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킵 네비게이션


분야별보기

트위터

페이스북

1992.7 | [문화저널]
남원의 실상사 - 석탑과 석등을 중심으로 -
김혜진․전북대 박물관 (2004-01-29 14:25:51)
우리나라에 불교가 전해진 이래 불교는 국민의 사상체계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특히 신라가 한반도를 통일한 이후 지배적인 통치이념으로서 불교가 차지하는 비중은 막대하였다. 즉 불교는 국왕을 중심으로 한 지배계층뿐만이 아니라 노비를 포함한 일반 피지배 민중에게까지 깊이 파급되었으며 유일한 신앙체계로서 자리하게 되었다. 그러나, 지배계층과 피지배계층 사이에는 정치, 경제, 문화적인 차이가 존재할 수밖에 없었으며 종교에 있어서도 지배계층과 피지배계층이 같은 입장에서 신앙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에 따라 소위 원효를 중심으로 한 민중불교 또는 평민불교가 등장하였으며 극락정토에 왕생한다는 정토신앙의 경우는 지배계층과 피지배계층과는 서로 다른 신앙행위가 존재하게 되었다. 또 신라사회가 왕위쟁탈전으로 인하여 정치적 기반이 동요하기 시작할 즈음 중국으로부터 전래된 선종의 유행은 교종위주의 불교가 표출한 모순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선종은 인도에서 달마대사에 의하여 중국으로 전달된 이후 중국을 통하여 한반도에 전래되기 시작하였으며 선종 산문의 본격적인 성립은 남원 지리산록에 실상산문이 성립된 다음부터이다. 즉 실상산문의 성립을 필두로 선종 구산문이 성립되고 그것들이 신라하대이후 각지에서 성장한 지방호족세력과 결함됨으로써 선종의 기틀을 확립하게 되었다. 여기에서는 지난 번에 살펴본 중기사지 석등과 같은 양식의 석등이 있는 남원 실상사와 석탑 그리고 석등에 대하여 간단히 살펴보고자 한다. 1. 실상사의 연혁 실상사는 남원군 동면 소재지인 인월에서 지리산 뱀사골과 달궁부락으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서 가다가 산내면 소재지에서 왼쪽으로 갈라지는 길, 즉 경남 함양군 마천면쪽으로 가는 길에 자리하고 있다. 현재 남아있는 실상사의 범위는 크지 않으며 사적 104호로 지정되어 있다. 산내-마천을 잇는 도로에서 내를 건너서 사찰이 자리하는데 내를 건너는 다리 입구와 다리 건너편에는 각각 돌로 만든 장승이 세워져 있다. 또 다리를 건너 오른쪽으로 2백여미터 떨어진 곳에는 선돌이 세워져 있어 마을 이름이 입석리가 유래하게 되었다. 실상사는 서기 828년, 신라 42대 흥덕왕(興德王) 3년에 증각대사(證覺大師) 홍척(洪陟)에 의하여 창건되었다. 홍척은 헌덕왕(憲德王)때 당나라에 유학하여 지장(智臟)으로부터 선종의 깊은 이치를 배우고 도를 깨우친 다음 흥덕왕때 귀국하였다. 흥덕왕은 홍척을 초빙하여 설법을 듣고 선종의 이치에 감탄하여 홍척에게 증각대사라는 호를 내리고, 실상사가 창건되게 되었다. 창건이후 실상사에서는 수철화상(秀澈和尙), 편운(片雲)대사 등의 고승이 배출되었으며 선종불교의 중심으로 크게 번성하였다. 그후 조선에 들어서 정유재란때 왜군의 침입으로 인하여 실상사는 화를 입게 되었다. 왜군이 물러가고 사회가 평온을 되찾은 다음 실상사의 승려들은 실상사를 다시 세우기 위하여 노력하였는데 숙종 26년(1700년)에 본디 절터의 반만큼에 사찰을 재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재건된 사찰도 고종초에 커다란 화재로 인하여 소실되었으며 승려들의 노력으로 지금 보이는 바와 같은 작은 절로 남아있게 되었다. 실상사는 크게 두차례에 걸쳐 사찰의 중건이 이루어지고 그 과정에서 사찰의 규모가 작아지기는 했으나 적잖은 유물을 간직하고 있다. 즉 실상사에는 이미 말한 석탑, 석등 외에도 창건사조인 증각국사의 부도탑과 탑비를 비롯하여 수철화상의 부도탑과 탑비, 철조 약사여래좌상 등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가 남아있다. 또 실상사의 입구에 있는 석장승은 현재 3개만이 남아있으나 본래는 4개로 다리의 입구와 사찰쪽에 각기 2개씩 세워져 있었던 것이며 중요 민속자료 15호로 지정되었다. 2. 실상사 석탑 보물 37호로 지정된 2기의 석탑이 실상사의 주법당인 보광전의 남쪽에 동서로 자리하고 있다. 