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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7 | 칼럼·시평 [문화칼럼]
참패와 싹쓸이
장세환‧ 한겨레신문기자,전북담당(2004-01-29 14:34:03)

6‧20 광역의회 선거결과가 밝혀지자 전북도청은 초상집 분위기에서 한동안 헤어나질 못했다.
전체 의석 52석 가운데 신민당이 51석을 휩쓸었고 나머지1석도 재야 무소속이 차지해 앞으로 개원될 도의회에서 우군(友軍) 1명 없는 채 적진(?)에서 곤욕을 치르게 될 것이 불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사정은 광주와 전남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신민당은 지난 13대 총선에 이어 또다시 호남에서 돌풍을 일으켰던 것이다.
그런한 신민당이 호남을 밴 전국을 참패를 했다.
아니 신민당의 참패가 아니라 그것은 분명히 집군 민자당의 압승이었다.
집권당이 압승했다고 해서 이상할 일은 아니지만 이번 경우는 해괴하기 짝이 없다.
국민이 선거를 통해 만들어준 여‧야정당들이 국민에게는 물어보지도 않고 자기들 멋대로 거대한 집권당을 만든뒤 그를 배경삼아 독재정권 아래서나 있음직한 일들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3당 야합으로 민자당이 태어나자 국회에서 법안이 날치기로 통과되고 벌건 대낮에 경찰이 국민을 쇠파이프로 때려 죽게 하는 일이 집어졌다.
그러고도 경찰의 고위책임자가 이에 책임을 지고 구속 또는 면직된 적이 없고 국민에 대한 대통령의 사과담화문 따위도 나오지를 않았다.
관련 전경들의 구속과 내무장관 경질만으로 버텨보려 하다가 이에 항거하는 젊은 국민10여명이 분신등 방법으로 귀중한 생명을 버리고서야 겨우 총리를 갈았을 뿐이다.
적어도 민족주의를 한다는 나라에서 국민을 이렇게까지 우습게 볼 수는 없었던 것이다.
때문에 지난번 선거에서 민자당이 압승하리라는 예상은 누구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은 엄연한 현실로 나타나고 말았다.
집군 민자당은 전체 의석 8백66석의 65%인 5백64석을 차지한 것이다.
이는 호남을 뺀 다른 지역에서 80%가까이 석권한 셈이다.
전통적인 야당도시 서울에서는 1백32석 가운데 1백10석을, 부산에서는 51석 가운데 50석을 거머쥐었다.
참으로 놀랄만한 일이다.
민자당이 이 결과를 자기 당에 대한 국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로 받아들여 힘으로만 밀어붙이는 강권정치를 서슴없이 자행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에 놀라움은 더욱 커진다.
이 결과에 대해 여러 가지 원인이 있을 수 있지만 적어도 ‘민자당이 예뻐서’ 비롯됐다고 여기기에는 무리가 따를 것 같다.
겉으로 나타난 결과만으로는 그같은 해석도 가능하겠지만 좀 더 안으로 들어가 뜯어보면 신민당을 비롯한 야권 전체에 대한 실망과 여기에서 비롯된 반발심리였다는 사실을 금방 알 수 있다.
한 대학생이 시위도중 경찰에 맞아죽은 사건으로 국민의 분노가 하늘을 찌르던 무렵 신민당 김대중 총재는 이에 찬물을 끼얹는 말고 행동으로 실망을 산 적이 있다.
이른바 ‘선거로 태어난 정권에 퇴진운동은 안된다’는 내용의 정권 퇴진 불가론이었고 그는 이 말을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김총재 아닌 누구였더라도 이 말만큼은 백번 지당한 말씀이다.
정권의 진퇴는 오직 국민들이 직접 참여하는 선거를 통해서만 가름지어진다는 것은 민주주의의 기본상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말은 불행하게도 시기를 잘못 택했다.
