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킵 네비게이션


분야별보기

트위터

페이스북

1992.7 | [특집]
문화저널과 고향 가는 길
서강목․부산 동의대 교수․영문학 (2004-01-29 14:32:49)
필자의 고향은 경남 진해시 대장동 45번지이다. 그 곳은 40호 안팎의 가호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산촌(山村)이다. 필자가 중학교시절인 70년대 초만 해도 고향의 이름은 창원군 옹동면 대장리였다. 그러다 창원시의 탄생과 더불어 의창군 옹동면이란 이름으로 바뀌었고 수년전 다시 진해시로 편입되었다. 아직도 촌놈의 티를 벗지 못한 필자로서는 진해시민이라는 사실이 전혀 실감나지 않지만, 마치 갓바뀐 새해의 숫자 쓰기에 익숙해 가듯 편지며 이력서 등의 주소란을 실수 없이 채우는 일에 그럭저럭 적응해 왔었다. 그런데 요즈막 들어 도저히 적응하기 어려울 듯한 변화가 고향마을에 생겨났다. 마을을 감싸안고 흘러내리는 대장천이 그 많던 큰 바위, 맑은 물, 그 속의 피라미 등을 잃어버린 채 도시의 준용하천처럼 좌우가 시멘트 콘크리트로 단장되고, 바닥이 평평하게 골라져버린 것이다. 고향에서 가업을 이어받아 농사를 짓고있는 큰형님께 여쭤본즉 지난 봄의 수해복구 공사를 시에서 그런 식으로 설계했다는 것이다. 몇몇 마을사람들이 불만을 토로해 보았으나 현장 시공자들은 자세한 내막을 모른다 하고, 다 알만한 사람들이 이것저것 따져서 결정한 것이니 더 바랄 게 있겠느냐고 답했다한다. 물론 그렇게 깨끗하게 단장해 버린 대장천이 큰물에 더 잘 견디고, 또한 도회적 감수성에 익숙해 있는 이들에게는 더욱 깔끔해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 시내가 삶의 터전이었고, 이제 비록 몸은 고향을 떠나 있지만 그 곳의 바위 하나, 여름철 멱감던 깊은 물 하나가 모두 생생한 기억으로 자신을 지탱해 주는 심지 역할을 해왔던 이들에게는 그 무엇에도 비견할 수 없는 상실감을 맛볼 수밖에 없게 되었다. 봄철마다 인간의 색감으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그 늘푸르게 피어나던 버들강아지, 여름철 멱감다 발가벗은 몸으로 드러눕던 느럭바위, 뜨겁게 달아오른 바위에 시냇물을 끼얹고 누우면 따뜻한 엄마의 품안같던 그 바위, 가을날 그믐밤에 횃불들고 살오른 게를 찰자루에 주워담던 그 곳, 구석구석 탐스럽게 매달린 고드름을 찾아 미끄러운 바위틈을 헤집던 그 시내, 이제 그곳이 정말 믿을 수 없는 기억의 장 속에만 존재하게 되었다. 우리의 주위를 둘러보면, 실용의 이름으로 우리 삶의 터전을 그 뿌리부터 잘라버리는 경우가 너무 많다. 70년대 공업입국의 기치 아래 진행된 공업화도, 소득증대와 생활 수준 향상을 내세운 새마을운동도, 도시미관을 정비한다는 도시 미화사업도 모두 이런 잘못을 적지 않게 범한 사례들이다. 물론 원시의 상태에서 불편한 삶을, 미개의 상태에서 궁핍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근대화나 잘살기 운동이 지향해 온 것이 일방적인 실용성의 추구라면, 그 과정에서 실용성이란 기준만으로 가늠할 수 없는 것, 실용성의 범위 넘어에 있는 것들은 많이 훼손되고 망실되었을 것이란 말이다. 이 실용성의 범위를 넘어서 있는 것 그것이 바로 문화이다. 문화란 인류가 학습을 통해서 이루어 놓은 모든 정신적 물질적 성과를 가리키는 것이며, 학문, 예술, 도덕, 종교, 기술 등을 두루 포괄하는 우리 삶의 양식과 내용을 이루는 근간이 되는 것이다. 아마도 그중 실용성이 상대적으로 큰 가치범주 역할을 할 부분이 기술의 분야나 학문의 특정 분과 과학이 아닐까 한다. 그러나 여타의 경우에는 실용성의 좁은 기준만으로는 가늠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다. 학문은 효용을 넘어선 진리를 탐구함에 그 의의가 있고, 예술을 실용으로 구속하면 기술로 전락하고, 도덕과 종교를 보상효과로 가늠할 때 아전인수의 가치관과 기복신앙의 미신이 활개치게된다. 지난 몇 십년간의 우리 삶이 자본주의적 물질문명과 야합해서 살려야 될 것은 죽이고, 지양해야될 것은 천박하게 추구한 부분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그 결과 대중주의를 내세우는 자본주의적 상업주의 문화가 젊은이의 취향을 송두리째 장악하고, 이제는 볼거리, 입거리, 먹거리 등 모든 것이 구미의 감각으로 편향되어 재편되어졌다. 