이 석탑은 동쪽과 서쪽에 있는 것이 대체로 같은 형식을 보이고 있어 같은 시기에 세워진 것으로, 실상사의 창건과 더불어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탑은 장대석으로 탑이 세워 지는 외곽을 방형으로 구획하고 그 안에 역시 방형의 지대석을 놓았으며 이 지대석을 기초로 3층으로 세워진 것이다. 탑의 기초가 되는 기단은 2중으로 이랫단과 윗단이 있는데 위, 아랫단에는 모두 귓기둥과 귓기둥 사이의 기둥이 돌출되게 표현되어 있다. 이중 귓기둥 사이의 기둥은 각면에 1개씩만이 표현되어 있으며 갓돌의 윗면은 중심에서 바깥쪽으로 경사를 이루고 있어 지붕처럼 보인다. 특히 윗단 기단의 갓들은 크기도 크고 윗면이 경사를 이루고 있어 자칫 이 탑이 4층 석탑인 것처럼 오인하게 하기도 한다. 3층을 이루는 탑신부는 각층의 탑신과 옥개석이 각기 1매의 돌로 구성되어 있어 모두 6매의 돌로 3층 석탑의 탑신을 이루고 있다. 탑신에는 귓기둥이 돌출되게 표현되어 있으며 1층 탑신이 2, 3층 탑신에 비하여 높은 편이며 전체적으로 탑신이 기단에 비하여 규모가 작고 높은 편이다. 옥개석의 아래에는 5단의 옥개받침이 표현되어 있는데 옥개받침은 추녀끝선에서 얼마간 여유를 두고 안쪽에서 시작되고 있다. 또 추녀선의아래는 수평을 이루며 윗면은 귀부분에서 위로 심하게 반전되고 있어 경쾌한 느낌을 주고 있다. 탑신의 위에는 상륜부가 거의 완전하게 남아있는데 이런 예는 우리나라에서 매우 드물며 탑 상륜부의 구성을 파악할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3층탑신의 옥개석 위에는 노반(露盤)이 놓여 있으며 이 노반의 위에는 편구형(扁球形)의 복발(覆鉢)이 있다. 복발의 중간에는 2줄의 돌대가 가로로 돌려져 있고 그 돌대에는 꽃무늬가 조각되어 있다. 복발의 위에는 방형의 앙화(仰花)가 있는데 8잎의 꽃이 조각되어 있으며 그 위로 4개의 타원형 보륜(寶輪)이 차례로놓여 있다. 보륜은 아래쪽에 꽃무되가 장식되어 있으며 보륜을 덮는 보개(寶蓋)에는 이례적으로 큰꽃이 귀부분에 장식되어 있다. 보개의 위에는 수연(水煙)이 놓이는데 서쪽 탑에서는 이 수연이 없어졌으며 수연의 위로는 청동으로 만든 용차(龍車), 보주(寶珠)가 장식되어 있다. 이 탑은 기단에 비하여 탑신이 세장한 느낌을 주고 있으며, 기반의 귓기둥 사이에 1개씩의 기둥만 표현되어 있는 점, 갓돌이 경사를 이루고 있는 점에서 고려시대 석방에 가까운 양상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아래가 수평을 이루고 위로 반전이 있는 옥개석, 각 1매의 돌로 탑신과 옥개석을 만든 것 등은 기본적으로 통일신라의 전형적인 석탑양식, 즉 경주 불국사석가탑과 같은 양식에 속하는 점에서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실상사의 창건시기에 건립된 석탑으로 추정할 수가 있다. 한편 초기 가람에서는 탑이 1곳에 있는 것이 보통이며 합의 규모도 전체 가람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비교적 큰 편이었는데 통일 신라에 들어서 2곳에 탑이 자리하고 탑의 규모가 전체 가람에 비하여 작아지는 양상을 보인다. 이는 초기 가람에서는 탑이 신앙의 중심으로서 비중이 컸던 것에 대하여 통일이후에는 가람의 중심이 불상이 모셔진 불당으로 옮겨진데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즉 가람에서 신앙의 구심점으로서 부처의 사리를 모신 것으로 인식되는 탑에서 차츰 형체를 갖춘 불상으로 그 대상이 옮겨진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탑은 때로 불교의 깊은 뜻을 보여주는 장식적인 속성을 지니기도 하고 가람을 장식하는 조형물로서 기능하기도 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석탑의 경우 구체적인 장식은 없으나 전반적으로 조형물로서의 속성을 지니고 있는 것은 이같은 관점에서 파악될 수 있다. 3. 석등 동, 서쪽에 있는 석탑의 중간에서 주법당으로 약간 치우친 곳에 석등이 자리하고 있다. 이 석등은 높이 5미터, 하대석의 폭 1.49미터의 비교적 대형 석등으로 각 부분이 잘 남아있다. 지대석은 8각이며 측면에 안상이 가늘고 길게 음각되어 있으며 이 지대석위에 석등이 놓여 있다. 지대석 위에는 받침이 마련되고 이 받침에는 8엽의 겹꽃잎이 새겨진 하대석이 놓여있다. 