그 무렵은 이 말보다 ‘선거로 태어난 정권이 벌건 대낮에 국민을 때려 죽여도 되느냐’는 말이 나와야 했으며 따라서 신민당은 정부에 대한 공세의 고삐를 늦추지 않아야 했던 것이다.
국회에서 법안이 날치기 통과돼도, 노동운동에 대한 대탄압이 벌어져도, 물가가 하늘 높은줄 모르고 치솟아도, 피폐해진 농춘경제를 또 다시 휘청거리게할 농산물 수입개방정책이 이뤄져도 속수무책으로 고스란히 당해온 신민당이 아니었던가.
여기에다가 때를 잘못 고른 ‘말’과 공천잡음에 따른 이해찬‧이철용 의원등의 탈당으로 전가(傳家)의 보도(寶刀)처럼 내세원온 선명성마저 크게 훼손당했으니 참패를 당하지 않았다면 오히여 이상한 일이다.
우리 국민은 그런 야당을 믿고 따를만큼 의식수준이 낮거나 어리석지 않은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민당은 호남만은 싹쓸이하다시피 했다.
전남에서 민자당 1곳 말고는 광주 23, 전남 73, 전북 52석등 모두 1백48석 가운데 1백37석을 휩쓸었으며 나머지 10석은 재야 무소속이 차지했다.
이에 대해서는 죽어도 집권당은 직기 싫다는 호남인들의 반발심리가 다시 한번 신민당에 몰표를 주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또한 3‧26기초의회선거때 호남에서는 민자당 성향의 후보를 상당수 뽑아주었으나 영남은 그러지 못한데서 비롯된 지역감정이 깊숙이 작용했다는 분석도 설득력있게 들린다.
따지고보면 이같은 지역감정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고 삼국시대부터 내려온 것이며 미국 일본등 다른 나라에서도 다 있는 일이다.
있을 수 있는 일을 박정희 군사정권이 정권안보에 이용함으로써 치유불능의 상태로까지 악화시켰던 것이다.
71년 4‧27대통령선거에서 영남권의 대단합을 호소한 결과 당시 박정희 후보는 경남북에서만 김대중 후보보다 1백50만표를 더 얻었던 것이다.
이는 김후보가 전남북에서 박후보보다 더 얻은 63만표에 비해 87만표가, 전체승리득표 95만표에 비해서는 55만표가 더 많은 것이었다.
박 정권은 이에 대한 댓가로 집권 18년동안 경남북에 집중 투자를 했다.
또한 중앙정부의 요직에는 호남인물을 철저히 배제시킨 채 영남인사들만 기용해왔으며 이같은 악성 형태는 5공,6공을 거치면서도 계속 이어져 오고 있다.
호남인들의 한과 응어리는 여기서 비롯되고 있는 것이다.
거의 맹목적이라고도 여겨질 만큼 호남인들이 신민당에 대한 지지는 필연적인 것이고 차라리 처절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도 신민당은 민주화를 열망하는 국민들은 말할 것도 없고 응어리진 호남인들의 심정조차 제대로 헤아리지를 못하고 있다.
신민당 옷만 입으면 호남에서는 어차피 당선되는 만큼 인물을 따지기보다 특별당비라는 공천자금을 낼 수 있는 재력가 이면 전력(前歷)에 관계없이 공천장을 주는 행태가 계속되는한 신민당은 아성인 호남마저 잃을 공산이 크다.
이제 신민당은 6‧20 광역의회 선거결과를 뼈아픈 자기반성의 계기로 삼아 김총재의 2선퇴진등을 통해 선명성을 되찾고 야권 통합을 이루면서 정책정당으로서의 수권능력을 갖춰야 한다.
그 길만이 민주화를 바라는 국민의 뜻을 따르면서 잃었던 신뢰를 회복하고 지역당이라는 불명예를 벗어 던지는 동시 호남인들을 비난의 대상에서 건져낼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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