이제는 통상압력 때문에 시장을 개방할 수밖에 없을때 우리 삶에 근거한 양식있는 선택을 국민대중들에게나 특히 자라나는 후손들에게는 기대하기 어렵게 되고 말았다. 외국의 어떤 이론이 모든 것은 그 실용성에 근거해 옳고 그름이 판단되고, 진리란 애시 당초 없는 것이며, 단지 그 유용 무용의 기준에 의해서만 판단되는 진실과 비진실이 있을 뿐 이라고 말해도 이제 우리는 쉽사리 반박하기 어렵게 되었다. 그리하여 실용성의 이름으로 밀려오는 구미의 자본주의적 물질문명을 감당하기 어렵게 되고 말았다. 원래 민족과 나라마다 그 민족 그 나라가 고유하게 지니고 있는 터의 정신이 있다고 한다. 어떤 민족 어떤 나라가 지니고 있는 문화는 그 터의 정신에 근거해 그 민족 그 나라가 발전시켜 온 것이다. 우리가 남의 문물을 수용한다 함은 우리의 터의 정신을 송두리째 포기한 채 남의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다. 외국문물의 수용이란 우리 문화를 더욱 발전시키기 위해서 남의 것을 주체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즉 우리 문화의 고유한 균형을 유지하면서 그 발전을 위한 자양분을 섭취하는 일이 외국문물 수용의 바람직한 모습인 것이다. 필자가 보기에는 우리 문화의 균형이 이미 많이 깨어진 듯하다. 전후 좌우를 둘러보아도 제대로 우리의 것으로 자리매김된 외국문물은 없고, 우리 고유의 전통문화는 차츰차츰 그 모습이 줄어가고 있다. 우리는 이미 깨어진 이 우리 문화의 균형을 되찾아야 한다. 잃어 버 린 것은 다시 찾고, 아직 남은 것은 의연히 지켜가야 한다. 전세계를 하나의 가족으로 만들어버린 국제주의와, 다양한 문화적 차이를 인정 하는 듯하면서도모든 것을 후기자본주의적 상품시장으로 끌어들이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논리 앞에서, 우리 스스로의 진정한 모습을 찾지 못할 때, 우리는 전지구를 하나의 시장으로 재편하는 후기자본주의의 자본에 노예가 되고 만다. 그러므로 우리문화를 지키고 가꾸어 내는 이들은 바로 우리의 삶을 노예의 삶으로부터 지켜주는 파수꾼인 것이다. 물론 이 말이 배타적 국수 주의로 들릴지 모른다. 전세계가 하나의 가족이 되고 모두가 서로의 차이를 인정받은 채 세계무대에 나설 때 그것만큼 바람직한 것이 어디 또 있으랴. 물론 그렇다. 우리는 타민족의 억울한 지배를 받아본 입장에서 온 세계의 인류가 서로 화합해 호혜평등한 관계를 맺기를 어느 누구보다도 기원한다. 우리는 분단 민족의 아픔을 아직도 곱씹고 있다는 점에서 그 누구보다도 하나되 기를 기원한다. 그러나 진정한 화합은 서로가 서로를 인정함에 있고 서로의 모습이 서로에게 발전적 자극이 되어줌에 있다. 진실로 진정한 하나됨은 서로가 자기를 잃지 않은 채 또한 타인을 구속하지 않은 채 더불어 자유로운 것이다. 그러므로 세계화합의 일원이 되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모습을 되찾는 것이요, 통일의 한쪽이 되는 것은 또 한쪽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자신만만함을 갖추는 일이기도 하다. 이는 바로 우리의 자랑스런 문화유산을 올곧게 세우는 일과 일맥상통한다. 「문화저 널」이 찾고자 하는 '백제의 미소'와 판소리의 전통과 동학의 가르침에 바로 이어진다. 며칠전 다시 고향을 들렀다. 시내를 따라 산골로 접어드는 길이 옛처럼 정겹지 않았다. 바위들이 없어져버린 시내소리가 옛같지 않은 것은 당연하거니와, 모내기를 갓 마친 논에서 왁자지껄 들려오는 요란스런 개구리 소리도 왠지 낯설었다. 나 같은 사람들이 어렴풋이 나마 느끼고 있던 터의 정신이 손상된 탓일까. 5년 후 이 길을 걷는 기분은 어떠할까. 10년후에도 내가 이 길을 걸을 수 있을까. 어릴 적 뛰놀던 시내 하나가 좀 바뀌었다고 이토록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우리 삶의 근간인 우리문화의 변질에 대해서는 내가 여지껏 어떻게 반응해 왔을까. 외국문물의 하나인 영문학 연구는 '제대로' 해 온 셈인가. 어쨌거나 앞으로라도 고향과도 같은 문화의 영역에 있어서도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우리 스스로가 우리문화의 파수꾼이 되어야 할 일이다. 비록 짧은 지면이나 올곧고 자랑스런 우리의 「문화저널」처럼. 「문화저널」 50호 출간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