이 하대석의 겹꽃잎의 중간 마다에는 귀꽃이 큼직하게 자리하고 있으며 하대석에서 이어지는 간주석은 중기사지 석등에서와 같이 북모양을 이룬다. 즉, 원통모양의 간주석에는 중앙, 위, 아래에 각기 북 모양의 볼록한 면이 있는데 이 볼록한 면중 위와 아래에 있는 것은 중앙에 있는 것을 반으로 자른 형태를 이루고있다. 중앙의 볼록한 면에는 위와 아래에 각기 위와 아래로 향하는 16잎의 겹꽃잎이 양각되어 있으며 중간에는 4개의 잎이 있는 꽃무늬를 8곳에 배치하고 그 꽃잎들을 3줄의 볼록한 선으로 연결하고있다. 또 이 세부분의 볼록한 북모양의 부분들 사이에는 1줄씩의 볼록한 선을 두르고 있다. 간주석의 위에 놓인 상대석은 8잎의 홑꽃잎으로 꽃잎마다 중심에는 1개씩의 작은 꽃이 다시 조각되어있다. 상대석의 위에 놓여있는 화사석은 8각으로 각 면마다에 장방형의 화창이 있으며 화창의 주위에 이중의 테를 둘렀다. 화사석 위에는 8각의 옥개석이 있는데 지붕 면에는 큼직한 연꽃잎을 하나씩 각면에 장식하였으며 귀부분의 반전이 크지 않으며 귀꽃이 역시 큼직하게 장식되었다. 옥개석의 위에는 간주석의 중앙에 있는 것과 비슷한 형태의 복발이 놓이고 그 위로는 짧은 간주석을 사이로 옥개석과 같은 힝태의 8각 보개가 자리한다. 보개의 위로는 길이가 짧은 파도무늬가 있는 수연과 연꽃봉오리형의 보주가 놓여 있다. 이 석등은 그 규모가 작지 않을 뿐 아니라 전체적인 부재가 잘 남아 있으며 이 석등에 불을 밝히기 위한 시설로써 사다리가 주변에 남아있어 매우 중요한 석등 자료이다. 또 이 석등의 간주석에서 파악되는 북모양의 볼록한 띠는 지난번에 살펴본 임실 중기사지, 담양 개선사 석등에서도 파악되는 지리산을 중심으로 한 지역의 특징적인 요소의 하나이다. 한편 이 석등의 경우 하대석, 옥개석에서 보이는 귀꽃은 이 석등의 조성시기가 통일 신라후기에 속하는 것으로, 따라서 이 석등이 실상사 창건과 더불어 조성되었을 것으로 판단하는 근거가 된다. 4. 맺는 말 지금까지 살펴본 실상사의 석탑과 석등은 실상사 창건과 더불어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유물들로 천여년 동안 거의 완전하게 본디의 모습을 지니고 있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있다. 이들 유물은 대체로 본디의 자리에 위치하는 것으로 실상사의 본디 가람이 없어진 현재, 본디 가람을 파악할 수 있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이들은 매우 화려한 속성을 지니고 있으며 특히 석등의 경우 지역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매우 장식적인 점이 주목된다. 이같은 장식은 불법의 광명을 의미하는 석등 본래적인 기능 외에 이 석등을 통하여 불법의 심오함을 깨우쳐주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을 것으로 해석된다. 즉 실상사 경내에 있는 부도탑들의 경우 매우 장식적인 양상을 보이며 이 같은 장식이 부도탑의 주인공들인 증각대사, 수철화상이 깨우친 바를 일체 중생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라는 점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통일 신라에서 교종불교는 일반피지배계층에게 지나치게 어려운 이론 중심이었으며 이에 피지배계층으로는 그 깊은 뜻을 헤아려 배울 여가도, 지적 능력을 축적할 시간도 없었다. 이에 비하여 선종불교는 복잡한 교리를 떠나 심성의 도야에 치중하였다. 또 좌선을 통하여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갖추고 있는 불성을 깨달을 수 있다는 개인주의적인 속성이 있다. 그리고 이 점은 중앙정부로부터 독립하려는 경향을 지닌 지방 호족들의 사상적 근거가 되었다. 또 선종의 단순성은 일반 피지배민중에게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요소가 되었다. 이같은 선종 중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성립된 실상 산문의 본거지로서 실상사는 그 역사적인 의미가 매우 크며 이 여름 지리산을 찾는 발길을 돌려 한번쯤 찾아볼 가치가 있는 곳이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