 내리꽂힌다.
"각자 목숨에 달린 허튼 밥줄 가려내! /허튼 밥줄 끊고 나면 눈이 뜨일 거야"
(「몸바쳐 밥을 사는 사람 내력한마당」)
이 시집은 여성해방의 전언(메시지)을 직접 들려주지 않는다. 그점, 『여성해방 출사표』와 고정희를 따로 때어 생각하지 못하는 필자에게 약간 당혹감을 안겨준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몇 편 안되지만 여성문제를 다룬 시속에서 오히려 한 발 더 나아간 여성주의 시각을 읽었다면 지나친(애정에서 비롯된) 칭찬일까 ? 여성문제를 단지 성의 문제, 혹은 궁극적으로 가부장제의 문제로 귀결짓지 않고 우리사회의 모순 속에 자리매김하려 한 시인의 의도가 유독 필자에게 더 부풀려져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이제, 황진이의 시가를 패러디한 「황진이 신사랑가」중 한 대목을 소개하면서 독자 여 러분에게 능동적인 책읽기와 평가의 몫을 떠넘길까 한다(특히 『출사표』의 황진이와 비교해서 읽을 것을 권한다).
청산리 분단동아 / 두 허리를 자랑 마라
분단허리 잘라내어 / 사랑으로 녹였다가
남북 한몸 이부자리 /서리서리 덮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