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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7 | 연재 [세대횡단 문화읽기]
웅치전적지를 다녀와서
윤덕향 발행인(2004-01-29 14:33:13)

전주에서 모래재를 넘어서 진안에 이르는 도로가 개통되기 전에 전주-진안가 도로에 세칭 곰티재가 있고 그곳에는 웅치전적지임을 알리는 기념비가 세워져있다. 그런데 최근 들어 전적비가 세워진 자리가 잘못되었으며 본디의 전적지는 다른 곳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리고 곧 뒤를 이어 이 문제를 둘러싸고 관심있는 사람들의 활발한 논의가 있으며 문화저널에서도 지난번에 이와 관련된 글이 실린 바 있다.
웅치전적지는 임진왜란 초기인 1592년 7월 진안을 거쳐 전주를 침공하려는 왜군을 정담(鄭湛), 이복남(李福男), 황박(黃璞) 등의 조선군과 의병이 맞아 싸운 곳이다. 전주성을 침공하려던 왜군은 이 전투후 전주 방면으로 진출하여 소양, 안덕원에까지 이르렀으나 이 전투에서 입은 타격으로 전주성을 공략하지 못하고 퇴각하게 되었다. 그 결과 이치전투에서의 승리와 더불어 전주성을 보존할 수 있었던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전주성이 보존됨으로써 우리나의 곡창지역인 전라도가 온존할 수 있었고 바로 이 점에서 이 전투가 가지는 역사적 의미는 대단히 큰 것이다.
웅치전적지를 둘러싼 논의는 크게 두가지로 요약될 수가 있다. 하나는 새로 밝혀진 전적지에 기념비를 세우고 사당을 짓는 등의 기념사업을 도민들의 힘을 모아 벌임으로써 나라를 위하여 숨진 선조들의 얼을 기리고 그 높은 뜻을 후대에 길이 전해야 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기본적으로 그같은 사업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인식을 같이 하지만 새로 밝혀진 전적지에 대한 역사적 실증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의견이 있다. 어느 경우든 웅치전적지가 가지는 역사적 의미를 보다 널리 알리기 위한 기념사업이 전개되어야한다는 점에는 인식을 함께 하고 있다. 다만 새로 웅치전적지라고 주장되는 곳에 대하여 보다 신중히 검토하자는 의견과 그곳임이 틀림없으니 기념사업을 추진하면서 이를 확인하자는 정도의 의견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아마 이 사업은 앞으로 이루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이같은 사업이 필요하다는 점에는 전혀 이견이 없으며 심정적으로는 최근에 주장되고 있는 웅치전적지가 본디의 전적지였을 것으로 생각하면서도 한두가지 점을 생각하게 된다.
첫째 웅치전적지의 정확한 위치에 대한 문제이다. 보도에 의하면 웅치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다음 소양, 안덕원 방면으로 진출했던 왜군이 조선의 군사들이 국가를 위하여 장렬하게 죽은 그 충절을 기려서 웅치전투에서 죽은 조선군사를 모아서 만들어주었다는 무덤을 발견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 무덤이 천인의총으로 이 무덤이 있는 곳이 본디의 전적지이며, 현재 전적비가 서있는 곳이 웅치전적지가 아니라는 근거의 하나이다.
여기에서는 천인의총으로 거론되는 곳이 잘못되었다거나 의미가 없다는 점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또 당시 상황으로 미루어볼 때 어느 한 곳에 왜군들이 우리측 열사들의 주검을 가능한 한 모두어 무덤을 만들었으며 이를 천인의총으로 불렀을 가능성을 배제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천인의총이 있으므로 그 주변이 웅치전적지라고 주장할 경우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은 여론을 어떻게 설명할 수가 있겠는가 하는 점을 말하려는 것이다. 또 실제로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들에 의해서건 천인의총을 발견했다는 사람들에 의해서건 간에 천인의총으로 전해지는 곳을 조사하여 그곳이 천인의총이라는 근거를 얻지못했을 때 천인의총을 근거로 웅치전적지를 새롭게 파악하려는 시도가 전면적으로 부정될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점을염려하는 것이다.
