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7 | [신귀백의 영화엿보기]
최루성 멜러영화 한계와 극복의 문제
「이혼하지 않은 여자」
장세진․방송평론가
(2004-01-29 14:28:48)
「겨울 나그네」이후 섬세한 여성심리를 감성적 영상미로 추구해온 곽지균 감독이 여섯번째 영화를 만들었다. 「이혼하지 않은 여자」가 그것이다. TV연기대상 2연패에 빛나는 중년의 고두심과 우리 영화의 자존심 「장군의 아들」을 탄생시키는데 한몫을 한 청년 박상민이 어우러져 만들어진 영화이기도 하다.
감독과 배우 등 나무랄 데 없는 조건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이혼하지 않은 여자」가 우리 영화의 만성적 불황타개에는 기여하지 못했다. 어느 스포츠신문이 흥행비수기로 꼽히는 4월인데도 첫날부터 전회 매진이라며 흥분했지만 결국 호들갑을 떤 꼴이 되고만 것이다.
노상 그렇듯 필자 또한 20여명의 '정예관객'과 함께 호롯하게 영화를 보았을 뿐이다. 「젊 은 날의 초상」으로 '91 대종상과 10만 이상의 관객을 잡은 곽지균 감독으로선 창피하고 자존심도 상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만들어야 관객들이 매표구 앞에 줄을 서고 표를 못구해 발을 동동 구른단 말인가.
「이혼하지 않은 여자」는 대학생(1년) 아들을 둔 김지원(고두심)이 남편의 외도로 인해 자아 상실감에 빠지지만 시한부 인생을사는 송찬우(박상민)와의 사랑을 통해 비로소 자신이 누구인지 깨닫게 되는 서사구조로 짜여 있다. 이를테면 자아의 눈뜸에 간통을 가미한 멜러영화인 셈이다.
우선 그것부터가 관객을 끌 만한 힘이 없어 보인다. 곽감독은 "일상에 시든 여성들이 이 영화를 통해 감성의 전환을 갖게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지만 하필 간통을 통해서인가! 가정주부로서의 미덕에 대한 회의가 고조되어가고 있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남편이 바람 피는데 나라고 그리 못할게 뭐냐는 식의 원시적 대응으로 일관함으로써 본질적 문제의 근본적 대안에 실패한 것이다.
자아상실에 대한 눈뜸의 발단부터가 그렇다. 아들이 대학생이 될 때까지 흔히 말해온 여자로서의 미덕을 간직한 지원이 '도대체 나는 누구인가'를 깨닫게 된 계기가 남편의 외도이다. 유독 짓눌림이 심했던 이 땅의 여성과 그 문제에 대한 접근이 지극히 상투적이고 통속적인 것이다.
발단에 이어지는 전개과정도 고정된 카메라워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꺼져가는 생명에 대해선 누구나 경외감 같은 것을 느끼지만 자신의 일로 코가 석자나 빠진 지원이 시한부 인생 찬우를 만나 간병하고 위로까지 한다. 일종의 외도의 오류인 셈이다.
자연 관객들은 혼란에 빠지고 만다. 굳이 이해의 폭을 넓히면 지원이 찬우의 죽음을 보며 자신의 자아 참기는 배부른 비명쯤으로 생각하고 새로운 삶의 의욕을 갖게 된다는 것이지만 얼른 받아들여지진 않는다. 남의 '일'이 아닌 죽음을 나의 타산지석으로 삼는 것은 너무 잔인할 뿐더러 한국적 정서에도 맞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죽음이 지원의 간통을 희석시키는 안정장치 역할을 한다는데 문제가 있다. 우리 영화의 한계이기도 하지만 마구잡이로 사건을 2시간 가까이 벌여 놓고 주인공 가운데 한 인물을 죽임으로써 끝내는 것은 문제의 심각성을 연성화 시키거나 본질을 호도할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에 유의해야한다.
다시 말해 찬우가 죽지 않는다면 지원의 자아 찾기는 오리무중에 빠지게 되고 영락없는 간통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와 맞물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혼하지 않은 여자」는 오늘날 대두된 여성의 사회적 위치, 인격, 본질적 자아 등 사회문제와는 거리가 먼, 중년의 연하청년의 불륜을 서정적 화면에 담아낸 최루성 멜러영화에 불과할 뿐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연출면에서도 아쉬운 점이 더러 발견된다. 생략과 연결이 적절치 못하여 화면구성이 허술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가령 찬우가 죽는다고 발작을 하는 화면이 바뀌었는데 두 서너 시퀀스는 생략되었음직한 국악과 양악의 합주공연이 곧바로 이어진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리얼리티가 품 더 보장되었더라면 하는 것도 연출에서 오는 아쉬움의 하나. 윤하(윤소정) 내외와 함께 읍에 나간 찬우가 돌아오지 않자 지원이 찾으러 나가 술집에서 만나고 바로 나오는 장면이 그런 경우다. 아가씨들과 한참 노닥거리다 그냥 나왔으니 그들의 악다구니가 짧게나마 묘사되어야 하지 않았을까.
이를테면 찬우의 절망과 지원의 슬픔에 아무 까닭 없는 술집아가씨들까지도 동참하고 있는 셈이다. 이게 또 우리 영화의 한계다. 화면은 비련의 두 주인공들로 꽉 차 있는 것이다. 주인공들을 보다 박진감 넘치게 할 주변(인물, 상황 등)을 그려내지 못함으로써 나의 슬픔에도 아랑곳없이 숨가쁘게 돌아가고 있는 현실을 놓치게 되는 오류를 범하곤 하는 것이다.
불륜을 소재로 하면서도 그것의 원동력(?)인 정사씬이 너무 절제된 것도 아쉬웠다. 「화제의 영화」라는 타이틀로 「이혼하지 않은 여자」를 소개한 어느 스포츠신문은 "고두심-박상민 격정의 러브씬 '압권'"이라며 관객의 호기심을 부추겼지만 간통를 희석시키려는 의도 때문인지 그런 화면은 전혀 없었다.
사랑이 일정한 코스를 통해 육체관계로 발전해가듯 두 배우의 키스씬이 이룰 수 없는 안타까움에 대한 반사행동으로 제법 진지하게 표현되었지만 이어지는 장면은 지극히 어설픈 것이었다. 과연 그 정도만으로 43살의 지원이 18살이나 아래인 찬우를 사랑할 수 있었을까? 물론 남편의 외도와 질적으로 다른 자아찾기로서의 사랑임을 보여주자는 핀트에 동의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원초적 본능」같은 외화는 개봉 2주일만에 30만 관객이 들었다는데, 언제쯤 그런 우리 영화를 만나보게 될 지 그저 답답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