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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7 | [문화저널]
내 속의 두사람 일치되어 더욱 큰 하나가 되는, 내 조국의 ‘남’과 ‘북’ 같은
박배엽․시인(2004-01-29 14:24:37)
제가 어릴 적 좋아했던 프랑스시인 보들레르는 자신의 모국어인 “프랑스어가 사라지지 않는 한 영원히 프랑스인의 가슴속에 기억될 시 두 편을 쓸 수 있다면 시인으로서 내 삶은 성공"이라는 무서운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제가 애송하는 시들 가운데엔 여전히 <정약용>과 <백석>의 시편들이 포함돼 있습니다. 다산(茶山)은 200년 전 조선조의 들녘을 노래했고 백석은 일본제국주의 식민치하에서 자신의 아름다운 시편들을 남겼습니다. 모국어가 존속하는 그 언제까지나 영원히 사람들의 가슴을 울릴 시를 단 한편이라도 쓰는 시인이 있다면 그는 참으로 행복한 시인일 겁니다. 그러나 저는 그러한 분에 넘치는 꿈을 꾸지는 않습니다. 일생동안 시를 쓰고, 한 사람의 시인으로서 삶을 살겠다고 다짐했던 청춘의 어느 길목에서부터 오늘까지 제가 제 자신에게 원했던 것이 있었다면, 단 하나, 부끄럽지만 그건 '내속에 <두 사람>이 살기를 바랬던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 두 사람은 바로 '시인'과 '혁명가'였습니다. 제가 다른 어떤 사람이 될 수 없다 하더라도 그 두 사람만 '내 안에서' 살게 할 수 있다면 저의 삶은 성공이라고 여전히 저는 생각합니다. <시인과 혁명가> - 곰곰히 살펴봐도 매우 어울리지 않는 듯한 이 두 사람이 왜 저는 함께 살기를 바랬고, '내 안에서' 한 사람으로 일치되기를 원해왔던 것일까요? 그건 아무래도 저의 '역정'에 대한 이야기로밖엔 설명할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저는 1957년 초겨울 동북아시아의 분단국, 양단된 모토(母土)인 한반도 남쪽. 한 산골 마을에서 태어나 36년 동안 '내 조국의 동서남'을 살아왔습니다. '나의 태를 묻고, 내게 뼈와 살을 준 조국 한반도'는 저의 전부입니다. 그 한반도에서 저는 모든 것을 보고, 듣고, 배워 왔으며,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은 오직 모국어를 통해서만 가능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언제나 '내가 알고 있는 말이(모국어) 하나 뿐이다'라는 사실을 큰 자랑으로 여겨왔습니다. 제가 배운 많은 것들을 여기서 다 이야기 할 수는 없겠지요. 하지만 그 배움의 핵심부에 '선의(善意)'라는 말이 자리잡고 있음은 밝혀둬야겠습니다. 이웃과 세계에 대해, 역사와 대지에 대해 그 선의를 갖고자 하는 작은 바램이 없었다면 아마도 오늘의 저는 없었을 겁니다. 그 선의가 죽는 날까지 '세계에 대한 내 태도의 출발점'이 되기를 저는 지금도 바라고 있습니다. 이야기가 조금은 거창하게 흐른 듯합니다만, 그렇다고 제가 이 땅을 살아오면서 오로지 아름답고 가치 있는 것들만 보고, 그런 것들로부터만 둘러싸여 있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제가 원치는 않았지만, 또한 제 삶을 통해 도저히 피할 수가 없었던 '선의롭지 못한' 무수한 일들이 조국의 들녘에서 펼쳐졌습니다. 전쟁과 학살과 평등하지 못한 노동에 대해 지금 이야기하려는 게 아닙니다. 기꺼이 배우기를 원했던 많은 가치 있는 것들과 더불어, 참으로 원하지 않았던 무수한 선의롭지 못한 것들로부터 제 삶이 동시에 규정 당해왔다는 이야기를 저는 지금 하고 있습니다. 제가 즐거이 맞이했던 것과 제가 단연코 거부했던 것, 참으로 선의로운 것과 끝끝내 선의롭지 못한 것, 이 화해할 수 없는 두 개의 서로 다른 세계가 '내 조국' 안에서 엄연히 상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하던 시기. 빛나던 청춘의 초입인 19세의 어느 길목. 아마 그 때 진정한 의미에서 처음으로 시를 써야겠다고 제 자신에게 다짐했던 것 같습니다. 제가 선의를 가지고 거절해야 할 무수한 선의롭지 못한 일체의 것들을 '나의 순결한 들녘'에서 몰아내는 데 온 삶을 바쳐야겠다고 생각하지 않고, 저는 시를 써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늘 저는 물론 저의 시가 망치나 부삽질과 동일하다고 생각지 않고, 시를 쓰기 때문에 그런 것들로 수행하는 세상의 많은 가치있는 노동으로부터 면책돼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오늘 제가 쓰는 시가 부삽과 망치가 만들어내는 '세계에 대한 온갖 선의'와 마찬가지로 '동일한 선의'로써 채워지기를 바라고, 부삽과 망치를 든 사람들이 흘리는 땀만큼 동일한 수고를 통해서만 저의 시가 씌어지기를 바라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서 연유한다 하겠습니다. 아무튼 저는 세계와 '내 조국'을 선의롭게 변화시키는 도구로서 시를 선택했고, 그것은 또한 제게서 또 다른 한 사람 혁명가가 함께 살기를 바라고, '내 안'에서 한사람으로 일치되기를 바라는 참 이유가 되기도 했습니다. 제가 마음속에 고이 접어 자주 펼쳐보고, 고치기도 하는 '저의 사전'에 밥은 '모두가 평등하게 나눠 먹어야 하는 것'으로 설명되어 있습니다. 짐은 '함께 들어야 하는 것'으로 설명돼 있기도 합니다. 그 사전에다 저는 오래 전부터 '시인'과 '혁명가'를 동의어로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세계를 가차없이 선의롭게 하는 사람'이란 뜻의 동의어. 일치되어 더욱 큰 하나가 되는, 마치 '내 조국'의 '남과 북' 같은 동의어로 말입니다. 내가 노래라면 네 가슴 골짝골짝 가서 베는 무딘 칼이라면 너의 깊은 기슭을 적시는 밝은 물이 라면 내가 돌이 라면 담벼락 같이 닫힌 문을 찍는 멍든 주먹이라면 불러도 불러도 너의 들녘을 울리지 못하는 아픈 노래하면 「너에게」전문 최근 제가 아내를 위해 쓴 부끄러운 시입니다. 어쩌면 이 시가 아내에게 아무런 감동도 주지 못할런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그건 제 시의 잘못이기 이전에 먼저, 제 삶의 잘못일 겁니다. 저 '두사람'을 일치시키려는 제 삶의 치열함이 부족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는 압니다. 문제는 시가 아니라 '삶'이고 '현실'입니다. 온갖 선의롭지 못한 것들에 대해 가차없이 거절하는 삶, 모오든 선의롭지 못한 것들을 '내 안'과 '내 밖'에서 타파하는 삶, 가차없는 '현실적' 선의. 문제는 '내 속'의 <혁명가>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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