따라서 보다 중요한 것은 역사적 실체를 확인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한다는 점이다. 즉 본디 위치가 어디인가 하는 문제에 접근하기 위해서 천인의총이 무네가 아니고 보다 근원으로 왜군의 침공로가 어디였겠는가하는 점이 밝혀져야 된다. 또 그 전투가 역사적으로 가지는 의미가 무엇이었느냐 하는 점을 떠나서 어떤 경과를 거쳐 어떤 식으로 종결되었느냐하는 점이 밝혀져야 된다. 즉 몇 명이 그 전투에 참여하였고 그들이 방어진을 마련한 곳은 어디이며 어떤 방어시설을 마련하였느냐 등등의 문제가 먼저 객관적으로 제시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들을 기초로 잘못 알려져있는 웅치전적지를 심정적으로가 아니라 합리적으로 밝혀야 한다.
두 번째로 사당을 세우고 그 주변지역을 성역화하려면 적지않은 경비가 소요될 것으로 예상된다. 조상의 얼을 되새기고 그를 통하여 사회교육을 하려는 마당에 그같은 투자는 어쩌면 당연한 것일런지 모른다. 또 그같은 투자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같은 투자를 통하여 얻을 수 있는 효과가 무엇일까를 잠깐이라도 생각해보아야할 것이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성역화이후 관리와 그 지역을 교육장으로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이 더불어 마련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생각되는 것으로 남원시에 자라하고 있는 만인의총이 있다. 그 사당에 배향되는 차례를 두고 있었던 저간의 다툼을 상기하자는 것이 아니다. 임진왜란이 끝날 무렵 남원성을 지키다가 죽음을 맞은 선열들의 넋을 기린다는 만인의총이 지금 어떻게 기능하고 있는가는 돌아볼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더구나 시내주변에 자리하고 있는 만인의총과 비교하여 깊은 산골에 있는 웅치전적지에 마련될 시설물들을 어떻게 가꾸고 넋을 기리는 도장으로서 기능할 수 있게 할 것인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아침저녁으로 스쳐 지나가는 길목에 있는 전주객사가 어떤 곳인지를 알지도 못하고 알려하지도 않는 오늘의 우리에게 웅치전투가 가지는 역사적 의미는 어떻게 비쳐질 것인가?
즉 기념사업을 벌일 경우 즉각적이고 단기적인 계획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장기적이고 보다 미래지향적인 것이어야 한다. 기념관을 짓고 그를 통하여 사회 교육을 도모하려할 경우 그에 걸맞는 구조와 체계를 갖추고 그를 위한 기반을 마련하여야 한다는 점이다. 위에서 예로든 만인의총만이 아니라 국민의 성금을 모아서 지은 독립기념관의 경우 현재 본래의 기능을 다하고 있는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기념관이 없어서 국민교육이나 사회교육이 제대로 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지금 보다 근본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그같은 시설이 있어도 이를 이용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는 만인의총이나 독립기념관 등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우리의 문화기반이 갖추어져 있지 않은 탓이다. 다시 말하자면 외형적인 치레를 갖추는 데에만 문화적 관심이 집중되었을 뿐 그 내실을 갖추려는 시도나 기획이 없다는 점이다. 독립기념관의 건립은 이 땅에 사는 우리와 우리의 후손들에게 이 땅의 고난과 영광을 알리고 우리의 미래를 보다 알차게 꾸미기 위한 민족 공동체 의식을 결집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우리 민족 공동체 성원들의 의식 저변에서부터 우러난 것이 아니라 일본의 교과서에 우리의 역사가 왜곡 기술된 것이 알려지고 국민 감정이 격앙된 것을 계기로 이루어진 것이다. 다라서 대외적으로 위리의 의지를 보였다는 점에서 웅장한 건물은 그 나름의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으로 채워져야되는 것은 인물이 아니라 우리 민족 공동체의 정신인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껍데기만을 갖추는 기념사업이 아니라 역사적 실체를 확보하고 우리 지역 공동체, 나아가 민족공동체에게 의미있는 기념사업이 되기 위한 기획이 필요한 것이다. 더구나 웅치전투가 있었던 400주년을 눈앞에 둔 현 시전에서 분명 의미가 있는 사업에 지역공동체 성원 개개인이 마음에서 우러나는 관심을 가지게 된다면 웅장한 시설물이 없어도 이미 그 의미는 충족되는 것이다. 비단 이 웅치전적지만이 아니다. 갑오동학농민운동 100주년을 맞으며 우리가 준비하는 사업의 바탕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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