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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7 | [문화저널]
소외받은 지역주민들과 함께하는 공동체 문화 일구기 이강실 목사
김연희․문화저널 기자 (2004-01-29 14:25:07)
"여성문제는 어느 누구에 제한된 문제가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는 여성문제를 발생시킬 수 있는 환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 제가 여성에 관한 활동을 하게 된 것도 자라온 환경에 큰 영향을 받은 것 같습니다." 언론이나 세상에 드러내 놓을 만큼 한 일도 없고 사람들에게 알려질만한 삶이 아니라며 필자를 만나길 좀처럼 허락해 주지 않던 고백교회 이강실목사의 첫마디이다. 여자이기 때문에 무슨 일은 못하고 어떤 일은 해야되고 라는 관념을 깨부수고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여성이다. 그녀에게 현실의 선입견은 그다지 부담되는 일이 아니었다. 세상의 어설픈 눈초리를 믿음으로 바꾸어 놓기까지 그녀의 생활은 참으로 힘든 고통이었다. 하지만 이젠 목사로서, 여성으로서 당당히 홀로서기에 성공하고 있다. 그녀는 7남매중 여섯 번째 딸로 태어났다. 독자 아버지에, 하나뿐인 오빠의 가정에서 그녀는 어릴 때부터 여성문제를 실감하며 자라왔다. 더구나, 오빠의 죽음은 그녀에게 여성에 대한 깊은 상처를 주었고, 그 상처를 가슴에 지닌채 자라야 했다. 그녀는 우리나라의 남아선호사상을 뼛속깊이 느끼며 살아온 피해자들 중에 하나임이 분명하다. 엄마의 고통을 보며 자라오면서 여자라는 게 혐오스러울 정도로 싫은 때도 있었고 여자라는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 남자들이 하는 힘든 일은 모두 다 하였다. 집안에서도 아들노릇을 하느라 똥지게를 지고 다니기도 했고, 집안의 온갖 궂은 일은 모두 나서서했다. 그렇게 사는 동안 남자에 대한 열등감도 커져 남자로 태어나지 못한 것이 원망스럽고 이런 환경이 싫은 때가 한 두번이 아니었다. 그녀는 그 때문에 선머슴아 같이 성장했다. 연약해하고 얌전해 하는 여학생들의 모습이 싫을 정도로, 강하고 남성다운 여학생으로 소문나 있었다. 그때만해도 '결혼은 안한다'라는 자신의 생각과 주위의 시선이 매우 강했다. 이런 여린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그녀는 대학4학년때 결혼을 했다. 시집 안간 언니 둘을 제치고, 집안 어른들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엄마를 가운데 다리로 삼아 아버지를 설득시켜 내고 집안에서 허락을 얻어냈다. 이렇듯 완고한 집안에서의 7명의 딸은 지금 모두 사회활동을 하고 있다면서 아버지의 개방적이고 활동적인 교육방법에 대해 언제 심도 있게 분석해 보아야겠다며 웃음을 짓는다. 이렇게 그녀는 무엇에 끌리듯이 다른 사람들보다 빠른 때에 결혼을 하게 되었지만 두사람의 결합은 그녀의 인생에서 큰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전북대학교 사범대학 교육학과에 다니던 중 인간을 다스리는 교육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고 오랫동안 다녔던 교회에서는 하느님의 존재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교회의 청년부 선생으로 있던 한상렬 목사님과의 만남으로 그녀는 또 다른 삶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그녀는 결혼후의 감정에 대해 자유를 얻어 좋다 라고 선뜻 이야기한다. 완고한 집안에서의 해방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어쨌든 그녀는 결혼 후 자신이 하고싶어하는 활동을 시작했다. 아버지의 반대에 부딪쳐 보류되어 있던 신학교에 편입하려던 일도 구체적으로 할 수 있게 되었고 그녀가 하고자 했던 일들을 남편의 도움을 받아가며 할 수 있었다. 그녀는 학교 졸업후 독일에서 신학공부를 계획하고, 유학 준비를 하는 동안 짧은 시간 교사로 어린 학생들과 지낼 수 있는 시간도 있었다. 그러던 중 독일에서의 입학허가서를 전달받고 그녀 먼저 독일로 떠나 4개월이란 시간을 보냈지만, 뒤따라오기로 되어있던 한상렬 목사의 출국금지조치 때문에 결국 독일의 유학생활은 포기하고 돌아왔다. 남편과 같이 지내고자 포기한 유학이었던 만큼 우리나라에서 원하던 공부를 보다 더 충분히 할 수 있었다. 82년도 한신대학원에 입학 MDB 과정을 밟아 신학공부에 몰두하였고, 졸업 후 진보적인 신앙을 연구하는 한국신앙연구소에 들어가 독일어 번역 연구를 하며 2년 반개월 동안 서울에서 생활하였다. 하지만 번역일에서 의미를 찾지 못하던 그녀는 87년 전주로 내려와 나름대로의 활동영역을 확고히 다져오고 있다. 신앙연구소에서 생활하는 동안 그녀는 여성에 대해 새로운 모습을 발견했다. 그리고 자신이 살아온 잘못된 사고와 오류를 발견하고 여성의 참모습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이때의 재발견은 그녀 민주여성회의 일을 할 수 있게 하고 여성운동에 앞장설 수 있게 하는 발판이 되었다. 또한 그녀를 이렇게 성숙할 수 있도록 도와준 남편의 뒷받침을 소홀히 봐서는 안될 것이다. 한상렬목사와 같이 생활한 시간은 그리 많지 않다. 결혼 초 그녀가 전주에 있을 때 한상렬목사는 서울에서 활동을 하였고, 그녀가 서울에서 있을땐 전주에서 한목사가 활동하고 있었다. 또한 현재는 전주에 같이 있게 되니 한상렬 목사는 교도소에서 서울, 광주로 떠나 있게 되었다. "오히려 떨어져있는 시간이 많이 있으니까 저에게는 독립적일 수 있었습니다. 남편의 그늘에서 독자적 목소리를 낼 수 없는 때도 있었으나 이제는 이강실을 독자적으로 인정해 주더군요. 이렇게 홀로서기에 성공한 것은 보이지 않는 남편의 덕이겠지요',' 90년 3월 목사 안수를 받음으로써 당당히 고백교회를 이끌어 가고 있는 그녀는 더욱 활발한 사업과 민주적인 교회운영으로 실천하는 여성으로서도 목사로서도 탄탄대로를 다지고 있다. 현재 민주여성회에서 부회장을 맡아 활동을 하지만 지금은 교회의 일 때문에 그 일을 거의 못하고 있다. 요즈음 그녀는 교회의 일에 몰두하게 되면서 어려운 사람들의 아픔을 피부로 느끼며 살고 있다. 고백교회는 「통일을 염원하는 공동체를 위하여」, 「교회 식구들과 한몸을 이루고 올바른 신앙을 가지는 한몸공동체를 위하여」, 「소외되고 천대받는 지역의 주민들과 함께 하는 지역주민공동체를 위하려」라는 세 가지의 목표를 세우고 운영하고 있다. 가정의 미취학 아동들을 위한 온나라어린이방을 열어 운영하던 것을 온나라공부방으로 바꾸어 국민학생과 중학교 학생들의 공부를 돌보아주고 있다. 또한 매년 주민의 날 잔치를 마련하여 지역주민과 함께 하는 시간을 가지고 있다. 체육대회와 노래자랑 등 지역주민들과 화합의 한마당이 되는 이 자리는 신명나는 대동마당의 자리이다. 올들어서 온나라살림공동체를 운영하고 있다. 생태계를 파괴시키는 물품과 먹거리를 근 절시키는 무농약 무공해 먹거리와 무공해상품을 판매한다. 건전한 소비문화 정착을 위해 헌옷 헌물품 교환을 실시하고 있고, 각종 상담, 건전 교육문화를 위한 교육프로그램, 무료예식장, 지역의 제반 연구에 대한 조사․연구 등 항상 열려있는 교회로서 지역주민을 위한 활동을 많이 하고 있다. 지난 4월에는 온나라살림공동체 개설을 위한 기금마련 알뜰시장을 개최해 이익금은 사업의 경비로 활용하고 있다. 이렇게 해서 마련된 온나라살림공동체는 5월 개설되어 많은 주민과 관심 있는 사람들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이 모든 사업을 이끌어 온 이강실목사는 언제라도 어느 누가 도움을 원한다면 달려나가 실천하는 여성이다. 다음주에 고백교회 6주년 기념행사로 통일을 위한 시민강좌를 개최한다고 한다. 이강실목사에게 어설픈 미사여구를 끌어대는 것은 왠지 어울리지 않는 듯 하다. 풋풋함과 언제라도 가까이 할 수 있는 따스함이 느껴지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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